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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자로 가는 길

전기도 없는 스님의 공양간, 깜짝 놀랐습니다

 

 

 

 

전기도 없는 스님의 공양간, 깜짝 놀랐습니다.

[김천령의 지리산 오지암자 기행⑬〕청매 조사를 기린 암자, 청매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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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솔암 가는 길
ⓒ 김종길

 


스님에게서 '카톡'이 왔다. 어쩐 일이지, 하다가 이내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이럴 수가! 스님이 계신 곳은 해발 1200고지 지리산 오지암자. 게다가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곳인데 카톡이라니. 잠시 어리둥절해서 메시지를 살피고 있다가 일단 본능적으로 안부를 먼저 전했다.

그러곤 잊었는데, 며칠 뒤 스님은 한밤중 지리산의 달 사진을 보내왔다. 지리산의 기운이 가득한 사진에는 사방이 캄캄했고 쟁반처럼 큰 달이 떠 있었다. 어떻게 카톡을 보냈을까. 스마트폰을 장만한 걸까. 스님이 갖고 있는 건, 전화만 간신히 되는 2G폰이었다. 작은 태양열충전기로 겨우 휴대폰 배터리를 충전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여쭤볼까 하다가 이내 생각을 접었다. 안 뵌 지도 오래되었으니 조만간에 찾아뵙고 직접 여쭤야겠다고 생각했다.

살림 100단인 주부도 놀랄 스님의 공양간

"거, 과일이나 좀 사오시오."

암자로 가던 날 아침, 스님께 전화를 했다. 뭐 산중에 별스럽게 필요한 게 있겠느냐며 마지막에 지나는 말로 툭 던졌다. 사과 일곱 개, 배 다섯 개를 넣은 배낭은 제법 묵직했다. 스님 과일 드시게 하려다 나 죽게 생겼군, 하는 엄살이 암자를 오를 때 들 정도로 무겁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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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솔암 가는 길
ⓒ 김종길

 


온산이 가을이다. 단풍이 20일쯤에 좋을 거라 스님이 귀띔을 했건만 아직 산 전체가 붉지는 않았다. 산속은 이미 초겨울의 쌀랑한 날씨였지만 가을은 더디 오고 있었다. 도솔암 가는 길은 이번이 두 번째, 당연히 스님을 뵙는 것도 두 번째인데 마치 오랜 벗을 만나러 가는 것처럼 설렜다.

그러나 암자에 스님은 없었다. "스님~" 몇 번을 불렀지만 대답이 없다. 삼소굴에도 법당에도 인기척이 없다. 짐을 풀고 법당 문을 열려는 찰나, 전화벨이 울렸다.

"나 여기 마천(경남 함양)이요. 손님이 와서 급히 산을 내려왔는데, 어쩔까요. 늦을 것 같으니 마천에서 한 번 봅시다. 좀 쉬었다가 내려오시오. 꼭요. 얼굴이나 한 번 봅시다."

바람 같다. 언제 산을 내려갔단 말인가. 배낭을 내려놓고 요기할 걸 꺼냈다. 허기가 져서 과일이나 깎아 먹을 요량으로 공양간으로 갔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공양간은 장작을 때느라 사방 벽과 천장에 그을음이 시커멓게 붙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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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님의 공양간
ⓒ 김종길

 


땅에서 허리께 내려가는 공양간은 정갈했다. 잘 닦여 반들반들 윤기 나는 무쇠 솥은 깨끗하게 빤 행주에 덮여 있었다. 오래된 냄비와 주전자 등 각종 식기구들이 하나같이 깨끗하니 잘 정돈되어 있다. 찬장과 수납공간에도 빈틈이 없다. 음식을 해주는 공양주 보살도 없이 비구 스님 혼자 공양을 해결한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부뚜막과 선반, 바닥에도 티끌 하나 없다.

살림 100단인 주부가 봐도 혀를 내두를 정도겠다. 잘 정리된 공양간을 보니 평소 스님의 성정을 알 것 같다. 나중에 청매암에서 만났을 때 정견 스님은 지저분한 건 못 보는 성격이라고 했다. 하나같이 오래되어 낡았음에도 전혀 비루하지 않고, 검소하지만 누추하지 않은 정갈함을 공양간에서 읽을 수 있었다. 어느 것 하나 허투루 다루지 않는 그야말로 담박한 스님의 삶이 공양간에 그대로 드러난 것이다.

