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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자로 가는 길

지리산 최고 텃밭, 바로 여깁니다!

 

 

 

 

 

마추픽추처럼 공중에 떠 있는 텃밭!

[김천령의 지리산 오지암자 기행⑫〕서산대사의 출가지, 원통암

 

지난 8월로 기억된다. 하동에서 구례로 가던 중이었다. 막 화개삼거리를 지날 때였다. 커다란 녹색의 도로표지판 귀퉁이로 붉은 표지판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서산 대사 출가지, 원통암.’ 지난 유월만 해도 보이지 않던 표지판인데 어찌된 영문일까. 서산 휴정 스님이 지리산에서 18년간 수행을 했고 여러 암자 중 원통암에서 머물렀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출가한 곳을 정확히 기록한 문헌은 없는 걸로 알고 있는데…. 원통암에서 출가했다고 하니 그 까닭이 몹시 궁금했다. 그러곤 잊고 있었는데 마침 지난 10월 19일에 시간을 내어 원통암을 다녀오게 되었다.

 

 삼정 마을 가는 비포장 흙길, 벽소령 가는 옛 군사도로이기도 하다.

 

원통암을 가기 위해선 지리산 깊숙이 들어가야 한다. 화개에서도 십리 벚꽃 길을 지나면 쌍계사, 이곳에서 다시 칠불암 가는 길과 갈라지는 신흥 마을을 지나 깊숙한 골짜기를 따라 한참을 오르면 아스팔트길의 끝에 의신 마을이 있다. 마을에서 원통암까지는 다시 산길을 걸어야 한다.

 

                         ▲  화개골짜기와 소나무. 10m가 훌쩍 넘는 거대한 바위 위에 잘 생긴 소나무 대여섯 그루가 자라고 있다.

 

방안에 그대로 들어온 장쾌한 풍경

마을 뒤 좁은 산길을 올랐다. 꽃처럼 피어난 붉은 감들이 검은 나뭇가지에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이맘때면 감은 꽃으로 피어난다. 노란 은행 열매가 여울에 수북이 쌓여 있다. 돌층계가 유독 많다. 암자 가는 길에는 다랑논들이 층층 펼쳐진다. 그 옛날 화전민들의 터전이었을 다랑논의 일부는 묵정밭이 되었지만 아직 고사리 등 작물을 키우고 있는 곳도 더러 보인다.

 

 원통암 가는 돌길

 

마을에서 암자까지는 700미터. 잠시면 오를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가팔랐다. 숲속 아늑한 곳에 암자가 있을 것이라는 짐작은 점점 멀어졌다. 의신 마을이 골짜기에 있어 암자 또한 산 중턱 어디쯤 숲속 아늑한 공간에 있으리라 생각했었다. 그러나 나무 사이로 언뜻 보이는 능선에 맞닿은 푸른 하늘이 시야에 들어왔을 때 직감적으로 암자가 능선 가까이 있음을 확신할 수 있었다. 이미 해는 떨어졌다. 어둑한 숲속에서 마음은 더욱 급해졌고 걸음은 자꾸 헛돌았다.

 

 

삼배를 올렸다. 땀 한 방울이 좌복에 떨어졌다. 나무관세음보살! 잠시 청허당의 서산 대사 영정과 행적을 담은 사진들을 올려다보았다.

 

 

“들어오세요.”

헉헉거리며 암자 마당에 들어섰을 때 청허당 다실에 있던 스님이 낮은 목소리로 불렀다. 그러곤 차를 건넸다. 땀을 많이 흘렀으니 찬물보다는 더운 차로 몸을 덥혀야 기운에 손상이 없단다. 근데 다실에서 보는 풍경이 압권이다. 한 벽면이 통으로 된 창인데 밖에서 봤던 장쾌한 풍경이 방안에 그대로 들어왔다.

 

 

 나는 누구인가

 

마치 꽃잎을 양쪽에서 하나씩 포갠 듯 산자락이 골짜기 좌우로 겹겹 펼쳐지고 그 끝에 아스라이 세 봉우리가 우뚝 솟아 있다. 백운산(1217), 따리봉(1127), 도솔봉(1123)이라고 했다. 스님은 며칠 전 비 내리고 난 뒤의 운무가 장관이었다고 그때를 그리워했다.

 

 원통암 마당에 서면 지리산 산자락들이 겹겹으로 펼쳐지고, 그 끝으로 백운산이 보인다.

 

암자에는 3칸의 원통전과 2칸 반의 청허당 건물이 있다. 신기한 건 이 작은 암자에 비록 일각문만 할지라도 산문이 버젓이 있다는 것이다. 예전에는 해우소에서 곧장 암자로 올라오게 길이 나 있었지만 작은 산문을 내면서 법당이 남쪽이라 문을 동쪽에 두어 길을 새로이 냈다고 했다. 산문 앞의 층계만 빼면 마을에서 암자로 오르는 길은 수백 년은 된 오래된 길이었다.

