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 전 미리 가본 고향 풍경
올해에도 어김없이 추석이 찾아 왔습니다. 내남할 것 없이 설레는 건 인지상정입니다. 부모님을 뵈올 생각에, 사는 게 바빠 명절이 아니면 자주 볼 수 없는 형제들과 누이들, 하루가 다르게 불쑥 커버린 조카 녀석들도 보고 싶습니다.
아내에겐 항상 고맙습니다. 형제들이 서울에 사는지라 고향에 가까이 사는 아내가 음식 준비와 소소한 일들로 늘 명절만 되면 제일 바쁩니다. 막내며느리지만 불평하나 없이 묵묵히 집안일을 하는 아내가 늘 고맙습니다.
밤송이가 턱하니 벌어져 붉은 속살을 드러냅니다. 작년에 돌아가신 아버지 생각이 간절합니다. 어느 해 아버지는 뒷산의 나무를 베어내고 겨울 내내 손이 부르틀 때까지 수백그루의 밤나무를 심었습니다. 농사지어 7남매를 대학까지 보내려니 무슨 일이든 해야 했었지요.
고향의 가을은 잠자리가 저공 축하 비행을 하면서 시작됩니다. 경남 중에서도 오지여서 그런지 고향땅은 아직도 물이 맑고 덜 개발되어 청정지역을 자랑합니다. 잠자리에 실을 묶어 날리던 추억이 새삼 떠오르는군요.
어릴 적 고향 마을에는 메밀을 많이 심었습니다. 이효석의 글이 아니더라도 달빛에 비친 메밀꽃에 대한 아련하고 저린 기억은 지금도 여전합니다. 한동안 고향에서 보이지 않던 메밀밭이 도시에 나간 자식들에게 추억을 먹이고 싶은 이웃 노인들에 의해 하나 둘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장날에 맞추어 시장을 보러 갔습니다. 시골에는 아직 5일장이 남아 있습니다. 시골 장터가 예전처럼 활기를 띄지는 않지만 대목을 앞둔 장날은 그래도 북적거리는 편입니다. 장터에서 동네 어르신들도 만나고, 어릴 적 친구와 선․후배들과도 종종 마주쳐 반가운 인사를 나눕니다.
아무래도 아직까지 제일 반가운 건 떡 방앗간입니다. 김이 모락모락 솟아나고 고소한 냄새가 사방을 진동합니다. 떡이 될 동안 기다리다 보면 앞서 만든 이들이 떡 조각 하나씩을 건네며 고향의 인정을 나눕니다.
장을 보고 음식을 만들다보면 금방 어둠이 내립니다. 멀리 서울에서 오는 형제들이 저진 곳을 디딜까 싶어 어머니는 사랑채 옆 대문간에 불을 켭니다. 멀리 가신 조상님들도 이날은 불빛을 따라 떠들썩한 고향집에 들립니다. 사랑방의 주인공이었던 아버지는 6개월의 병마 끝에 먼 길을 떠나시고 오늘은 보름달 아래 백열등만 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희미하게 비춥니다.
아버지가 먼 길을 떠나시고 시골에 홀로 계신 어머니는 하루 종일 텃밭을 일구며 쉴 틈 없이 사십니다. 쉬었으면 좋겠지만 당신은 오랜 세월동안 몸에 배인 노동을 쉽게 떨치지는 못 하는가 봅니다. 처마에 대롱대롱 매달린 옥수수와 곡식의 먼지를 날리는 키에는 어머니의 땀이 소복이 배여 있습니다.
다음날 가족들은 차례를 마치고 성묘를 갑니다. 아버지의 산소는 고인의 뜻에 따라 생전 온힘을 다해 일구던 땅에 모셨습니다. 허리가 휠 정도로 고단한 농사꾼의 생을 마감하고 이제는 그 땅에서 편안한 휴식을 취하시겠지요.
장성한 조카와 이제 걸음마를 뗀 조카들 모두 산소에 왔습니다. 묘비에는 어린 딸아이의 이름도 새겼습니다. 유교적 전통이 강한 고향에서 손녀의 이름을 묘비에 올리는 경우는 드물었습니다. 손녀든 외손주든 아버지에게는 다 같은 후손들이라 일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제가 끝까지 우겨 아버지 핏줄들은 한 사람도 빠짐없이 묘비에 이름을 실었습니다. 아이들은 자기 이름을 찾는 재미에 빠지고 할아버지에 대해 추억하는 좋은 시간이 되었습니다.
오후가 되니 친척들이 방문하였습니다. 집안에서 가장 어른이었던 아버지께서 돌아가시고 나니 예전보다 찾는 이들이 많지는 않습니다. 아이들과 격 없이 잘 어울리는 외사촌 형이 말 타기 놀이를 합니다. 딸아이는 부러운 듯 바라만 봅니다. 오는 길에 시무룩한 아이에게 목마를 태워 주었습니다.
벼가 누렇게 잘도 익어 갑니다. 1년 동안의 수고로움이 결실을 맺는 것이겠지요. 그러나 요즈음 황금 벼를 보고 있노라면 마음 한 구석에 진한 통증이 느껴집니다. 제 논을 갈아엎는 농부의 타들어가는 심정에 익어가는 벼이삭이 서럽기만 합니다.
성묘를 마치고 나면 인근에 있는 황매산을 찾곤 합니다. 근래에 들어 철쭉제로 전국적인 명성을 갖고 있는 황매산은 가을에 가면 야생화 천국입니다. 어릴 적 소풍 장소였던 황매산은 깊고 고요했던 예전의 신령스러움은 사라졌습니다. 온산을 감싸는 구름처럼 더 이상 고향만을 품을 수는 없는 모양입니다. 눈이 시립니다. 맑은 구름 한 조각에 내일이면 도착할 고향이 그립습니다.
▒ 바람이 소리를 만나니 바람에 손을 씻다. 김천령 (http://blog.daum.net/jong5629) ▒
이 글을 보시는 모든 분들, 풍성한 한가위 되시고 늘 아름다운 날들 만드시길 바랍니다..
'이야기가 있는 여행 > 또 하나의 일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여섯 살 아이가 쓴 첫 가을 여행기 (12) | 2009.11.01 |
---|---|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본 가을 마이산 (11) | 2009.10.31 |
학교 교실에서 개을 키우다니...... (13) | 2009.10.08 |
봉숭아, 정말 손대면 톡 터질까? 동영상으로 촬영해 보니 (9) | 2009.10.07 |
폐교된 모교를 25년 만에 가보니....... (15) | 2009.10.06 |
설거지 풀코스 완주한 여섯 살 딸, 만세 부르다. (14) | 2009.09.24 |
고속도로 태권V와 익살스런 표정의 장승들 (11) | 2009.09.14 |
통영여객선터미널, 왜 이러나? (8) | 2009.08.31 |
여섯 살 딸의 문자, 아빠에겐 재앙 (115) | 2009.08.21 |
고속도로에서 구름을 담다. (15) | 2009.08.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