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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가 있는 여행/또 하나의 일상

칼국수 만들다 딸애에게 봉변당하다



칼국수 만들다 딸애에게 봉변당하다

비가 내리던 어제였습니다. 애초 시골에 계신 팔순 노모를 뵈러 갈 계획이었으나, 갑자기 억수비가 내리는 바람에 다음 주로 미루었습니다. 비가 내리니 어릴 적 어머니가 해 주시던 칼국수가 문득 떠오르더군요.

딱히 할 일도 없고 해서 점심으로 칼국수를 만들어 먹자고 했습니다. 아내도 선뜻 동의를 했고 제가 칼국수를 만들기로 했습니다. 그때만 해도 이 일이 나중에 엄청난 후폭풍을 몰고 올 지는 꿈에도 생각 못했습니다.


어릴 적 기억을 더듬어 반죽을 시작했습니다. 얼마 전 1박2일에서 칼국수를 만들던 모습도 떠올리며 말입니다. 제법 그럴싸한 반죽이 되었고 어디서 본 것은 있어서 냉장고에 1시간 정도 숙성을 했습니다. 잘 익은(?) 반죽을 꺼내어 홍두깨로 펴서 칼질을 했습니다. 물론 다시마, 양파, 멸치, 황태 등 갖은 재료로 육수를 냈습니다. 옆에서 지켜보던 아내도 조금은 감탄을 하는 듯했습니다.

딱 거기까지만 좋았습니다. 끓는 물에 면을 넣었더니 서로 엉키면서 붙기 시작했습니다. 긴 젓가락으로 휘젓기를 몇 번, 다 익은 듯하여 칼국수를 식탁에 올렸습니다. 그런데 어이없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국물이 하나도 없더군요.
아내가 한 마디 했습니다.
"칼국수가 아니라 죽인 것 같은데...."
그래도 아내는 면은 쫄깃하고 간도 적당하여 맛있다고 했습니다.

실패작이여서 아쉬움이 많이 남았지만 처음인지라 다음에 국물 문제만 보완하면 되겠다 싶었습니다. 딸애에게도 칼국수를 한 그릇 퍼주었습니다. "아이, 맛없어!" 아이의 직설적인 말에 저보다도 아내가 더 놀란 듯했습니다. 급기야 아이는 숟가락을 놓았습니다. 먹성 좋은 아이가 음식을 이렇게 안 먹는 모습은 처음이었습니다. 충격이었습니다.
"맛있는데.... 지아야, 먹어 봐. 응."
아내가 아무리 설득해도 아이는 꿈쩍을 하지 않더군요.

망신도 이런 망신이 있나. 무안해하는 제가 안쓰러운지 아내는 연거푸 세 그릇을 비우더군요.
"여보, 그래도 면은 맛있지?"
저의 말에 아내도
"그러게. 지아가 왜 안 먹지. 맛있는데...."
그러면서도 말끝을 흐렸습니다. 오랜만에 직접 만든 음식이라 저는 맛있게 먹었습니다.


그러고 오후를 보내고 칼국수에 대한 생각은 까마득히 잊고 있던 저녁 무렵이었습니다. 옆에 있던 아내가 갑자기 배를 잡고 웃었습니다.
"여보, 이것 봐. 크흐흐흐." 아내는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듯 자지러졌습니다. 무슨 일인가 싶어 아내가 주는 아이의 일기장을 보았습니다. 일기장을 보고 처음에는 아이가 대견했습니다.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는데 칼국수 만드는 과정을 나름 잘 정리를 했더군요.
문제는 마지막 글이었습니다.

".... 이렇게 만드는데 완성된 칼국수는 되게 맛이 없었다."


저도 모르게 크게 웃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웃을 일만은 아니었습니다. 조금은 괘씸하더군요. 꾹 참으면서 한 마디 했습니다.

"그래도 지아가 칼국수 만드는 과정을 열심히 보았네. 맛은 조금 없었지만 그렇지?" 저는 자신을 합리화하며 딸애가 적어도 칼국수 만드는 과정은 재미있어 했으며, 제일 마지막에 맛이 없었다고 잠시 밝혔을 뿐이라는 사실에만 주목했습니다.

그런데 이때 아내가 결정타를 날립니다. "제목을 보시오. 크흐흐." 제목을 보던 저는 심한 배신감에 휩싸였습니다. "맛이 없는 칼국수" 제목으로 보아 아이는 처음부터 아빠의 칼국수를 비난할 목적으로 일기를 쓴 듯합니다.


딸애가 그러니 속이 상하군요. 딸 바보라서 그런가요. 올해 여덟 살인 딸애가 하루가 다르게 커가고 있습니다. 그만 컸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ㅎㅎ. 오랜만에 음식을 해보니 아내의 마음도 알 듯합니다. 그래도 여태까지 아내가 만든 음식에 대해 투정을 부린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이번을 계기로 앞으로도 아내가 해준 음식을 맛있게 먹어야겠습니다.

그런데 국물은 다 어디로 사라졌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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