 

 원통암에선 지리산 산자락 너머로 왼쪽부터 백운산(1217), 따리봉(1127), 도솔봉(1123)이 보인다.

 

마추픽추처럼 공중에 떠 있는 텃밭!

“저요. 노옹이라고 합니다. 20년 전부터 그렇게 부르고 있어요."

법명을 여쭙자 예순을 넘긴 스님의 답이 명쾌했다. 원통암은 스님의 사형인 동림 스님이 옛터에 새로 지었다. 해우소 옆 산기슭에 동림 스님의 승탑이 있다. 칠불암에 계시던 스님이 이곳을 찾은 것은 20년 전, 처음엔 토굴로 쓰다가 1997년에 인법당을 짓고 2011년에 청허당과 서산산문, 해우소를 지었다.

 

                     ▲  휴정 스님을 모신 청허당

 

“저 우물 좀 보시오. 서산 대사의 우물이오.”

손님을 배웅하던 스님이 다실 옆 텃밭에서 우물을 가리켰다. 서산 대사 때에도 사용했다는 우물이라는 걸 넌지시 강조했다. 내가 눈여겨 본 건 우물 옆 텃밭이었다. 텃밭은 공중에 걸려 있었다. 텃밭 너머로 보이는 겹겹의 산자락과 파노라마 같은 백운산 능선이 장대했다. 마치 마추픽추의 경작지처럼 텃밭은 공중에 떠 있었다. 아득한 시간을 당겨 허공에 걸린 생명들…. 붉은 흙에서 돋은 녹색의 푸성귀가 파란 하늘에 걸려 있다. 겨울을 앞두고도 생명들은 자신을 온몸으로 드러내고 있었다.

 

 공중에 떠 있는 텃밭

 

이 작은 암자에서 이처럼 장쾌한 풍광이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암자가 자리한 품은 작았지만 시야는 넓었다. 정중앙인 원통전과 청허당 사이에서 보는 능선 풍경이 최고라고 했지만 암자 어디서도 그 풍경은 여실히 들어왔다.

 

 

서산 대사의 출가지, 밝혀지다

“서산 대사는 지리산에서 도를 깨치고, 금강산에서 보림을 했고, 묘향산에서 제자를 길렀지요.”

스님은 먼저 온 손님 두엇을 보내고 잠시 뜰을 거닐다 다실로 들어왔다.

 

“스님, 청허당집이나 다른 문헌을 봐도 서산 대사가 삭발한 얘기는 나오지만 그 장소가 어디라고 밝힌 곳은 없는 걸로 알고 있는데, 원통암이 서산 대사의 출가지라고 한 건 무슨 근거에서인가요?”

“아, 그거요. 서산 대사의 제자 중 경헌 스님이 있는데, 그 분이 남긴 <제월당집>에 보면 삭발한 곳이 원통암이라고 나옵니다.”

 

 

사실 서산 대사, 즉 청허 휴정 스님의 전기를 알 수 있는 자료로는 《청허당집》에 실린 〈완산 노 부윤에게 올리는 글, 上完山盧府尹書〉과 제자 평양 언기가 지은 〈청허당 행장〉이 있다. 앞의 글은 휴정이 50세 되던 해 당대의 명재상이었던 노수신에게 자신의 이력을 상세하게 말한 것이나 50대 이후의 일대기를 알 수 없다는 맹점을 가지고 있다. 반면 뒤의 글은 생애 전반을 다루고 있으나 지극히 간략하여 소상히 알 수 없다는 아쉬움이 있다.

 

 노옹 스님이 서산 대사가 마셨다는 우물이라고 소개했다.

 

서산 대사의 지리산에서의 행적은 〈완산 노 부윤에게 올리는 글〉에서 알 수 있다. 서산 대사는 두 차례에 걸쳐 18년간 지리산에 머물렀다. 겨우 아홉 살에 어머니를 잃고 이듬해 봄날 아버지마저 잃은 스님은 15세에 남쪽을 여행하다가 지리산에서 숭인 장로를 만나 불교에 귀의하게 되고 부용 영관 스님에게 의탁하여 공부를 하게 된다. 그러던 어느 날 깨달음을 얻고 삭발을 했는데, 아쉽게도 어디서 삭발을 했는지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

 

〈완산 노 부윤에게 올리는 글〉에서는 “부지런히 공부를 했지만 이름과 상에 얽매여 해탈의 경지에 들어가기 못하고 답답함만 더해가던 어느 날 밤, 갑자기 문자를 떠난 오묘한 이치를 깨달았다. ‘갑자기 창밖에서 우는 두견의 소리를 들으니 눈에 가득 찬 봄 산은 모두가 고향일세.’라고 오도송을 읊었다. 또 하루는 ‘물 길어 돌아오다 문득 고개를 돌리니 푸른 산은 무수히 흰 구름 속에 있네.’라고 읊었다. 다음 날 아침, 그는 마침내 손에 칼을 쥐고 스스로 해묵은 머리를 잘랐다. ‘차라리 일생을 어리석은 자가 될지언정 문자나 매만지는 법사는 되지 않으리라’라고 다짐했다.”고 적고 있다.

