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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집 기행

1977년부터 2013년 현재도 영업 중입니다!

 

 

 

 

 

1977년부터 2013년 현재도 영업 중입니다!

- 보성 득량역 문화장터 36년 된 행운다방의 추억

 

 

 

 

 

페인트로 쓴 낡은 글씨가 간판을 대신하고 있는 ‘역전이발관’은 굳게 닫혀 있었다. 대신 유리창에 공병학 씨의 연락처가 남겨져 있었다. 요즈음은 손님이 거의 없어 이발소를 종종 비우는 대신 전화를 하면 언제든 이발을 할 수 있다는 역무원의 말이 생각났다. 전화기 너머로 이발사 공병학 씨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울렸다. 여수에 문상을 가서 오늘은 힘들겠다며 내일 보자고 했다. “다방으로 가보시오. 우리 마누라니께. 아니면 길가에 포니 차 보이죠. 거기 보면 우리 아들 전화번호가 적혀 있소. 거기로 한번 연락해보소.” 전화를 끊자마자 다방에서 넉넉하게 사람 좋아 보이는 아주머니 한 분이 나왔다.

 

 

‘1977년부터 2013년 현재도 영업 중입니다’

“이 짝으로 오시오. 커피나 한잔 하고 가시게.” 이발사 공병학 씨의 아내이자 이곳에 문화역거리를 조성한 공주빈(36) 씨의 어머니다. 방송국 MC인 아들 공주빈 씨와 통화는 했으나 행사 등으로 워낙 바빠서 다음 주까지는 도저히 인터뷰가 불가능하다며 전화나 메일로 인터뷰를 약속했다. 근데 그의 어머니를 만나고 난 후 그와의 인터뷰는 더 이상 필요가 없게 느껴졌다. 최수라(64) 씨의 입담은 상상을 초월했다.

 

 

볕이 제법 따가워 다방으로 들어갔다. ‘1977년부터 2013년 현재도 영업 중입니다’ 라고 적힌 문구가 먼저 들어온다. 최수라(64) 할머니는 커피를 내어왔고 여행자에게는 특별히 매실차를 내어왔다. 20년이나 되었다는 매실차답게 깊은 맛이 우러났다. 길보다 무릎께 낮아 보이는 다방 안은 70, 80년대 분위기였다.

 

 

벽 한쪽에는 나훈아, 정수라, 하춘화, 이미자, 윤수일 등이 전성기였던 70, 80년대의 오래된 LP판이 진열돼 있었다. 아직도 음악이 나오느냐는 여행자의 말에 최 씨 할머니는 “그럼요” 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그중 윤수일의 LP판을 꺼내어 턴테이블에 올렸다. 착 가라앉은 오전의 공기를 뚫고 추억의 소리가 나지막이 조금은 들뜬 듯 다방 안에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흥얼거리며 엉덩이를 들썩거리다 알록달록 꽃무늬 벽에 붙어 있는 성인 영화 포스터에 눈길이 갔다. 아, 근데 대략 난감이다. 영화 포스터의 그림이 야했다. ‘마지막 찻잔’은 그렇다 치더라도 ‘세 번은 짧게 세 번은 길게’라는 제목에선 고개를 갸우뚱거리다 남녀 배우의 묘한 눈빛과 야한 사진을 보고서야 폭소를 터뜨리게 됐다.

 

 

이 뿐만 아니다. 테이블 위에 놓인 것은 그 흔한 라이터 대신 성냥이다. 그것도 화랑 성냥. 동전을 넣어 운세를 보는 기계도 아직도 잘 작동한다. 잠시 멈춘 듯한 괘종시계가 한쪽 벽면을 장식하고 있다.

 

 

검은 다이얼 전화기와 각 집마다 선으로 된 잭을 꽂아 전화를 연결하는 낡은 교환대는 이 다방이 예전 마을의 모든 전화와 소식을 총괄했던 지휘소였음을 상기시켜 주고 있다. 붉은 나무 상자에 담긴 다이얼을 돌리는 빨간 공중 전화기에는 ‘용건만 간단히’라고 적혀 있다. 그 옆 벽에는 ‘중요지명피의자종합수배’ 전단지가 단단히 붙어 있다. 왠지 험상궂어 보이는 범죄자의 얼굴과 신상에 절로 오싹해진다. 삐꺽거리는 탁자 위에 놓인 선데이 서울을 비롯한 각종 잡지 등도 이곳이 꽤 오래된 다방임을 넌지시 말해주고 있었다. 이야기 도중에 최 씨 할머니가 20년은 족히 된 보해 소주 대병을 가져왔을 때에는 아내와 나는 거의 까무러칠 정도로 웃고 말았다.

