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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집 기행

화양구곡의 백미, 금사담과 암서재


화양구곡의 백미, 금사담과 암서재
 괴산여행④ - 금사담과 암서재

 

옛 사람들이 ‘금강산 남쪽에서 으뜸가는 산수’라 불렀던 화양동계곡은 바위와 숲, 계류가 빚어낸 아름다운 경치를 자랑한다. 하얗고 깨끗한 바위들이 하늘로 치솟아 선경을 자아내거나 혹은 바닥에 너럭바위로 누워 옥 같은 물을 흘러 보낸다. 골짜기 양쪽의 소나무들은 학을 불러들이고 계곡의 맑은 물은 이름도 예쁜 달천강으로 흘러 남한강을 따라 서해까지 이른다.

 

화양계곡에는 구곡문학이 있다. 자신을 주자에 비유했던 우암 송시열은 주자의 무이구곡을 본떠 화양계곡의 볼 만한 곳 아홉 군데를 골라 이름을 붙이고 화양구곡이라 했다.

 

화양구곡은 입구에서부터 골짜기를 거슬러 올라 1곡부터 9곡까지 펼쳐진다. 계곡의 맑은 물을 따라 산 속으로 10리쯤 펼쳐진 화양구곡의 백미는 4곡인 금사담과 암서재다.

 

화양구곡 중에서도 손꼽히는 경승지인 금사담에는 미끈하게 잘 생긴 바위들이 계곡을 가득 메우고 있다. 화양천의 맑은 물이 이곳에 이르러 소를 만들어 시퍼런 물빛을 드러내다 한번 바위에 부딪혀 하얀 물방울을 튕기다 다시 계곡을 따라 흘러간다.

 

원래 물 아래의 모래가 금가루 같다고 해서 금사담이라고 하였다. 금사담 물가 높직한 암반 위에는 조선 후기의 문신 송시열의 별장이자 서재였던 암서재가 있다. 송시열이 정계를 은퇴한 후 학문을 닦고 제자들을 가르치던 곳이다.

 

암서재로 가기 위해서는 계곡을 어렵사리 건너거나 아니면 6곡 능운대 뒤로 나있는 산길을 가야 닿을 수 있다. 예전에는 이곳 계곡에 철제 다리가 있어 건너기 수월했으나 지금은 없어졌다.

 

화양구곡이 주자의 무이구곡을 본뜬 것처럼 암서재도 주자의 운곡정사를 본뜬 것이라고 한다. 송시열은 서재를 지은 후 이렇게 읊었다. ‘시냇가에 바위벽이 열리어 그 사이 집 한 칸을 지었네. 고요히 앉아 성인의 가르침 받들어 한 치라도 더위잡고 올라보려네’


 

암서재 앞의 바위벽에는 각종 글씨들이 새겨져 있다. ‘금사담’ ‘충효절의’ 등이 그것이다. 이곳뿐만 아니라 구곡 곳곳에 새겨진 글씨들은 명이 쓰러지고 청이 서던 당시에 대한 송시열의 절박함을 엿볼 수 있다. 충효절의 네 글자는 명나라 태조의 글씨이고 다른 글자는 송시열의 것이라 전해진다. 구곡에 남아있는 대부분의 글씨는 송시열의 문인이자 노론의 선봉장로 활약했던 민진원의 글씨라고 한다.

 

암서재로 오르기 위해서는 송시열의 표현대로 바위벽 사이의 돌층계를 올라야 한다. 암서재는 목조기와로 2칸은 방이고 1칸은 마루로 되어 있다. 암서재기는 송시열의 문인 권상하가 쓴 것으로 현종 7년인 1666년 8월에 암서재를 짓고 이곳에 머물렀음을 알 수 있다.


 

화양구곡 곳곳에는 지금도 〈비례부동> 등 송시열의 필적이 많이 남아 있으며 화양서원의 터도 현재 복원되어 이곳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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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소리를 만나니 바람에 손을 씻다.  김천령  (http://blog.daum.net/jong56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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