사과 하나와 공양간에서 들고 나온 과도를 들고 암자 마당 끝의 바위에 걸터앉았다. 천왕봉을 위시한 지리능선이 한눈에 들어오는 풍경이다. 이곳에서 과일을 먹으니 선과가 따로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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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솔암
ⓒ 김종길

 


마당을 거닐었다. 산속이라 해는 금방 떨어지기 시작했다. 암자 뜰에 산 그림자가 냉큼 들어왔다. 어둠 속에서 하늘은 더 파랬다. 눈이 시리도록 푸른 가을 하늘에는 구름 한 점 없다. 이곳 도솔암에 머물렀던 청매 인오 스님의 시 한 수를 떠올렸다.

구름 다한 가을 하늘 둥근 거울이여 / 외기러기 날아가며 흔적을 남기는구나 / 남양의 저 노인네 이 소식을 알았으니 / 천 리 동풍에 말없이 통하네

남양의 노인은 혜충 선사를 이른다. 중국의 유명한 선승 마조 도일 선사가 하루는 동그라미(일원상)를 그려 경산 도흠 선사에게 보냈다. 이를 받아본 도흠은 동그라미 가운데에 점을 하나 찍어 마조에게 되돌려 보냈다. 남양 혜충이 이 이야기를 듣고 "음, 도흠이 마조의 속임수에 그만 넘어갔구나" 하였다. 구름 한 점 없는 가을 하늘을 보고 그 옛날 당대를 주름잡던 선승 마조, 도흠, 혜충 선사들의 일화를 읊은 것이리라. 둥근 거울은 마조가 그린 일원상이고 외기러기는 도흠이 찍은 점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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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솔암을 떠나다
ⓒ 김종길

 


"겨울에 눈 내리면 히말라야가 따로 없소"

산을 내려오니 다 늦은 오후다. 지리산 둘레길로 알려진 창원 마을에서 스님을 만났다. 스님은 빙긋이 웃더니 이내 마을 뒤 산길을 앞서갔다. 거침없다. 얼마나 갔을까. 마을을 지나 막다른 길에 이르러서야 멈췄다. 어찌해서 이곳까지 왔을까. 의심은 이내 풀렸다. 길의 끝에 암자가 있었다.

하얀 차 꽃이 피었다. 씨알이 굵은 호두도 차밭 여기저기 떨어져 있다. 밭둑 감나무에는 감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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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매암 차밭의 차 꽃
ⓒ 김종길

 


"꽃이 폈네요. 감이 붉으면 꽃 피는 것과 매한가지 아니겠소."
"고개를 돌려보시지요."

암자 마당에 들어서자마자 스님은 만면에 웃음을 띠며 저 멀리 능선을 가리킨다. 아…. 어쩜 이리도 도솔암에서 보던 풍경과 똑같단 말인가. 고도계를 꺼내보니 해발 350미터를 조금 넘길 뿐이었다. 하봉, 중봉, 천왕봉, 세석, 영신봉까지. 도솔암에서 바라보는 지리능선 바로 그 장쾌한 풍경 그대로였다. 스님이 이곳에 터를 잡은 이유를 알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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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솔암에서 본 천왕봉과 지리능선 풍경
ⓒ 김종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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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매암에서 본 천왕봉과 지리능선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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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매암은 정견 스님이 20년 전에 이곳을 우연히 발견하고 암자를 짓기 위해 터를 닦기 시작했다. 당시 민가가 있었는데 어찌어찌하여 이곳에 암자를 세울 계획을 잡았던 것. 토굴로 계속 있어 오다가 2년 전에 인법당을 지어 제대로 된 암자의 모습을 갖추었다. 그리고 청매암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암자의 이름을 청매라 한 것은 청매 인오(1548~1623) 스님을 기린 것이다. 암자가 자리한 곳은 오도재 기슭. 청매 조사가 도를 깨쳤다 하여 이름 붙여진 오도재에 청매암이 들어선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귀처이다. 1200고지에 있는 도솔암에 비해 800미터 넘게 고도가 낮음에도 청매암은 깨달음을 얻기에 충분한 곳으로 보인다. 허기야 깨달음을 이루는데 마땅한 곳을 가려 찾음이랴. 청매 조사의 그 유명한 게송, 12각 시에는 깨달음을 일컫는 각(覺)이 12번 나온다.