 

 

한복마담이 있던 시절, 다방엔 빈자리가 없었다

이곳에 다방이 생긴 건 77년이었고 최수라 씨가 84년에 인수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당시만 해도 의자 수가 30개에 달했는데 늘 빈자리가 없었다고 한다. 비가 오면 손님이 더 붐벼 앉을 자리 찾기가 힘들었을 정도라고.

 

 

다방에 새 아가씨가 오면 동네 사내들이 난리였다. 아가씨들은 손님들이 사주는 차를 하루에 수십 잔씩 마시기가 예사였다. 커피 값이 500원 할 때 당시에는 하루에 백 잔 넘게 팔렸단다. 다방은 최 씨가 경영을 하고 곱게 한복을 차려입은 한복마담을 별도로 두어 다방에 드나드는 손님들을 접대하고 관리했다. 아가씨도 서넛 명이 있었다.

 

 

벌써 의자가 세 번 바뀔 정도로 시간이 흘러 30년이나 지났다며 최 씨 할머니는 ‘휴우’하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당시 다방 경영만 했던 최 씨는 아가씨들 밥을 해주거나 어르신을 모시는 등 눈에 띄지 않게 주로 방안에서만 생활했다고 했다.

 

 

“정수라 알지, 가수 정수라 나하고 이름이 같어.” 전라도 억양이 강하게 배어 있는 최 씨 할머니는 제주 추자도 출신이다. 슬하에 1남 3녀가 있는데 아들이 현재 득량역 문화거리를 조성하고 있는 공주빈(36) 씨다.

 

 

너희들 시대에는 입속도 예뻐야 한다.”

처음 시집왔을 때 남편이 큰아들인 줄만 알았지 종갓집인 줄은 모르고 왔다. 이래저래 고생도 많이 했지만 선행상을 3번이나 탄 효부였다. 네 번째부터는 다른 사람들이 받을 수 있도록 상을 거절하기도 했다. 그런 생각은 지금도 여전한데 항상 웃고 남에게 베푸는 재미로 산다고 했다. 그러다보니 저축은 한 적이 없다. 다만, 최 씨가 운영하는 다방이나 남편이 운영하고 있는 이발소는 퇴직금이 없기 때문에 20년 전에 연금과 보험을 넣어 노후를 대비했다. 30년 전에는 큰딸의 치아 교정까지 했단다. “너희들 시대에는 입속도 예뻐야 한다.”고 당시 어린 딸에게 말했다고 한다. 최 씨의 세상 보는 눈이 상당히 밝았고 시대에 앞선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통 크고, 남보다 앞선 생각과 투자에 대한 안목이 유달랐던 최 씨 할머니는 말씀 중에도 자신감이 넘쳤고 미소를 잃지 않았다.

 

 

올해 마흔인 큰딸이 학교를 다닐 때만 해도 전교생이 450명이었던 득량중학교는 이제 전교생이 25명밖에 남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이발소도, 다방도 손님이 줄어든 건 당연지사. 득량면에는 12개 리와 8구의 마을이 있어 전에는 면사무소에서 회의가 10시에 있을라치면 8시쯤에 사람들이 와서 차 한 잔 하고 가곤 했을 정도로 다방은 아침부터 손님이 들끓었다. 그러나 몇 년 전 국도 2호선 공사가 시작되고 4차선으로 우회도로가 나면서 손님이 뜸해지더니 종국에는 찾는 이조차 손꼽을 정도가 되었다. 예전에는 이곳 역 주위에만 은하수, 오봉, 역전, 선정, 유정, 행운 등 여섯 개의 다방이 있었는데, 한 곳은 노래방으로 다른 한 곳은 호프집으로 바뀌고 나머지는 사라졌다. 다방으로 온전히 남은 곳은 이곳 행운 다방뿐이다.

