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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섬

애인과 몰래 숨어 살고 싶은 곳, 모라개



 

애인과 몰래 숨어 살고 싶은 곳, 모라개

 

하조도 어류포에서 신전해수욕장으로 무작정 갔습니다. 섬 지도도 하나 없이 그냥 휑하니 갔다가 남녘 바닷가의 봄기운을 완연히 느꼈습니다. 바닷가 모래밭에는 인적 하나 없고 다만 여린 파도만이 모래를 가만히 어루만질 뿐이었습니다.

 

다시 어류포로 돌아와 어느 허름한 식당에서 라면을 먹었습니다. 혼자 여행 온 사진가와 이리저리 한담을 나누다 그의 손에 있는 지도에 눈길이 갔습니다. 포구의 관리소에서 하나 얻었다고 하더군요.

 

관리소에 가서 지도 한 장 만 달라하니 친절하게도 설명까지 곁들입니다. “어디 숨기에 좋은 곳이 있을까요?” 여행자의 뜬금없는 말에 약간 저어하더니 이내 말했습니다. “모라개를 가세요. 섬사람 외에는 잘 모르는 곳이지요. 초행길에 찾기는 힘들겠지만 정말 좋은 곳입니다.” 직원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길을 나섰습니다.

 

창리면을 지나 읍구마을에서 해안길을 잡았습니다. 야트막한 고개를 넘으니 다도해의 절경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었습니다. 수옥도가 아주 가까이 보이더니 이름도 유명한 관매도가 한눈에 들어옵니다.

 

방아섬이 보인다는 전망대에서 잠시 다리쉼을 하였습니다. 겨울을 잊게 하는 포근한 날씨에 햇빛마저 따사로이 섬들을 비춥니다. 수려한 풍광도 잠시. ‘여기 어디쯤 일거야.’ 지도를 다시 꺼내 봅니다.

 

그러나 이미 늦었습니다. 곤우마을이 여행자의 눈앞에 나타났습니다. 지나친 것입니다. 다시 길을 되돌아 해안 생김새를 하나하나 빠뜨림 없이 세세하게 들여다보았습니다.

 

이때 다 허물어져가는 슬레이트를 인 집 두어 채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해안 쪽으로는 소나무가 줄을 서 있었습니다. 망설일 필요도 없이 바다로 향했습니다. 솔숲을 지나자 그토록 찾던 해변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였습니다.

 

들릴 듯 말 듯 희미한 파도소리는 여행자의 심장을 뛰게 하였습니다. 숲이 끝나자 믿기지 않을 정도로 넓은 모래밭이 나타났습니다. 학이 양쪽 날개를 맘껏 펼쳐 새끼를 따뜻하게 품는 것처럼 모라개 해변은 바다로 뻗은 양쪽의 산 깊숙이 감추어져 있었습니다.

 

아무도 없었습니다. 바람마저 숨을 멈추었습니다. 파도도 더 이상 소리를 내지 않고 잔잔한 물결을 밀고 당기기를 조용히 반복할 뿐이었습니다. 한참을 걸었습니다. 나의 발자국만 모래 깊이 새겨졌습니다.


이곳이 ‘모라개’였습니다. 개는 해안을 뜻하는 말이겠지만 이곳은 정말 모라개라는 이름처럼 아무도 모를 듯합니다. 아니 아무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은 곳입니다. 밤 도망친 애인과 몰래 숨어 살고 싶은 곳입니다.


허름한 집을 수리하여 앞에는 작은 텃밭을 만듭니다. 소나무를 정원수삼고 해변을 안마당 삼으면 그만이겠습니다. 갈매기는 외로운 정인들의 친구가 될 것이고 섬은 그들의 말동무가 되겠지요. 가끔 찾아오는 이들을 위해 소라나 미역을 따서 소박하게 대접하면 그만이겠지요.


혼자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문득 어디선가 들리는 소리에 놀랐습니다. 지구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습니다. 깊은 산골에서 한밤중에만 들을 수 있다는 그 소리를 말입니다. 너무나 고요하였습니다. 파도는 그리움을 넘고 여행자는 꿈을 꾸었나 봅니다.


대학시절 가장 즐겨 읽었던 시를 나지막이 읊조려 보았습니다.

(...)또 내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내 사랑하는 어여쁜 사람이 
어늬 먼 앞대 조용한 개포가의 나즈막한 집에서
그의 지아비와 마조 앉어 대구국을 끓여 놓고 저녁을 먹는다
벌써 어린것도 생겨서 옆에 끼고 저녁을 먹는다
그런데 또 이즈막하야 어늬 사이엔가
이 흰 바람벽엔
내 쓸쓸한 얼굴을 쳐다보며
이러한 글자들이 지나간다
─ 나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어가도록 태어났다
그리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내 가슴은 너무도 많이 뜨거운 것으로 호젓한 것으로 사랑으로 슬픔으로 가득 찬다
그리고 이번에는 나를 위로 하는 듯이 나를 울력하는 듯이
눈질을 하며 주먹질을 하며 이런 글자들이 지나간다
─ 하늘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초생달과 바구지 꽃과 짝새와 당나귀가 그러하듯이 그리고 또 프랑시스 쨈과 도연명과 라이넬 마리아 릴케가 그러 하듯이

                                                  ---------백석의 <흰 바람벽이 있어 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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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소리를 만나니 바람에 손을 씻다.  김천령  (http://blog.daum.net/jong5629) ▒

 ☞ 참고하십시오. <추노> 6회분 마지막 장면(10여 분 쯤 방영되었습니다)은 소수서원입니다. 소수서원은 경상북도 영주시 순흥면 내죽리에 있는 한국 최초의 서원입니다. 이번에는 <추노> 관련 여행지 소개를 쉬고자 합니다. 세 번을 갔는데도 사진 자료가 쓸 만한 것이 없고 글도 어설퍼 올린 적이 없습니다. 더 좋은 사진과 자료가 있는 여행 블로거 분들이 올려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기쁨형인간님(클릭)이 <추노> 4, 5회 분에 나왔던 안동 부용대 일대를 소개하였습니다. 여행 블로거 분들이 시청자의 궁금증을 풀어 주면 좋겠습니다. 이 땅이 정말 싫으신 분들한테 한국의 아름다운 산천이, 그래도 마지막 희망이었으면 합니다.

 * 이 포스트는 blogkorea [블코채널 : 풍경이 있는 한국기행] 에 링크 되어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