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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사에 머물다

꼼꼼히 둘러본 부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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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과나무와 은행나무
일주문을 지나면 이제는 제법 자란 은행나무 가로수가 천왕문까지 이어진다. 10월 말경이나 11월 초순에 부석사를 들리면 황금빛 잔치를 보게 된다. 은행나무 사이로 우람한 팔뚝을 자랑하는 사과밭이 조성되어 있다. 지금은 사과꽃이 하나 둘 지기 시작하지만 사과꽃향기 맡으며 한적하니 걸어보는 것도 좋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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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당간지주
일주문을 지나 천왕문 못미처 길 왼편에 있다. 위로 갈수록 점점 좁아지는 비례미가 돋보이며 끝을 반원으로 처리하여 깔끔한 맛이 있다. 4.28미터나 되는 키로 인하여 늘씬하다. 통일신라시대의 것으로 보물 제255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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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석축과 구품만다라
부석사를 얘길할 때 빠뜨릴 수 없는 것이 석축이다. 산등성이에 절집을 지어 점점 올라가면서 절의 풍광이 다르게 보이도록 설계하는 데 있어 석축을 쌓는 것은 필수적이다. 제멋대로 생긴 자연석을 있는 그대로 쌓으면서 빈 공간은 잔돌을 채워 메우고 있다. 흔히 부석사의 석축을 극락세계인 구품만다라의 상징이라고 한다. 천왕문까지 하품, 범종루까지 중품, 안양루 누각까지 상품, 무량수전을 극락에 비유한다. 사람에 따라서는 범종루까지 하품, 안양루까지 중품, 무량수전까지 상품, 무량수전 안에 들어서면 극락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부석사의 석축 중 가장 웅장하면서도 아름다운 곳이 범종루 못미처의 대석단과 안양루 주위의 이층 석축이다. 경계와 연결의 의미인 석축을 올라야 극락에 이를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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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맷돌
대석단을 오르고 범종루 못미처 삼층석탑 앞마당에 있다. 범종루 앞에 왜 삼층석탑이 있을까 하는 의문이 생기지만 19세기 중엽의 '순흥읍지'를 보면 안양루 앞에 법당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통일신라의 사찰 양식은 대개 법당 앞에 쌍탑이 있으므로 이로써 이해를 할 수 있다. 삼층석탑 앞에 버려진 듯 있는 맷돌을 보면 절이 번창할 때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다. 눈짐작으로 어림잡아도 가로 1,5 미터에 세로 2미터 정도는 족히 될 정도로 크며 통돌을 깎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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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두 가지 양식의 지붕을 가진 범종루
범종루(각)는 경사진 지형에 누각과 문의 기능을 겸하여 지은 건축물이다. 안양루와 마찬가지로 고개를 숙여야만 그 아래를 지날 수 있으니 부처를 뵙기 전에 공경한 마음을 가다듬으라는 의미도 있겠다. 범종루의 특이한 점은 지붕에 있다. 들어서는 방향이 남쪽은 팔작지붕이면서 나오는 북쪽은 맞배지붕 양식이다. 이는 앞쪽을 길쭉한 지붕선을 낸 팔작지붕으로 하여 건물의 위엄을 강조하였다면 뒷쪽은 지붕선이 없는 맞배지붕으로 하여 공간의 답답함을 덜어내고 있다. 목수의 안목에 다시 한 번 감탄할 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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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부석사의 숨은 부처, 안양루의 '공포불'
범종루 뒷마당에서 안양루를 바라보면 정좌하고 있느 부처의 모습이 보인다. 이는 공포의 조각이 앉아있는 사람의 형상으로 만들어져 마치 부처처럼 보인다. 전면 여섯, 후면, 여섯, 좌우 각기 넷으로 총 20개의 부처상이 있다. 특히 후면 여섯불은 서까래와 처마의 나무 색깔로 인하여 황금빛을 발하고 있어 가장 사실적인 모습이다. 공포 조각 사이가 부처로 보이므로 사람들은 '공포살'이라 부른다.

