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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사에 머물다

연두빛에 빠진 내소사의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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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명암 건너편 산자락에 앉은 내소사는 내변산의 관문이다.
내소사는 백제 무왕때 세워진 고찰. 원래 이름은 소래사라고 한다.
소정방이 이 절에 머물며 이름이 바뀌었다는 얘기도 내려오지만
 미당 서정주가 쓴 내소(來蘇)란 이름에 얽힌 얘기가 더 그럴싸하다.
대웅전 단청작업을 할 때 일을 끝마치기 전에는 문을 열지 말라고 했으나
 방정맞은 중이 창구멍으로 들여다보았다.
붓을 잡고 단청을 하던 새가 쓰러지며
단청작업은 내생(來生)이나 소생(蘇生)에 하라고 해서 내소란 이름이 나왔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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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소사로 가는 길은 일주문을 지나 전나무숲으로 시작된다.
600여미터에 달하는 나무 터널을 걷노라면
속세와는 단절되어
나안의 나, 나밖의 나를 가만히 들여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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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전나무 숲길이 끝나면 어둠의 땅에서 밝은 햇빟의 넓은 뜨락과 마주하게 된다.
봄에는 벗꽃이 만발하고 여름에는 짙은 녹음이
가을에는 미치도록 붉은 단풍이 겨울에는 시린 눈꽃이....
낮은 담장을 양옆에 낀 사천왕문이 우리를 맞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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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왕문에 들어서면 낮은 돌축대에 소담하게 내려 앉은 내소사 경내가 한 눈에 들어온다.

제각기인 주춧돌 위에 천연덕스럽게 앉은 봉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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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면으로 보이는 봉래루 아래를 고개 숙인채 걸어가면
어느 새 소나무 뒤로 시원스레 나래를 편 대웅전이 조금씩 그 자태를 드러낸다.
대웅전 오르는 길은
부석사 대웅전 오르는 길과 흡사한 긴장이 있다.
누각 밑을 고개 숙여 묵묵히 걸어가노라면
눈 앞에 조금씩 모습을 드러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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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가산의 연봉들이 감싸듯 두르고 있는 대웅전!
이 건물은 못을 쓰지 않고 나무토막들을 깍아 끼워 맞춰 세운것으로
그 공력과 기술에는 탄복할 수 밖에 없다.
전설에는, 청민선사가 절을 중건할 당시
대웅전을 지은 목수는 3년 동안이나 나무를 목침덩이만하게 토막내어 다듬기만 했다고 한다.
장난기가 발동한 사미승이 그 중 한 개를 감추자,
 나무깍기를 마치고 토막 수를 헤아려 본 목수는
자신의 실력이 법당을 짓기에 부족하다면서 일을 포기하려 했다.
사미승이 감추었던 나무토막을 내놓았지만
목수는 부정 탄 재목을 쓸 수 없다 하여 끝내 그 토막을 빼놓고 법당을 완성했다.
 그래서 지금도 대웅보전 오른쪽 앞 천장만 왼쪽에 비해 나무 한 개가 부족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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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웅전 돌계단을 오르니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이 대웅전의 꽃창살무늬이다.
채색을 하지 않아도 화려한 것이 오히려 격조가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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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의 높낮이가 달라도 평평하게 하지 않고
지형에 맞추어 세운 설선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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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령 950년 된 입암마을의 할아버지 당산나무, 할머니 나무는 일주문 앞에 있다.
보종각 안의 고려동종은 원래 이곳에 있지 않았다.
1222(고려 고종 9)년 청님사 종으로 주조되었다가 절이 없어진 뒤 찾을 길 없다가,
1853(조선 철종 4)년 청림사 터에서 발견되었다.
발견당시 종에서 소리가 나지 않아 소리를 낼 수 있는 사람이 가져가기로 했는데,
내소사 스님이 종을 치자 비로소 아름다운 울림이 이어져 내소사로 오게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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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나무 숲길이 끝나는 작은 연못 옆 산기슭에는 부도전이 있다.
부도전 오르는 길은 작은 실개천에 가로 놓인 앙증맞은 돌다리를 건너야한다.
부도전의 여러 비 중에
 탄허 스님의 호쾌한 글씨가 쓰인 "해안범부지비(海眼凡夫之碑)가 단연 눈에 들어온다.
 
    生 死 於 是   是 無 生 死
          생사가 여기에 있는데 여기엔 생사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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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많은 여행기와 스크랩은 Daum 블로그
김천령의 바람흔적(http://blog.daum.net/jong5629)를 참고하세요.

내소사의 황홀한 설경은 (http://bloggernews.media.daum.net/news/621410)를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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