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통집’을 아세요. 돌담길 따라 고성 왕곡마을을 걷다
화진포의 작은 암자, 정수암에서 3일을 머문 후 길을 나섰다. 왕곡마을에 들렀다가 속초로 가서 남쪽으로 갈 생각이라고 하니 스님이 왕곡마을까지 태워주겠다고 했다. 애초 속초까지 태워주겠다는 걸 염치없는 짓이라 여겨 왕곡마을까지만 스님의 도움을 받기로 했다. 왕곡마을부턴 온전히 여행자답게 뚜벅뚜벅 걸을 일이다.
왕곡마을 뒤에 있는 오음산(260m)에 잠시 올라 송지호와 동해를 내려다보았다. 산이 기묘했다. 후지와라 신야가 여행했던 소아시아에서 인도에 이르는 '광물의 세계'에서나 봄직한 그런 산세였다. 나무와 풀이라고는 볼 수 없는 사막의 바위산처럼 붉기까지 한 산은 경외와 경배의 신성함마저 감돌았다. 한참을 그렇게 산 아래를 굽어보다 왕곡마을 입구에서 스님과 헤어졌다.
송지호가 지척인 왕곡마을에선 '송지호 둘레길'을 안내하는 푯말을 종종 볼 수 있었다. 마을에 들어서자마자 여느 곳에서 볼 수 없는 이곳만의 특이한 집들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것은 제법 번듯한 기와집이든, 조금은 소박한 초가집이든 상관없이 하나같이 안채에다 긴 눈썹을 붙인 양 처마를 덧댄 구조였다.
평면의 모양이 'ㄱ자' 형인 집은 안방, 사랑방, 마루, 부엌이 한 건물 안에 나란히 들어가 있고 부엌에 외양간이 덧붙여 있는 겹집 구조다. 흔히 조선시대에 함경도 지방에서 많이 사용되던 구조인데, 겨울이 춥고 긴 산간지방에서의 생활이 편리하도록 지어진 것이다.
흔히 이런 집들을 ‘양통집’이라고도 한다. 한 용마루 아래에 앞뒤로 방을 꾸민 집을 말한다. 양통집의 유형은 정주간이 있고 없음에 따라서 크게 둘로 나누어진다. 정주간이 있는 양통집은 함경도에 분포하고 정주간이 없는 양통집은 강원도, 영동, 소백산맥 등지에 분포한다.
옆에서 보면 우리의 옛 가옥 구조와 확연히 다른 겹집 구조를 확인할 수 있다. 추위가 심한 북쪽지방이다 보니 하나같이 이중 구조로 집을 지은 것이다.
이곳 집에서 볼 수 있는 또 하나의 특징은 대문이 없다는 것이다. 동족마을이라는 특성도 있지만 입구 쪽으로 대문과 담장이 없는 건 눈이 많이 와서 고립되는 것을 방지하고 햇볕을 충분히 받기 위해서다. 집을 앉힌 기단이 높은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대신 집 뒤로는 뒷담을 높이 둘러 바람을 막고 뒷마당은 부엌을 통해 출입하도록 했다. 개방적인 앞마당에 비해 뒷마당은 길에서는 지붕만 보이는 폐쇄적인 공간이다.
집집마다 굴뚝 위에 항아리가 놓여 있는 걸 볼 수 있다. 집마다 굴뚝 모양은 다르나 굴뚝 위에 항아리를 엎어 놓은 모습은 엇비슷하다. 굴뚝에 항아리를 왜 올렸을까. 굴뚝을 통해 나온 불길이 초가에 옮겨 붙지 않도록 하고 열기를 집 안으로 다시 들여보내기 위한 것이 아닐까 여겨진다.
외양간도 눈여겨볼 일이다. 바깥에서는 출입할 수 없고 부엌을 통해서만 출입이 가능하다. 외양간을 이렇게 몸채에다 덧붙인 이유는 온기를 유지하기 위해서다. 사랑방에도 별도의 아궁이를 만들었고 불씨의 보호만을 위해 별도의 공간을 만들었을 정도로 겨울의 바람이 드센 이곳에서 추위를 이기는 건 중요한 문제였다.
또 지붕에 쌓이는 적설로부터 건물을 보호하기 위해 배면의 서까래 직경이 더 굵은 집들이 대부분이다. 지붕 내부도 환기를 통한 결로를 막기 위해 회칠을 하지 않고 산자를 엮은 채로 서까래가 그대로 드러나게 구성했다.
마을 입구로 걸음을 옮겼다. 소나무 장한 이곳 산기슭에는 동학사적기념비가 있다. 동학의 2대 교주인 최시형이 1889년 왕곡마을에서 머물며 포교 활동을 한 것을 기념하여 1997년 6월 천도교에서 마을 입구에 비를 세운 것이다.