부석사의 숨은 부처 자세히 보기 (http://bloggernews.media.daum.net/news/11214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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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안양루 아래로 점점 드러나는 석등과 무량수전
범종루에서 한 번 가다듬은 마음은 무량수전에 오르기 전 안양루를 지나면서 한 번 더 옷깃을 여미게 된다. 안양루 아래를 지나면 무량수전의 천장과 석등이 그 모습을 서서히 드러낸다. 한 번에 보여주지 않는 무량수전과 석등의 동선과 시선이 주는 아름다움에 자신도 모르게 빨려들어간다. 석등은 국보 제17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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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공민왕이 쓴 무량수전 현판
홍건적의 난을 피해 안동에 머물렀던 공민왕이 쓴 글씨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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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석공의 숨결이 느껴지는 무량수전 기단의 '마애명'
무량수전의 기단에 새겨져 있다. '충원 적화면 석수 김애선'이라는 글이 있는데. 무량수전에 대한 석공의 자신감과 애착이 드러난다. 이 위대한 건축물을 조성한 석공의 숨결이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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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의상대사와 선묘의 사랑이야기 '선묘상'
의상을 사모하던 선묘를 기리기 위한 선묘각은 무량수전 뒤에 있다. 이 선묘각 안에 선묘의 초상이 있다. 의상대사를 사모한 선묘는 당나라 유학을 마치고 돌아가던 그의  뱃길을 용이 되어 호위를 하였다고 한다. 또한 의상대사가 이곳에 절을 지으려 터를 잡았지만 일단의 무리가 방해를 하자 선묘용이 커다란 바위로 변하여 공중에 떠서 그들을 위협하여 물리쳤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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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부석과 석룡
부석사는 고려시대에는 '선달사' 또는 '흥교사'로 불리었다. '선달'은 부석의 우리말인 '선돌'을 한자로 표기한 것이 아닌가 싶다. 선묘용이 다시 석룡으로 변하여 무량수전 앞마당 석등에 꼬리를 두고 무량수전 내의 불상에 머리를 두어 땅 밑에 묻혀 있다는 전설이 있다. 임진왜란 때 왜인들에 의해 두 동강이 났다고 하나 아직 확인된 바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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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간결한 미의 극치 조사당 벽면과 가장 오래된 조사당 벽화
무량수전 옆 삼층석탑을 돌아가면 호젓한 산길이 있다. 이 산길을 따라 잠시 걷노라면 어느덧 조사전에 이르게 된다. 조사당은 말그대로 절을 창건한 조사스님인 의상대사를 모신 곳이다. 조사당 측면을 보면 단정하고 간결한 벽면 구성에 한동안 넋을 잃게 된다. 지금은 유물 전시각 안에 있는 조사당 벽화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벽화로 조사당을 해체, 수리할 때 벽체로 떼어 보관하였다. 조사당은 국보 제19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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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사당 벽면과 살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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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선비화 이야기
조사당 지대에 있다. 의상대사가 짚고 다니던 지팡이를 꽂은 것이라고 한다. 의상대사는 이 나무의 싱싱함과 시듬을 보고 자신의 생사를 알라고 했다고 한다. 학명으로는 '골담초'이다. 사람들의 손길을 탈까 봐 창살로 막아 놓아 보는 이로 하여금 갑갑함을 준다. 인간이 인간을 믿지 못하니 슬픈 현실이다. 그나마 다행히도 내가 간 날 꽃이 예쁘게 피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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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자인당의 삼존불상
원래 부석사 내에 있던 석불이 아니라 인근 절터에서 옮겨온 불상이다. 광배가 뚜렷한 양 끝의 불상은 화엄종의 주불인 비로자나불이다. 가운데의 불상은 아미타불로 보인다.  비로자나불 두 기는 보물 제220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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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부석사 제일 관망 포인트, 안양루와 삼층석탑
안양루와 무량수전 동쪽 삼층석탑에서 바라보는 소백연봉과 부석사 경내의 풍광이 으뜸이다. 석탑이 대개 법당 앞에 위치하는데 비해 이 삼층석탑은 옆에 자리하고 있다. 이는 무량수전 내에 있는 아미타불이 서쪽에 좌정하여 동쪽을 바라보고 있는데서 연유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안양루에서 올라오는 쪽이 앞쪽이지만 부처가 앉은 자리에서는 삼층석탑 자리가 앞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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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무량수전의 아미타불과 녹유전
서방 극락세계를 주재한다는 무량수전의 아미타불은 흙을 빚어 만들었다고 한다. 고려시대의 소조불로는 가장 크며 국보 제45호이다. 무량수전 바닥은 고려시대만 해도 녹유를 입힌 전돌을 깔았다고 한다. 극락세계가 유리로 되어 있다는 것을 구현한 것이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엎드려 절을 하는 것이 일반화되면서 녹유전을 걷어내고 나무바닥을 깔았다. 유리로 된 푸른 바닥, 상상만 해도 황홀하지 않은가. 이 녹유전 몇 점이 현재 유물전시각 내에 보존되어 있다. 무량수전 안은 촬영을 할 수 없어 글로 대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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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부도와 서부도, 원융국사비각도 들러 보면 좋다. 무량수전 옆 '부석'에서 삼성각을 지나 취현암쪽으로 내려오면 장대한 석축을 보며 조용히 걷기에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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