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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자로 가는 길

1000년 넘은 온돌방이 있는 지리산 칠불암

 

 

 

 

1000년 넘게 불을 지핀 아궁이가 있다!

[김천령의 지리산 오지암자 기행⑰〕구름 위의 집, 칠불암

 

 

그림자 하나, 그림자 둘, 그림자 셋… 다시 그림자 둘, 그림자 셋, 그림자 다섯. 잔설이 남은 침묵의 절 마당을 침범하는 그림자들. 800고지의 깊숙한 암자임에도 찾는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빙판이 된 응달 깊숙이까지 파고든 햇볕이 따사롭다. 문수전 앞 빈 마당 가운데에 덩그러니 놓인 네모난 검은 돌 하나. 석탑이나 석등의 형체는 사라지고 흔적만 남은 곳에 붉은 햇살이 부서진다.

 

 

보설루, 아자방, 대웅전, 문수전, 설선당, 원음각. 사방을 두루 비추는 햇살이 경내를 휘돌아 검은 돌에서 머문다. 이미 존재 그자체가 되어버린 돌의 표면은 감출 수 있는 그 무엇도 없다. 그림자 하나가 검은 돌을 침범하자 잠시 주춤하는 햇살. 그림자가 물려난 뒤 가만히 다가온다. 그림자와 빛의 조우. 붉은 빛과 검은 돌의 경계가 사라진다. 그윽하고 편안하다.

 

 

용케 햇살을 피한 담장 아래의 잔설. 하얀 몸이 유독 눈부시다. 하얀 눈 속에서 피었다는 자줏빛 칡꽃. 화개동 이야기는 전설처럼 아득하다. 화개에서 쌍계사까지 10리, 쌍계사에서 칠불암까지 다시 20리, 모두 합하여 30리에 이른다. 북쪽 반야봉에서도 칠불암까지 남쪽으로 30리 지점이니 남북의 거리가 서로 같다.

 

칠불암 가는 길은 깊다. 차로 가는 지금도 산속을 한참이나 달려야 한다. 지리산에서 차로 갈 수 있는 가장 깊은 골짜기이다. 풍경도 사뭇 달라졌다. 듬성듬성 있던 산간마을과 층층 다랑논의 한가로운 풍경은 간 데 없고 펜션과 민박집들이 산비탈과 계곡 가득 들어섰다. 지리산까지 밀고 들어온 커피 바람은 이곳이 녹차의 시배지 임을 무색케 할 정도다. 차향보다 커피향 진한 이곳에서 야생의 차밭 대신 산허리를 벌겋게 드러낸 채 최근에 조성된 넓디넓은 녹차밭 풍경이 생경스럽다. 서산대사의 <화개동>이라는 시가 도리어 낯설다. “진흙은 푸른 돌의 정수 되고 / 소나무는 늙은 용의 비늘 되네 / 멀리 흰 구름 향해 개 짖으니 / 도화동에도 사람이 사는구나”

 

구름 위의 집

동국제일선원 칠불암은 그 옛날 ‘구름 위의 집’, 운상원으로 불렸다. 절 아래 골짜기가 구름바다에 잠기면 이곳이 구름 위에 드러나니 그렇게 불리었을 것이다. 연꽃이 반쯤 피어 연화반개처(蓮花半開處)라고도 불리던 이곳, 칠불암에서 내려다보는 화개동천과 백운산은 예부터 선경이라 했다. 남쪽 지리산에서 백운산 정상이 보이지 않으면 명당도 좋은 절터도 아니라는 말이 전해질 정도였다.

 

이 빼어난 풍광을 가장 잘 읊은 시가 서산대사의 제자인 정관 일선(1533~1608)의 시다.

