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옛집 기행

조선 3대 천재가 살던 옛집을 가다


 

조선 3대 천재가 살던 옛집을 가다
괴산여행⑬ - 소설 <임꺽정>의 저자 홍명희 옛집을 가다

괴산읍 동부리에는 벽초 홍명희 생가가 있다. 일제강점기 최대의 문학적 성과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소설<임꺽정>의 저자 홍명희가 태어나서 살던 곳이다. 홍명희는 1888년에 동부리의 고택에서 태어났다.

 

1910년 금산군수를 지내던 아버지 홍범식이 한일합방조약 체결에 통분하여 관아에서 자결을 하였고 이는 이후 홍명희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벽초는 삼년상을 마친 후 중국, 싱가포르 등에서 독립운동을 모색하다가 1918년 귀국하여 잠시 평온한 삶을 살았으나 이듬해 3.1만세운동이 일어나자 괴산으로 내려와 만세시위를 주도하다 1년가량 옥살이를 했다. 


 

동부리 생가는 벽초 홍명희가 태어나서 1919년까지 살던 집이다. 만세운동을 주도했던 그가 감옥에 갇힌 후 집안 형편이 어려워지자 인근 제월리로 이사를 하게 되었다. 

그는 출감 이후에는 서울로 터전을 옮겨 왕성한 활동을 하게 된다. 동아일보 편집국장, 시대일보 사장, 신사상연구회, 신간회 활동 등을 통해 그는 민족운동에 열정적으로 참여하게 된다.









 

그가 장편 대하소설 <임꺽정>을 쓴 것은 1928년 11월 21일부터 조선일보에 연재를 하면서부터이다. 투옥과 출소를 거듭하면서 소설은 중단과 속개를 거듭하였고 이후 13년 동안의 끈질긴 집념으로 해방 후 미완인 채 10권의 단행본으로 나오게 되었다.



 안내표지판에는 홍명희의 아버지 홍범식 고택으로만 표기되어 있다

그의 생가에는 관리소에 붙어있는 낡은 사진과 임꺽정의 책표지 외에는 어디에서도 그의 흔적을 찾을 수 없다. 심지어 괴산군 홈페이지에도, 도로의 안내판에도 모두 아버지 홍범식 고택으로 알리고 있다. 표면적으로는 별 문제가 없어 보이나 이는 깊은 오해와 불신의 소산이다.

 근래에 복원된 홍명희 생가. 한때 50여 명의 대가족이 살았던 큰 저택이었다

왜 그랬을까. 홍명희는 알려진 대로 이광수, 최남선과 함께 조선 신문화의 삼대 천재로 불린 인물이다. 두 사람은 나중에 친일파의 길을 걷게 되나 홍명희는 반대의 길을 걷게 된다. 그는 1940년대까지 활발한 항일운동을 하다 40년대 이후에는 은둔생활을 하다 해방을 맞이하게 된다. 그는 일제강점기에 민족해방운동의 일환으로 사회주의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해방 후 남북연석회의에 참가하기 위해 북쪽에 가서 돌아오지 않았다. 1968년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그는 북한에서 여러 직책을 거쳤다.

 

바로 이런 점이 홍명희의 이름을 세상에 드러내지 못하는 이유 중의 하나였다. 심지어 괴산군 홈페이지에는 그의 이름조차 빼버리고 누군가 3.1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고만 적고 있다.

 사랑채

다음은 괴산군 홈페이지에 나와 있는 홍범식 고택(홍명희생가) 소개글이다.

“1730년(雍正8년)경에 건축된 것으로 추정되는 가옥으로 조선후기 중부지방 양반가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고가이며, 경술국치에 항거 자결순국한 항일지사 일완(一阮) 홍범식(洪範植)선생의 고택이자 괴산 3.1만세시위를 준비한 역사적인 장소이다.”

 

항일지사였던 아버지 홍범식은 경술국치로 자결을 하여 1942년 그를 기리는 순절비가 세워졌고 1962년 건국공로훈장이 추서되었다. 한때 사회주의사상에 젖어 있었고 북으로 간 후 요직을 거친 벽초의 이력은 남한에서 발붙일 여지가 없었던 것에 비해 아버지 홍범식은 적어도 남한사회에서 사상적으로 자유로운 인물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앙증맞은 굴뚝

사실 벽초 홍명희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그의 사상성향을 배타적 민족주의자로 보는 견해도 있고 사회주의자로 보는 경향도 있다. 다만 그의 인물 됨됨이에 대해서는 ‘단아한 학자’, 선비형의 인물‘ 등으로 표현하고 있어 그가 꼿꼿한 기상을 가진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안채

어찌 보면 그도 분단에 의해 잘 못 이해되고 있는 인물임을 알 수 있다. 북한에 간 후의 그의 행적을 못 마땅히 여길 수는 있겠으나 일제강점기에 그가 보인 왕성한 항일활동과 <임꺽정> 등의 문학적 성과에 대해서는 분명히 인정을 해주어야 할 것이다. 앞으로 항일지사였던 아버지 홍범식과 함께 벽초 홍명희의 이름이 실린 안내문을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장독대와 곳간채

아주 소박한 곳간



고산9경의 하나인 제월대의 고산정. 벽초 홍명희가 서울에서 제월리로 내려왔을 때 종종  낚시를 하며 쉬었다는 곳이라고 한다


김천령의 여행이야기에 공감하시면 구독+해 주세요

바람이 소리를 만나니 바람에 손을 씻다.  김천령  (http://blog.daum.net/jong5629) ▒

 * 이 포스트는 blogkorea [블코채널 : 김천령의 풍경이 있는 한국기행]에 링크 되어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