안동에 가면 꼭 찾아야 할 서원 건축의 백미, 병산서원
한때 안동에 가면 꼭 찾던 곳이 있었다. 바로 병산서원이다. 당시만 해도 이곳은 아는 이만 찾던 비장의 답사처였다. ‘한국 서원 건축의 백미’라는 수식어를 굳이 붙이지 않더라도 누구든 병산서원에 가면 깊은 감동을 받게 된다. 안동을 가는 지인들에게 꼭 추천했던 곳이 병산서원임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그 후 병산서원을 휘감아 도는 낙동강이 만들어낸 넓은 백사장은 대학생들의 MT장소로 바뀌었다. 밤이면 캠프파이어를 하는 불빛들이 반딧불마냥 강변을 밝혔다. 이때만 해도 그런대로 낭만은 있었다.
몇 년이 지났을까. 한 지인이 병산서원이 몸살을 앓고 있다고 했다. 관광버스가 서원 앞까지 들어와서 한적한 맛은 간 데 없고 북새통이란다. 설마 그럴까. 그럴 수도 있겠지. 마음은 갈팡질팡. 혹시 그 아름다운 비포장길에 포장도로를 냈을까. 바로 안동으로 출발했다. 진입로가 포장이 되어 있었다. 아, 절망하면서 길을 계속 가는데 느티나무가 의젓하게 버텨선 마을에서 포장길은 끝이 났다.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깊은 안도의 숨을 쉬었다.
서원 앞 끝없이 펼쳐진 백사장
서원에 도착하니 예전의 한가함은 없었다. 만대루에 올라 느긋하게 병산과 그 아래를 유유히 흐르는 낙동강을 바라보는 맛도 시끌벅적한 소리에 묻혀 버렸다. 그 후 한동안 여행자의 머릿속에서 병산서원은 차츰 잊혀져갔다.
물안개 피는 낙동강
수년 만에 다시 병산서원을 찾았다. 이른 아침에 일어나 아침을 먹는 둥 마는 둥 서둘러 서원으로 향했다. 달을 희롱하던 만대루에서의 옛 풍류는 사치가 되어버렸으니 인적이 드문 아침에 서원을 찾기 위해서였다. 한없이 펼쳐진 백사장 너머로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아침 물안개를 볼 수 있으리라는 기대도 발길을 재촉했다.
복례문
풍산들을 지나 구불구불 이어진 비포장길을 따라 병산서원으로 향했다. 울퉁불퉁했던 예전의 길은 불도저로 밀었는지 제법 번듯한 길로 바뀌었지만 비포장길이 남아 있는 것만 해도 여행자는 행복했다.
복례문의 가마와 뒷간
예전 안동사람들이 가장 넓다고 말하던 풍산들이 시원하게 펼쳐진 곳을 낙동강 줄기가 고개를 흔들며 나아간다. 서원 가는 고갯길에서 바람에 이리저리 흔들리며 쏴아쏴아 소리를 내던 예전의 그렇게 많던 미루나무들은 이미 베어져 황량함을 주었다. 4대강 개발로 파헤쳐질 강보다 먼저 운명을 달리한 것이다.
입교당
서원 앞 주차장은 한가했다. 몇몇 답사객만 보였다. 강으로 향했다. 족히 수만 평은 될 법한 이 강변 백사장은 병산서원의 앞마당 구실을 한다. 화산 자락에 자리한 병산서원은 ‘청천절벽’ 우뚝 솟은 병산과 그 아래를 휘돌아가는 낙동강, 은빛으로 빛나는 백사장이 있어 더욱 운치가 있다. 병풍처럼 늘어선 산을 짙은 안개가 감싸고 푸른 강에는 물안개가 피어올랐다. 깊은 고요. 그 속에서 한참을 거닐었다.
만대루
복례문을 들어서면 서원영역이다. 세속된 몸을 극복하고 예를 다시 갖추라는 ‘극기복례克己復禮’에서 따온 복례문은 솟을대문이다. 문의 안쪽에는 물건을 둘 수 있는 공간이 있는데, 서쪽 칸에는 옛날 향사 때 제수를 운반하던 의례용 가마가 있어 눈길을 끈다.
동쪽 칸 옆에는 옛 뒷간이 있다. 병산서원에 오면 볼일도 없으면서 꼭 뒷간 안을 들여다보는 습관이 생겼다. 안은 변함이 없었다. 예전 이곳에서 학문에 힘쓰던 유생들이 에로틱한 뒷간 널칸을 보며 배시시 웃었을 것이다. 부끄럼 많은 유생은 얼굴마저 붉히지 않았을까 싶다.