“두류산 반야봉 동쪽에 절이 있는데 / 달빛이 금당을 밝혀 그림자 영롱해라 / 향불 꺼지자 아지랑이가 탑 끝에 날고 / 종소리가 꿈 깨며 늦바람에 들려오네 / 청학동에 푸른 학은 오지 않는데 / 백운산은 흰 구름이 늘 감싸고 있네 / 석문이 저 멀리 쌍계 아래로 보이고 / 희미한 가을빛이 한눈에 보이네”

 

 

칠불암에 대한 이야기는 여러 가지로 전해진다. 연담 유일(1720-1799)이 쓴 <칠불암 상량문>에는 신라 신문왕 때 옥부선인이 부는 옥피리(玉笛) 소리를 들은 일곱 왕자가 입산하여 6년 만에 도를 깨치고 이 절을 창건했다고 한다. 응윤 스님의 <경암집>에는 이 암자의 옛 이름은 운상원이었는데 신라 신문왕의 두 아들이 궁모 5인과 함께 이 암자에 들어와 성불했기 때문에 지금의 칠불사라 했다고 적고 있다. 화엄사 승려였던 진응(1873~1941)의 <지리산지>에 따르면 지리산은 칠불조사인 문수보살이 머무는 곳이기 때문에 칠불암이라 했다고도 한다.

 

 

그러나 가야 김수로왕의 일곱 왕자가 이곳에서 성불하여 칠불암이라 불렸다는 이야기가 가장 많이 받아들여지고 있다. 김수로왕은 아들 10명을 두었다. 장남은 왕위를 잇고, 둘째와 셋째는 어머니 허씨의 성을 받아 후사를 잇게 하고 나머지 일곱 왕자는 속세에 살 마음을 끊고 외삼촌 장유화상을 따라 지리산에 왔다. 이곳 지리산에 운상원을 짓고 수행하여 6년 만인 103년 8월 보름에 모두 성불했다고 전해진다.

 

 

천 년 넘은 온돌방

칠불암이 유명세를 떨친 데에는 아자방이라는 특이한 온돌방 덕분이다. 서쪽 하늘을 등지고 있는 아자방은 천 년을 넘게 사용된 온돌방이다. 아자방은 위에서 보면 방이 버금 ‘아(亞)’자 모양으로 보이므로 ‘아자방’이라 한다. 아자방은 신라 지마왕 때 혹은 신라 효공왕 때 금관가야에서 온 담공 선사가 만들었다고 알려져 있다. 신라 지마왕 때라면 1900년이 된 셈이고 효공왕 때라 해도 1100년이 넘는다. 아자방의 온돌은 한 번도 크게 고친 적이 없지만 불 고래가 막히지 않았다고 한다. 방의 바닥도 높고 낮은데 고루 따뜻하여 옛사람들도 불가사의한 유적으로 봤다.

 

 

일생 우리나라의 명산을 두루 유람한 삼연 김창흡(1653~1722)은 <영남일기>에서 두 달여 동안 영남을 유람하던 중 1708년 3월 15일 칠불암에서 하룻밤을 묵게 된다. 이때 잠잔 곳이 아자방인데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밤에 선방에서 잤다. 선방에는 상하층으로 온돌이 깔려 있어 훈기가 두루 퍼졌다. 이 또한 처음 보는 것이었다. 이계상과 함께 상층의 온돌로 가서 몸을 펴고 누우니, 인간 세상을 모를 지경이었다.”

 

 

한 번 불을 때면 일곱 짐이나 되는 나무를 한꺼번에 땠다고 한다. 불길이 막히지 않고, 높고 낮은 곳이 고루 따뜻했다. 방안 네 귀퉁이에 70cm씩 높인 곳이 스님들이 벽을 향하여 좌선 수행하는 ‘좌선처’이고, 가운데 십자 모양의 낮은 곳이 통로가 되거나 스님들이 참선 틈틈이 경전을 읽는 ‘행경처’이다. 아자방이 있는 건물은 벽안당이다. 장작을 통째로 지고 들어가 한 번 불을 지피면 동안거 결제일인 10월 보름부터 해제일인 이듬해 정월 보름까지 온기가 식지 않고 따뜻했다고 한다.

