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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의 땅, 제주도

용두암 제대로 보려면 석양이 질 무렵 오세요

 

 

 

두암을 제대로 보려면 석양이 질 무렵 오세요.

 

스물 한 번의 제주도 여행 첫날, 저녁을 거나하게 먹은 일행에게 잠시 휴식이 필요했다. 가까운 곳에 용두암이 있어 산책삼아 가보기로 했다. 점점 붉어지고 있는 하늘도 우리의 발길을 부추기는데 한몫했다.

 

 

아니나 다를까. 바다에 이르자 하늘은 붉다 못해 선홍빛으로 변하더니 급기야 다홍빛을 띠었다. 다홍색의 고운 옷감이 하늘에 나리고 거친 듯 부드러운 잿빛 구름이 가볍게 붓질을 한 듯 파란 창공을 톡톡 쳤다.

 

 

해가 완전히 떨어지기 전 하늘이 다시 붉어졌다. 마지막 온 힘을 다해 붉은 기운을 토해내던 태양이 바다 너머로 사라지자 하늘은 다시 선홍빛으로, 다홍빛으로 물들었다.

 

 

해안으로 늘어선 횟집과 카페들에도 하나둘 불이 켜지기 시작했다. 수평선에 걸쳐 있는 어선들에도 불이 들어오고 연인들은 불빛 아래로 짝을 지어 모여들었다.

 

 

가로등에 불이 켜지자 땅은 검은빛으로 몸을 숨기고, 바다는 스멀스멀 뭍으로 밀려들었다.

 

 

어두운 땅과 붉은 하늘 사이로 굉음이 울린다. 검은 몸뚱어리에 불빛을 깜박이던 비행기는 어느새 선홍의 하늘을 독차지했다. 공항이 지척이라는 걸 그제야 알았다.

 

 

문득 날고 싶었다. 가끔 날고 싶을 때가 있다. 입을 크게 벌리고 하늘로 솟아오를 듯 포효하는 용두암을 보고 있자니 더욱 날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하다.

 

 

여인의 실루엣... 노을을 배경으로 한 여인의 실루엣은 늘 아름답다. 이곳에선 적어도 잔소리하는 아이의 엄마도, 새침데기 아가씨도, 바가지 긁는 아내도 아닌 그녀는... 그저 일상의 모든 것을 제쳐두고 풍경이 된 여인일 뿐이다. 벼랑에 서서 붉은 노을에 치맛자락이라도 날린다면 카메라를 쥔 사내의 손은 저도 모르게 스르르 힘이 풀려버리리라.

 

 

때론 그렇다. 가까우면 좋은 듯하나 일정한 거리를 두어야 관계가 아름다워질 때도 있다. 자기 것으로 만들려 애쓰고, 자신만의 공간만 두라고... 너무 가까이 다가서면 오히려 더 멀어지는 경우가 있다. 해질녘 노을을 등지고 바위에 살포시 올라선 여인처럼 가끔은 멀찌감치 떨어져 바라만 보는 것도 아름다운 일이다.

 

 

바다가 검어졌다. 노을마저 진 것이다. 밤바다를 비추는 어선들의 또렷해진다. 저 불빛을 보며 섬을 헤맨 적이 있다. 추자도 가는 길에 작은 섬 하나가 있다. 관탈섬... 옛날 제주도로 유배 가던 이가 관복을 벗고 임금을 향해 절을 했다는 섬이다. 맑은 날이면 이곳에서 그 섬을 볼 수 있다.

 

 

제주에 오면 누구나 한번쯤 들르는 용두암. 이젠 온통 중국인들의 차지다. 우리말을 하는 이들은 보이지 않고 '살라살라' 중국말밖에 들리지 않는다.

 

 

우리말을 하는 게 어색할 정도다. 혹시 여기가 중국인가? 괜스레 멋쩍어서 '어~험' 하고 호기롭게 헛기침을 해보지만 떠드는 소리에 이내 묻힌다. 아홉 살 딸애도 비슷한 느낌이었는지 큰소리로 나를 불렀다. "아빠~앙, 같이 가셀라~잉."

 

 

애국가에도 나왔고 제주를 알리는 관광책자에는 어김없이 등장하는 용두암을 실제로 보고 나면 대개 첫마디가 '애걔' 다. 사진으로 봐선 꽤나 웅장하리라 짐작하지만 막상 실물을 대하면 생각보다 작은 규모에 실망하게 된다.

 

 

그러나 실망만 하기에는 이르다. 용두암을 제대로 보려면 낮이 아닌 석양이 질 무렵 와야 한다. 맑은 날보다는 파도가 심한 날에 와야 한다. 보는 위치도 서쪽으로 100m 정도 비껴난 위치가 좋다. 용두암을 몇 번 다녀간 여행자의 소견에 이곳을 밥 먹듯이 드나든 토박이의 고견이기도 하다.

 

 

흔히 '동한두기'라고 불리는 해안에 솟은 이 용두암은 높이가 약 10m 정도이다. 200만 년 전 뜨거운 화산이 분출하면서 차가운 바닷물과 만나 생긴 것으로 용이 승천하려다 뜻을 이루지 못했다는 전설을 담고 있다.

 

 

용두암은 평소 그 머리만 드러내고 몸은 바다에 숨겨 두었다. 어쩌다 바닷물이 밀려나가 용의 꼬리까지 드러나는 날도 있다는데 자그마치 나머지 부분이 30m가 넘는단다.

 

 

용두암에 조명이 들어왔다. 색색의 조명에 용두암은 정신을 못 차리는 듯, 고유의 신비로움을 잃고 있었다. 관광객들에게 눈요기만 시켜주고 사진의 배경만 될 뿐 화려했던 옛 영광은 도무지 읽을 수가 없었다.

 

 

먼 옛날 한라산 산신령의 옥구슬을 훔쳐 하늘로 승천하려던 용이 신령이 쏜 화살에 맞아 바다에 떨어져 돌로 굳었다는 이야기... 용이 되어 하늘로 올라가는 것이 소원이었던 백마가 장수에게 잡혀 바위가 되었다는 이야기... 용왕의 사자가 한라산에 불로장생의 약초를 캐러 왔다가 산신이 쏜 화살에 맞아 죽었는데 그 시체가 응고되어 몸은 바다에 잠기고 머리만 물 위로 솟았다는 이야기... 이제 한낱 전설에 불과하다.

 

 

용두암 주위에는 횟집과 카페들이 많다. 그중 한 카페에 들어가 시원한 주스 한 잔을 마셨다. 밤의 바다를 들여다보았다. 맑았다. 밤인데도 바닥이 훤히 보였다.

 

 

용두암은 지척에 있는 용연과 함께 제주도 기념물 제57호로 지정되어 있다. 공항에서 가까우니 자투리 시간에 용두암과 용연에 꼭 가볼 일이다. 용연은 옛날 시인과 선비들이 밤에 배를 띄워 기암절벽의 맑은 물에 비친 달을 보고 풍류를 즐긴 곳으로 제주 12경인 '용연야범龍淵夜帆'에 속했다.

 

◀ 2008년 촬영한 용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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