연못을 지나 고개를 숙여 다시 한 번 몸과 마음을 추슬러 만대루 아래를 지났다. 정면에 입교당이 있다. ‘가르침을 바로 세운다’는 뜻인 입교당은 그 이름처럼 서원의 핵심 공간이다. 가운데는 마루이고 양쪽에 방이 있다. 동쪽 방은 원장이 기거하던 명성재이고, 서쪽 방은 교수와 유사들이 기거하던 경의재다. 나이가 많은 유생들은 주로 동재에 기거하였다. 마루는 유생들에게 강학을 하던 공간이다.
입교당 양쪽에는 동, 서재가 있다. 유생들이 기거하던 건물로 강당인 입교당을 향하고 있다. 입교당 대청마루에 앉아 만대루와 안개에 허리가 잠긴 병산을 바라보니 병풍을 펼쳐 놓은 듯 아름답다.
정면 7칸, 측면 2칸으로 길게 이어진 만대루는 200여 명을 수용하고도 남을 정도로 장대한 규모이다. 통나무를 깎아 걸친 나무계단, 제멋대로 굽은 아래층의 기둥들, 자연 그대로의 주춧돌, 낙동강이 물결치는 듯한 통나무 대들보의 모습은 건축물조차 자연의 일부로 여기고 자연스러움을 최대한 살린 조상들의 사고가 고스란히 배여 있다.
만대루는 두보의 시 ‘백제성루百濟城樓’ 중 ‘푸른 절벽은 저녁 무렵 마주하기 좋으니 翠屛宜晩對’라는 글귀에서 따왔다. 그 이름처럼 해질 무렵에 누각에 올라서 바라보는 병산과 낙동강의 경치는 으뜸이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여행자가 찾은 이날은 보수 중이어서 만대루에 오를 수가 없었다.
강학영역인 입교당과 동재 사이를 빠져나가면 제향영역으로 사당인 존덕사와 제수를 마련할 때 사용하는 전사청, 각종 서책과 목판을 보관하는 장판각이 있다. 이곳에는 배롱나무가 심겨져 있어 늦여름에 찾으면 붉은 백일홍이 선경을 자아낸다.
전사청을 나와 동재 뒤의 쪽문을 나가면 고직사가 있다. 서원을 관리하는 고지기가 살던 곳이다. 고직사 앞에는 야외용 뒷간이 있다. 예전 서원에서 일하던 하인들이 사용했다고 하여 흔히 ‘머슴뒷간’이라고도 불렀다.
병산서원은 별다른 조경이 없다. 주위 풍경 자체가 워낙 빼어나서 조경을 별도로 조성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어느 하나 막힘없이 탁 트여 있는 공간 구성은 이미 건물과 자연이 하나임을 보여준다. 자연의 한가운데에 들어가 자연을 가득 누리던 옛 선조들의 자연관이 잘 드러나 있다.
병산서원은 서애 류성룡과 그 아들 류진을 배향한 서원이다. 원래 풍산현에 있던 풍악서당을 선조 5년인 1572년에 류성룡이 지금의 장소로 옮겼다. 임진왜란 때 불에 탔으나 광해군 6년인 1614년에 존덕사를 세워 그의 위패를 모시고, 1629년에 그의 셋째 아들 류진의 위패를 추가로 모셨다. 철종 14년인 1863년에 ‘병산서원’이라는 사액을 받았다. 1868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 때에도 남아 있었던 47곳 가운데 하나이다.
서원에서 돌아오는 고갯길에서 차를 세웠다. 서원 가는 길에서 본 공사 현장을 지나칠 수가 없었다. 그 많던 강변 나무들은 이미 다 베어졌고 푸른 습지도 점점 그 빛을 잃어 맨살을 드러내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 벌거숭이 몸뚱이마저 알알이 모래 되어 어디론가 실려 가고, 홀로 남은 강물만 외로이 흐를 것이다. 자연을 가두거나 소유하지 않고 자연을 있는 그대로 누리던 옛 선조들의 가르침을 누가 거부하는 지 답답한 마음에 눈시울만 붉어진다.
※ 병산서원은 최근 드라마 <추노>촬영지로 알려지면서 많은 이들이 찾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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