 

 

특이한 2중 구조의 아자방은 구들을 놓은 솜씨가 정교하고 독특하여 오랜 기간 살펴봤지만 그 구조를 정확히 알 수 없었다 한다. 1948년 여순사건 때 칠불암이 불탔을 때 구들만은 남아 함석을 덮어 보존했다. 그 후 1982년 봄에 통광 스님이 다시 옛 모습대로 복원했다. 아자방은 그 치밀한 구들과 탁월한 구조로 1979년 세계건축물협회에서 펴낸 <세계건축사전>에 수록되기도 했다.

 

 

이 아자방엔 사람이 선 채로 지게에 나뭇짐을 지고 들어갈 만큼의 큰 아궁이가 방바닥보다 한길이나 더 낮은 곳에 있다. 亞자 방의 왼쪽에 있는 이 아궁이 공간은 입 구(口)자 모양이 되어 아자방 전체가 벙어리 아(啞)자 모양이 된다. 이 모양 때문일까. 아자방은 스님들이 묵언수행을 하는 공간이라는 상징이 됐다.

 

 

실제 <조선왕조실록> ‘정조실록’ 1785년 3월 23일자를 보면 선전관 이윤춘이 지리산의 수상한 도당들에 대해 상언한 글이 있는데 “취령(벽소령) 아래 칠불암이 있는데, 그 문귀에 달린 현판에는 ‘동국제일선원’이라 쓰여 있습니다. 그 안에 아자 형으로 된 승방이 있습니다. 승려들을 대사라고 부르는데 하루 종일 벽을 향하여 말을 하지 않고 앉아 있는 사람이 아홉 명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거의 모두 아침에 모여 묵언 수행하다가 저물녘에 흩어졌습니다.”고 적고 있다.

 

 

경암 응윤 스님도 <경암집-칠불암기>에서 아자방에 대해 이렇게 적고 있다. “서쪽은 고승당이다. 온돌방의 높고 낮은 데가 고루 따뜻하다. 고승당에서 결제를 할 적에는 말을 하지 않고, 면벽을 해야 한다. 이는 달마대사의 마음을 참구하는 것이다.” 이처럼 아자선방에는 수행자들의 오랜 전통이 있다. 참선할 때는 면벽하고 묵언을 하며 눕지 않고, 행경할 때는 꼭 발뒤꿈치를 들고, 공양은 하루 한 끼만 먹는다는 것이다.

 

아자방의 절묘한 공간 배치는, 일자나 원형으로 앉는 것에 비해 ‘아’자로 앉아 참선을 하는 것이 독립적인 분위기를 느껴 심리적인 안정을 준다. 또한, 한번 불을 때면 오랜 시간 따뜻함을 유지하니 아궁이를 들락거리며 시간 낭비를 하지 않아서 좋고 집중도도 높일 수 있다. 게다가 온도 또한 너무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아 장시간 앉아 있는 좌선에는 꼭 맞는 온돌인 셈이다. 지금은 예전보단 못하지만 한 번 불을 때면 온기가 일주일 정도는 가는 모양이다.

 

 

소년 승탑

암자 아래 길가 숲속에 연못이 하나 있다. 일곱 왕자의 전설이 서려 있는 연못으로 일명 ‘영담’으로도 불린다. 일곱 왕자가 성불했다는 소식을 듣고 김수로왕과 허황옥이 이곳에 왔는데, 수차례 간청에도 만나기를 거부하던 일곱 왕자가 이 연못에 성불한 모습을 비췄다는 내용이다. 칠불의 그림자가 비친 연못이라 하여 ‘영지(影池)’라 부르게 됐다.

 

그런데 조선 중기 이봉 스님의 <천연집>에는 조금 다른 이야기가 전해진다. 김수로왕과 허황옥이 일곱 왕자가 성불했다는 소식을 듣고 운상원을 찾았는데, 왕자들의 모습이 옛날 그대로였다. 왕과 왕비가 의아하게 여겼더니 절 아래 연못에서 자신들을 보라고 말했다. 연못 속을 보니 일곱 왕자가 환하게 웃으며 일곱 부처님(金身)으로 비춰졌다. 왕이 크게 기뻐하여 이를 기리고자 운상원 아래 두 곳에 절을 창건했다. 왕이 거처하던 곳에 지은 절을 범왕사, 왕비가 거처하던 곳에 천비사(대비사)를 지었다. 지금은 두 절이 있던 곳이 모두 범왕리, 대비리 마을이 되었다.

