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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자로 가는 길

다불유시, 이 건물의 정체가 궁금하다!

 

 

 

 

 

다불유시, 이 건물의 정체가 궁금하다!

[김천령의 지리산 오지암자 기행⑯〕백장청규의 선풍, 백장암

 

 

 

동안거 첫날, 산중 암자는 부산스러웠다. 대숲에서 스님들이 한 명씩 나온다. 그 모습이 마치 무대로 하나씩 등장하는 배우들 같다. 대숲 뒤에는 선방이 있다. 선방을 나온 스님들이 종무소를 에워쌌다. 선방의 반장 격인 입승(立繩)으로 보이는 스님이 진두지휘를 하고 나머지 스님들은 말없이 일사분란하게 움직였다. 깊은 산중의 살을 에는 듯한 바람을 막는 일. 숭숭 뚫려 있는 건물 틈새로 드나드는 삭풍을 막기 위해 비닐로 건물 외벽을 두르는 작업이 시작되었다.

 

 

동안거에 참여한 스님은 모두 아홉이었다.

“스님, 어디서 오셨습니까?”

“법주사에서 왔습니다.”

소탈한 모습의 스님은 대답도 시원시원하다.

“스님은 어디서 오셨습니까?”

“저기요.”

포대화상같이 넉살 좋게 생긴 스님이 느닷없이 검지로 허공을 찔렀다. 법주사에서 왔다는 스님이 혹시 잘못 들었나 싶어 거들었다.

“스님, 어디서 왔느냐고 묻고 있는 것 같은데요.”“여기요”

포대화상 스님이 이번에는 땅을 가리켰다.

순간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잠시 후 일제히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다불유시(多佛留是)의 정체

지리산에 눈이 날린다. 남쪽의 지리산과는 달리 북쪽 지리산은 온통 설국이다. 모든 것은 떨어져 뿌리로 돌아가고 세상을 하얗게 덮은, 말이 없는 겨울. 인월을 지나 골짜기를 한참이나 들어가니 백장암 초입이다. 암자로 가는 구불구불한 비탈길은 얼어붙었다. 마침 산을 내려오던 암주 스님의 ‘염려 거두라’는 말에 간신히 용기를 내어 암자를 올랐다.

 

암자 뜨락을 거닐고 있는데, 멀리 벼랑 끝으로 작은 건물 같은 것이 숲 사이로 언뜻 보였다. 무엇인데 저리 위태로운 곳에 있을까? 궁금증을 이기지 못해 건물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처음엔 해우소인가 했는데 바로 옆에 해우소는 따로 있었다. 신성한 기운마저 느껴지는 이곳의 정체는 대체 뭘까?

 

 

슬레이트 지붕에 두 짝의 문이 달린 지극히 간소한 건물. 색색 연꽃을 그리고, 기름한 널빤지에 세로로 내려쓴 ‘다불유시(多佛留是)’라는 글자가 눈에 띈다. 글자대로라면 ‘모든 부처가 이곳에 머문다’는 뜻이다. 아무리 궁리를 해도 딱히 떠오르지 않는다. 문을 열어볼까 하다가 무언가 영적인(?) 곳이지 않을까 싶어 머뭇거리다 종무소로 다시 나왔다. 마침 공양주 보살이 떡이라도 좀 들지 않겠냐고 해서 공양간으로 들어갔다.

 

“궁금하시죠? 그거요. 이곳 백장암의 명물이랍니다.”

“아무래도 알 수가 없네요. 부처가 머무는 곳이라고 적어 놓았는데….”

 

공양주 보살이 잠시 뜸을 들인다. 답답해하는 이 상황을 즐기고 있는 듯했다.

 

“해우소입니다.”

“예? 아… 그렇군요.”

 

허를 찔렸다. 바로 옆에 해우소가 있어 설마 해우소일까 했는데 해우소라니….

 

 

“스님들의 재치가 놀랍지요?”

“근데 해우소에 왜 ‘다불유시’라고 적었을까요?”

“아이 참, 아직 감을 못 잡으셨나? 영어로 해우소를 ‘더(다)블유시(WC)’라 하잖아요. 그 ‘더블유시’를 한자로 표현하니 ‘다불유시’가 된 게지요. 자연스럽게 의미도 연결시킨 거구요. 스님이니 당연히 부처님을 떠올리면서 이름을 지었겠죠.”

 

 

아, 그렇군! 나도 모르게 이마를 쳤다. 다시 가서 확인을 해보니 역시 해우소였다. 안에는 나무로 공들여 짠 덮개로 변기를 막아 두었다. 덮개를 여니 아래가 바로 낭떠러지다. 이곳에서 볼일을 보면 흔적도 없이 사라지겠다. 근데 창문 너머로 바라보는 경치가 기가 막힌다. 지리산 설경이 나뭇가지 사이로 마구 쏟아진다. 그야말로 이곳은 ‘다불유시(多佛留是)’. 부처가 머무는 곳이다.