 

 

다방에 대한 사람들의 시선도 따가웠다. 특히 딸이 셋이다 보니 주변의 곱지 않은 시선에 남모를 가슴앓이도 많이 했는데 직업에 귀천이 없고 착하고 열심히 살면 된다는 생각으로 여태까지 꿋꿋하게 살아왔다. 딸의 상견례 때 아빠는 이발사, 엄마는 다방을 한다는 게 못내 맘에 걸렸는데 다행히 사돈댁에서 이해해줘 무척이나 고마웠다고 했다.

 

 

원래 웃고 화사하게 목숨 걸고 웃자

셋째를 임신했을 때 딸 둘을 낳고 죄스런 마음에 보따리까지 싸놓고 있었다. 그런 고된 마음고생에 몸무게가 44kg까지 빠졌는데 살이 달라붙어 뼈밖에 남지 않았다. 다행히 셋째는 아들이었다. “달고만 나와도 이쁜데, 참 이쁘게도 생겼어.” 하며 기뻐하던 시어머니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고 했다. 집안은 잔치 분위기였고 시아버지는 아들을 낳아준 며느리를 위해 손수 일주일 동안 세 끼 미역국을 꼬박 챙겨줬다. 항시 며느리가 옆에 있어야 할 정도로 시아버지의 며느리 사랑은 각별했다. 시아버지는 82세 때 고인이 되었고 시어머니는 92세로 아직 모시고 있다.

 

 

17살 때 가족이 보성군 득량으로 이사 오고 난 후 최 씨가 고향인 추자도를 찾은 것은 9년 전이었다. 추자도에 있던 사촌오빠가 돌아갔을 때였다. 고향을 떠난 지 무려 38년 만이었다. 고향 이야기에 최 씨의 낯빛이 서서히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스마트폰으로 예전 여행자가 쓴 추자도 글과 사진을 보여주자 함박웃음을 짓더니 금세 눈물을 글썽인다. “으메, 어쩔 거나! 아! 다무래미, 묵리고개, 대서리, 영흥리, 여기가 나 고향이여. 푸랭이를 종종 가기도 했어. 상추자도, 하추자도. 아직도 눈에 선한디...” 깊은 한숨이 묵직한 다방의 공기를 뚫고 나왔다.

 

 

행운다방의 커피 값은 2천 원이었다. 음료수도 이천 원이었고 비싸다고 해봐야 삼천 원이 최고의 가격이었다. 어르신들에게는 커피 값을 천 원만 받는다고 했다. 최 씨 할머니는 방안에서 방명록을 꺼내왔다. 이름이랑 몇 자 적어두면 득량역 문화거리가 앞으로 2차, 3차로 확장될 때 방명록을 보고 연락을 주겠다고 했다. 딸아이가 대신 글자를 적었다. “어이쿠, 잘도 쓰네.” 하시더니만 오천 원짜리 두 장을 꺼내며 어린이날 선물이라며 건넨다.

 

 

당황한 건 아이와 아내, 여행자도 마찬가지였다. 몇 번을 사양했음에도 주는 기쁨이라며 극구 만류를 한다. 그럼 만 원은 아이에게 큰돈이니 오천 원만 받겠다고 해도 웃기만 할 뿐 도저히 받지를 않았다. 대신 매실차와 커피 값 4천 원은 감사히 받겠다며 스스럼없이 금고에 넣었다.

 

 

우리 일행이 가는 게 아쉬운지 보는 눈이 애틋하다. 문 밖까지 배웅을 나왔다. 지나는 길이면 언제든 들러 차 한 잔 하고 가라며 흔드는 손이 푸근하기 그지없다. 뒤돌아보니 최 씨 할머니는 낡은 다방 아래서 여태 손을 흔들고 있었다.

 

 

다방 한곳 액자에는 “웃는 날”이라는 글귀가 있었다. 그 글귀는 최 씨 할머니의 삶의 방식을 오롯이 말해주고 있었다. “웃는 날 / 월요일은 원래 웃는 날, 화요일은 화사하게 웃는 날, 수요일은 수수하게 웃는 날, 목요일은 목숨 걸고 웃는 날, 금요일은 금방 웃고 또 웃는 날, 토요일은 토실토실 웃는 날, 일요일은 일없이 웃는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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