오른쪽 언덕배기에는 ‘양근 함씨 4세 효자각’이 있는데, 양근 함씨 가문에서 6명의 효자가 있었다는 자부심을 읽을 수 있다. 마을 가운데에도 ‘함희석 효자비’가 남아 있다.
이곳의 대표적인 가옥은 함정균 가옥으로 마을의 위쪽에 있다. 산봉우리가 집을 둘러싸고 작은 개천이 집 앞을 흐르는 아늑한 곳에 자리하고 있다. 마을 전체가 중요민속자료로 지정돼 있는데, 이 집은 별도로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78호로 지정돼 있다.
19세기 중엽에 지은 이 집은 앞면 4칸, 옆면 2칸의 겹집이다. 앞으로 마루 두 칸이 있고 그 뒤에 안방을 두었고 옆면에 사랑방과 고방을 둔 영동 북부지방의 전형적인 가옥이다. 사랑방 옆에는 별도의 아궁이가 있고 고방과 사랑방 사이의 벽을 바깥쪽으로 연결한 후 지붕을 덧달아 헛간으로 사용하고 있다. 마을의 여느 집처럼 ㄱ자형으로 뒤로는 툇마루가 있고 대청마루 안에 뒤주를 설치한 점이 특이하다. 마을을 한 바퀴 돌고 나니 시장기가 돌았다. 점심시간을 훌쩍 넘긴 시각이었다. 마을 중앙에 있는 식당을 들렀다. 소박한 건물임에도 각종 방송국에서 촬영을 해갔다며 벽면이 어지럽다. 산채비빔밥을 주문했더니 온통 나물투성이다. 하도 나물이 많아 비비는 데도 한참이나 걸렸다. 근데 잠시 후 입안에서 감도는 나물 맛에 흠뻑 빠지게 됐다.
신정열(52) 아주머니는 30년 넘게 막국수를 팔아 왔는데 이곳에서 식당을 한 지도 26년째란다. 막국수에 동치미국물을 쓰고 있는데 할머니에게 직접 배워 그 맛이 도시와는 확연히 다르다고 강조했다. 나물 또한 산과 바다에서 직접 채취해서 손님들의 밥상에 내놓는다고 했다. 마당에는 그가 캐온 두릅 등 나물하며 미역 따위를 말리고 있었다. 이 집도 조금 있으면 초가집으로 지붕을 이을 거란다. 장사 때문에 여태까지 미루고 있었는데 더는 미룰 수 없어 조만간에 초가집으로 바꾸어 밥집 대신 주막을 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왕곡마을은 19세기 전후로 지어진 북방식 전통 가옥으로 잘 보존되어 있어 2000년 국가지정문화재인 '중요민속문화재 제235호'로 지정됐다. 송지호와 맞닿아 있는 왕곡마을은 양근 함씨와 강릉 최씨의 집성촌이다. 고려 말 두문동 72인 중의 한 사람인 함부열이 조선왕조의 건국에 반대해 간성에 은거한 데서 비롯됐으며 그 후손인 함영근이 입향조이고 강릉 최씨는 최응복이 입향조다. 임진왜란으로 폐허가 되었다가 19세기를 전후하여 북방식 전통가옥들이 군락을 이루어 마을이 형성됐다. 마을 형국은 오음산이 주산이 되고 두백산과 공모산이 왼쪽으로, 순방산과 제공산이 오른쪽으로, 호근산이 안산이 되어 앞쪽에 있다. 5개 봉우리가 겹친 듯이 어우러져 있는 마을은 배의 형국으로 구멍을 뚫으면 배가 가라앉기 때문에 마을에 우물이 없다. 마을회관을 중심으로 위쪽은 함씨마을, 아래쪽은 최씨마을이 거주하고 있고 개천 너머의 서쪽에는 여러 성씨가 살고 있다. 이곳에선 전통한옥 숙박체험도 할 수 있다. 자세한 정보는 왕곡마을 홈페이지를 참고하면 된다. 돌담길을 따라 동구로 나왔다. 바다까지는 불과 1km 남짓이지만 어촌이라기보다는 깊숙한 산촌의 느낌이 더 나는 왕곡마을. 평화로운 이 마을로 들어오는 길에는 난데없이 대전차 방어벽이 있다. 이곳이 분단의 최북단임을 상기시켜 주고 있는 셈이다. 마을 초입에는 저잣거리가 형성돼 있었다. 찾는 이가 없어서인지 인적조차 없다. 이곳에는 향토식당과 떡체험장, 한과체험장이 있고 공예체험관과 특산물 판매장이 운영되고 있다. 바다를 향해 걸었다. 국도 7호선의 정류장에 서면 속초 가는 버스가 있다고 했다. 한참을 걷고 있는데 멀리서 버스가 보인다. 무작정 뛰기 시작했다.
추천은 새로운 여행의 시작, 오른쪽 '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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