깨달음은 깨닫는 것도 깨닫지 않는 것도 아니니 / 깨달음 자체가 깨달음 없이 깨달음을 깨닫는 것이네 / 깨달음을 깨닫는다는 것은 깨달음을 깨닫는 것이 아니니 / 어찌 홀로 참깨달음이라 이름하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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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매암
ⓒ 김종길

 


"정남향입니다."

혹시나 해서 좌표를 재봤더니 역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나침반은 정남향을 가리키고 있었다. 암자를 세울 때 법당이 향하는 방향까지 꼼꼼하게 챙긴 스님의 안목이다.

"겨울에 눈이 내리면 히말라야가 따로 없소. 장관이지요." 

마을과 가까운 이곳은 다행히 전기가 들어온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도솔암보다 이곳이 낫지 않느냐고 했더니 스님은 고개를 저었다. 도솔암만한 곳은 없다는 말씀이다. 세월이 흘러 늙어지면 이곳에 살겠지만 아직은 도솔암이 스님에게는 제일 도량이다. 비록 이곳에 전기가 들어오고 따뜻한 보일러가 있고 인터넷도 들어오지만 도솔암의 고요와 정취에 비길 수는 없다고 했다. 산중에 뜬 휘영청 밝은 달과, 긴 호흡으로 내달리는 지리 능선의 깊은 풍경을 어찌 능가할 수 있을까.

"도솔암은 삼일 머물기에 딱 좋소. 그 이상 있으면 대부분 못 버티죠. 근데 간혹 오는 이들은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게 오히려 좋겠다고 그래요. 이런 암자도 있어야 된다나. 사는 사람 입장에선 불편한데 어쩌다 한 번 들르는 사람의 눈에는 그렇게 보이지 않은가 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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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도재로 이어지는 지안재
ⓒ 김종길

청매암과 청매 조사
청매암은 청매 인오(1548~1623) 스님을 기려 도솔암의 정견 스님이 2년 전에 인법당으로 지었다. 청매암은 함양군 마천면 오도재에 있다. 정견 스님이 혜암 종정을 모시고 지리산에 들어온 때는 1985년이었다. '공부하다 죽어라', 오후불식, 장좌불와 등의 숱한 가르침을 남긴 혜암 종정은 도솔암에서 2년을 머물고 1987년 해인사 원통암으로 돌아갔다. 정견 스님은 도솔암에 계속 남아서 도량을 닦았다.

청매 조사는 서산대사의 제자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서산대사를 따라 승병장이 되어 3년 동안 싸워 공을 세웠다. 유명한 십무익송을 지었으며 그림에도 뛰어났다. 광해군 때 왕명으로 벽계 정심, 벽송 지엄, 부용 영관, 서산 휴정, 부휴 선수의 오대 선사들의 영정을 그렸다. 말년에 지리산 연곡사에서 입적한 것으로 전해진다. 영원사에는 도솔암을 중건한 청매 조사 승탑이 있다. 마천에서 함양읍으로 넘어가는 재가 오도재인데, 청매 조사가 도를 깨쳤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청매 조사가 도솔암에서 수행한 기록은 박여량의 <두류산일록>에서 볼 수 있다. 1610년(광해 2)에 박명부, 정경운 등과 두류산을 유람한 박여량은 9월 4일 옛 제석당 터에서 주위 산과 내의 형세를 가리키며 둘러보았다. "서쪽으로 1백여 리쯤 되는 곳을 바라보니 새로 지은 두 절이 있는데, 무주암 서쪽에 있는 절을 '영원암(靈源庵)'이라 하고, 직령 서쪽에 있는 절을 도솔암(兜率菴)이라 하였다. 도솔암은 승려들이 수행하는 집으로 인오(청매)가 지어 살고 있는 곳이다. 인오는 우리 유가의 글을 세속의 문장으로 여겨, 단지 불경만을 알고 있을 뿐이다. 여러 승려를 위하여 암자 앞에 붉은 깃발을 세워두었고, 발자취가 동구 밖으로 나간 적이 없다고 한다."고 적었다. 또한 "사찰로서 말한다면 금대암, 무주암, 두류암 외에 영원암, 도솔암, 상류암, 대승암 등은 예전에 없었던 절이다"라고 한 것으로 보아 도솔암은 당시에 지어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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