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회마을 한적하게 즐기려면 밤에 가자
- 손각대로 찍은 하회마을의 밤
아내와 딸은 배로 하회마을을 가기로 했다. 딸아이가 배를 타고 싶다며 졸랐기 때문이다. 혼자 차를 끌고 하회마을로 향했다. 길 위에는 이미 어둠이 깔려 전조등을 켰다. 예상대로 주차장은 한적했고 강둑에 들어서자 서둘러 마을을 빠져나오는 사람들로 붐볐다. 강 건너 부용대가 소란스럽다. 막배인 지 어서 오라고 재촉하는 선장의 목소리가 어스름 진 하늘을 가른다.
손님들을 다 태운 배가 강물에 크게 포곡선을 한 번 그리더니 이내 마을 백사장에 다다랐다. 배에 탄 사람들은 약간 상기되어 서로에게 말을 주고받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붉은 빛을 발하던 하늘도 만송정 솔숲에서 짙은 어둠으로 바뀌었다.
어둠이 내리자 솔숲은 연인들의 차지다. 그들은 둘둘 짝을 맞춰 벤치에 앉아 강변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을 안 휴게소에서 아내와 딸과 만난 후 마을을 돌아보기로 했다. 그러나 아이가 민속놀이를 하는 곳에 있겠다고 하여 다시 혼자 마을로 들어갔다.
마을길은 한산했다. 관광객들이 모조리 빠져나간 지금 여행자는 수백 년 전의 시간을 거슬러 올라갔다. 초가지붕 위로 높이 솟은 반달은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고향의 그것처럼 짙은 향수를 일으켰다.
충효당 골목으로 들어섰다. 서애 류성룡의 종택인 이 고택도 어둠에 싸여 있었다. 하회마을은 애초 풍산 류 씨들의 마을은 아니었다. “허 씨 터전에 안 씨 문전에 류 씨 배판”이라는 이야기처럼 김해 허 씨가 마을을 개척하고 광주 안 씨가 뒤이어 일가를 이루었으며 풍산 류 씨가 별러서 차려 가문이 흥성하게 되었다는 말이다.
양진당 대문간채의 방에 불이 켜져 있다. 삼각대도 없이 사진을 찍으려니 별 수 없이 가로등이나 이런 인공적인 불빛을 빌릴 수밖에 없다. 마을로 들어서기 전, 주차장에서 삼각대를 가지고 갈까 몇 번이나 고민했으나 차에 두고 그냥 와버렸다. 사진이 목적이 아니라 하회마을을 고요하게 걷고 싶은 마음이 더 많았기 때문이다.
충효당과 양진당을 비롯해 하회마을의 고택들은 이미 예전에 수차례 답사를 한 적이 있어 굳이 사진에 담으려 애쓰질 않았다. 골목길은 깊어질수록 아름다웠다. 가로등 불빛에 노랗게 물든 은행잎이 비치는 모습은 그 자체로 황홀했다.
마을길은 조용했다. 민박집을 나와 삼삼오오 산책을 즐기는 여행객들과 마을 주민들이 오가는 사람들의 전부였다. 삼신당을 중심으로 방사선형으로 뻗어 있는 마을길은 돌담이 아닌 흙담이다. 마을이 ‘연화부수형’ 즉 연꽃이 물 위에 뜬 형상이라 돌담을 쌓으면 무거워 가라앉는다고 하여 돌담 대신 흙담을 쌓은 것이다.
하동고택에서 골목길을 돌아 나와 남촌댁으로 향했다. 예전에는 남촌댁을 중심으로 한 남쪽의 ‘웃하회’에 집들이 즐비했다고 하나 지금은 대부분 논밭으로 변해버렸다. 강에서도 멀리 떨어져 있고 화산 자락의 논들에도 가까워 살기에 더 좋았다는 이곳은 남촌댁의 가세가 약화되면서 점차 집들이 줄어들다가 지금은 논밭으로 많이 바뀌었다. 오래된 감나무들만이 그 옛날 웃하회의 번영을 기억하고 있을지 모르겠다.
골목길을 빠져나와 다시 강둑에 섰다. 하회마을에 오면 마을 외곽을 두른 강둑을 거닐며 전체 지형과 지세를 익히고 난 후 마을 안으로 들어가서 골목 구석구석을 살피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어둠을 뚫고 차 한 대가 들어온다. 민박집 앞에서 잠시 멈추더니 이내 떠난다. 주말이라 방이 없었던 모양이다. 강둑길로 마을을 빠져나왔다. 시간은 이미 여덟 시를 향하고 있었다. 번잡함을 피해 고요하게 홀로 걸었던 하회마을은 어느새 보이지 않았다.
이날 여행자는 운 좋게도 입장료와 주차료를 내지 않았다. 하회마을을 한 번이라도 가본 사람이라면 해가 지고 난 후 이곳을 찾는 것도 좋으리라. 처음 간다면 마을 곳곳을 살피는 것이 주요한 여행이겠지만 주말이나 대낮에는 붐비는 사람들로 지치기 마련이다.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조용히 하회마을을 둘러볼 요량이라면 밤중에 마을을 찾거나 아침 일찍 물안개 피는 마을 강변을 산책하는 것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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