 

                                서산 대사의 제자 경헌 스님의 <제월당대사집>에 서산 대사가 삭발한 곳으로 원통암이 나온다.

 

서산의 제자 제월당 경헌(1544~1633) 스님의 《제월당대사집》 〈청허대사행적〉에는 “숭인 장로에 의지해서 원통암에서 삭발했다. 의숭인장로낙발우원통암依崇印長老落髮于圓通庵’”이라고 적혀 있다. 이로 말미암아 삭발출가한 곳이 지리산 의신에 있는 원통암으로 밝혀졌다. 그때가 21세였던 1540년으로 보인다. 서산 대사의 입장에선 자신의 행적을 일일이 밝히기는 어려웠겠지만 제자의 입장에선 스승의 행적을 정확히 기록할 수밖에 없다는 걸 염두에 둔다면 이는 상당히 신빙성이 있다.

 

 

정원은 잘 갈무리되어 있었다. 처음 암자 뜰에 들어섰을 때 너무도 정갈하여 비구니 스님이 계시는 줄 알았다. 맑고 향기로운 삶을 위해 주위를 깨끗이 하는 건 수행자의 기본이지만, 원통암은 깔끔함 이상이었다. 봄이 되어 연산홍과 배꽃이 만발할 즈음이면 암자는 그야말로 화원이 되는 모양이다. 연산홍 울타리 너머에는 하얀 차꽃이 피었다. 차가 심긴 곳은 높다란 축대 끝, 찻잎을 따기에는 무리겠다. 스님은 굳이 찻잎을 따서 우려먹으려는 생각보다는 그냥 심었을 뿐이라고 했다. 서산 대사는 소나무와 국화를 심는 것은 화초를 사랑해서가 아니라 색이 곧 공임을 알리기 위해서라고 했던가.

 

 어두워지자 노옹 스님이 산문까지 배웅했다.

 

지난해 처음 뜰 앞에 국화를 심었는데

올해는 난간 밖에 또 소나무 심었다네

산승이 화초를 사랑해서가 아니라

색이 바로 공임을 알리기 위해서지

- 서산 대사의 시 〈소나무와 국화를 심으며(栽松菊)〉

 

 

 걸림 없는 대자재, 원통무애

원통암은 지리산 덕평봉 아래 해발 600m 고지에 있다. <진양지>에는 옛날 의신사 일대의 31개 암자를 언급하고 있는데, 원통암은 의신사의 수많은 산내 암자 중의 하나였다. 많은 고승들이 수행했던 곳으로 관세음보살을 모신 도량이다. 원통암이 자리한 곳에는 뒤로는 덕평봉을 위시해 벽소령, 칠선봉, 영신봉 등 지리산의 주능선이 둘러싸고 있다. 앞으로는 좌우로 화개골의 산자락들이 겹겹으로 펼쳐지고, 그 끝으로 백운산이 보인다. 백운산은 섬진강 건너 전라도 광양 땅에 있지만 이곳에선 마치 지리산 연봉처럼 보인다. 암자에서 보면 섬진강으로 나뉘던 경상도와 전라도의 구분은 없어지고 하나의 산자락이 된다. 원통무애다. 내남 구분 없는 통함이다.

 

‘원통무애(圓通無碍)’는 불교의 ‘십무애’ 중의 하나이다. 암자 이름인 ‘원통(圓通)’은 ‘원통무애’에서 나온 말이다. <삼가귀감>을 통해 불가, 유가, 도가의 삼교융화를 원했던 서산 대사의 행적이 곧 원통이요 무애다.

 

청허(서산) 대사의 행적을 적은 제자 경헌(1544~1633) 스님은 전남 장흥 출신으로 15세에 장흥 천관사에서 출가하여 경․율․논을 섭렵하고 묘향산에 들어가 휴정의 문하에서 수행했다. 임진왜란 때 휴정과 함께 승군을 모집하여 평양성을 탈환한 공로로 선조가 좌영장에 명했으나 사양하고, 또 선교양종판사에 명했으나 역시 사양했다. 묘향산, 금강산, 오대산, 치악산 등에서 수행했으며 저서로는 <제월당대사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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