 

칠불암에는 부휴대사, 인허당 , 무가당, 제월당 등의 승탑(부도)이 있는데, 일주문 아래 다신탑비 옆 외따로 떨어진 작은 승탑 하나가 유독 눈길을 끈다. 일명 ‘소년 승탑’이다. 옛날 칠불암 상좌 중에 여자처럼 예쁘고 마음씨가 고운 소년 스님이 있었다. 이 소년 스님은 일꾼들에게 무척이나 인기가 좋았다. 당시는 칠불암 중창공사가 한창이라 30리 아래의 사하촌에서 기와를 이고지고 험한 산길을 왕복해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30리 길을 왕복하며 일을 하던 소년 스님이 시름시름 앓기 시작하더니 그만 쓰러지고 말았다. 절은 중건되었지만 스님은 끝내 일어나지 못해 죽었고 그를 위해 세운 탑이 소년 승탑이란다. 화개 사람들은 소년 스님을 불사를 도우려 현신한 문수동자라고 여겼다 한다.

 

 

 

 

칠불암

칠불암(칠불사)은 쌍계사 북쪽 20리 되는 곳인 지리산 토끼봉(1533m) 아래 800고지에 있는 암자이다. 칠불암은 쌍계사의 암자 가운데 하나지만 규모가 커서 조선시대에도 지금도 칠불사로 불리고 있다.(이 글에서는 ‘칠불암’으로 표기했다.) 원래 운상원이라 불렸는데 가락국 일곱 왕자가 성불한 곳이라 하여 칠불암이라고 했다는 이야기가 가장 많이 회자되고 있다. 또는 지리산은 칠불조사(七佛祖師)인 문수보살이 머무는 곳이기 때문에 칠불암이라 했다고도 한다. 신라의 옥보고는 이곳 운상원에서 50년 동안 거문고를 공부하고 30곡을 지어 세상에 전했다고 한다. 현재 운상선원은 선방으로 쓰고 있다.

 

창건 이후 칠불암은 동국제일선원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선승들의 수도처로 이름을 날리게 됐다. 고려 시대의 대선사인 청명 화상을 비롯해 조선 중종 대의 추월 조능 선사, 선조와 광해군 대의 서산 대사와 부휴 선수 대사 등이 주석했다. 또 사제지간인 금담 율사와 대은율사, 다승 초의 선사도 이곳에서 <다신전(茶神傳)>을 초록했다. 용성·석우·금오 등의 선사들도 여기에서 수행했다.

 

특히, 사명당과 함께 당대의 ‘이난(二難. 높은 학식과 덕행, 뛰어난 글씨와 문장으로 상대하기 어려운 두 고수)’으로 불리며 서산대사의 ‘청허문’과 함께 한국 불교의 양대 법맥인 ‘부휴문’의 부휴 선수(1543~1615)는 칠불암에서 주석하고 입적했다. 문하에 700여 명의 제자가 있었다. 부휴대사의 승탑은 암자 내 운상선원에 있다.

 

이뿐만 아니라 칠불암은 조선 시대 선비들의 지리산 유람에서도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곳이었다. 하동군 화개를 통해 지리산 청학동으로 들어가는 유람객들은 대개 쌍계사와 불일암, 신흥동 일대를 유람하고, 이곳 칠불암을 거쳐 천왕봉으로 갔으며, 천왕봉에서 하산하는 유람객 또한 같은 코스로 하산했다.

 

1655년 10월 화개동을 찾은 김지백은 <유두류산기>에서 “지리산에는 370여 곳의 사찰이 있는데 그중에서 기이하고 아름답기로 칠불암이 제일이다. 금빛, 푸른빛, 붉은빛의 단청이 현란하여 사람들의 눈을 끌었다.”고 적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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