 

 

 

백장청규

지리산이라지만 실상사는 평지에 있고 산내암자인 백장암은 산 높이 아스라이 걸려 있다. 진리 그 자체, 있는 그대로의 참모습이 실상이라면, 백장은 그 진리를 깨친 이, 참모습을 본 이를 이름이랴.

 

당나라의 유명한 선승 마조 도일(馬組 道一. 709~788)의 선맥을 잇는 수제자로는 서당 지장(西堂 智藏), 백장 회해(百丈 懷海), 남전 보원(南泉 普願)을 들 수 있다. 그중 큰형 격인 서당의 제자들 중에는 신라 승려인 도의, 홍척, 혜철이 있다. 이 세 사람이 신라로 돌아와 각기 구산선문을 열었는데 그중 홍척이 지리산에 연 것이 실상사이다. 결국 지리산 실상사는 마조 도일의 제자인 서당의 선풍을, 백장암은 그 이름대로 백장의 선풍을 이었으니 마조에게서 비롯된 한 몸이나 다름없다. 마조는 ‘경(經)은 서당이고, 선(禪)은 백장이고, 남전은 물외(物外)의 이치에 초연하다’고 했다.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마라(一日不作 一日不食)”

 

유명한 ‘백장청규'의 노동정신이다. 백장 스님은 기존의 율원과는 다른 선원의 살림살이를 정리하고 새로이 선종의 규율을 엄격히 세웠다. 그 결과물이 최초의 선원 규칙인 ‘백장청규’이다. 세상에 널리 알려진 이 청규는 예부터 사찰 어디서든 받들어 행하지 않는 곳이 없었다.

 

 

연로한 나이에도 계속 일하는 백장을 본 제자들이 하루는 일을 못하도록 연장을 감췄다. 그러자 백장은 그날 밥을 먹지 않았다. 또 다른 날에는 백장에게 스님들이 선의 강설을 청한 적이 있었다. 백장은 “밭에서 일하고 오너라. 그 뒤에 선을 가르쳐 주마.”라고 했다. 일을 끝낸 뒤 스님들이 약속을 재촉하자 백장은 양 손을 펴 보일 뿐 한마디도 말하지 않았다. 그것이 백장의 대설법이었던 것이다.

 

 

선 생활의 기본은 ‘행위에 의해 배운다’는 것이다. 남들이 하찮게 여기는 밥 짓고, 나무하고, 밭 갈고, 씨 뿌리고, 탁발하는 것 등이, 모두 천한 것이 아니라 신성한 것이라고 여기고 적극적으로 나서서 일하는 것이다.

 

 

흔히 선승이라고 하면 세상을 잊어버린 사람이라고 여길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선승은 무게 있고, 엄숙하고, 얼굴빛이 창백한 사람이라기보다는 쾌활하고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로 비천한 일도 자진해서 하는 실생활을 사는 사람이다. 선은 심원한 형이상학이 아니라 실생활인 것이다. 깨달음의 길을 걸어가면서 세속적인 일상생활을 보내는 것이 바로 선이다. 일정 기간 은둔생활을 보내고 나면 세상으로 나오는 위대한 선승들을 보게 된다. 부처 있는 곳에 머물지 않고, 부처 없는 곳에 달려가는 것이다.

 

붓다는 어땠을까.

 

 

나도 밭을 간다

붓다가 마가다국의 에카사라라는 마을에 있을 때 하루하루의 생활을 탁발에 의지하며 법을 설하고 있었다. 어느 날 붓다는 탁발을 나갔는데, 그 집은 바라문의 집이었다. 바라문은 자신은 밭을 갈고 씨를 뿌려서 직접 먹을 양식을 마련하고 있으니 당신도 스스로 밭을 갈고 씨를 뿌려서 자신이 먹을 양식을 마련하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고 날을 세워 말했다. 요즈음 말로 치면 일하지 않는 사람은 먹지도 말라, 는 비아냥거림이었다.

 

 

이에 붓다는 나도 밭을 갈고 씨 뿌려서 먹을 것을 얻고 있다고 태연히 응수했다. 이 말을 듣고 바라문은 당신이 밭 갈고 씨 뿌리는 모습을 본 적이 없는데 무슨 소리냐며 다소 어이없어했다. 그때 붓다는 내가 뿌리는 씨는 믿음이요, 내 보습은 지혜요, 나날이 악업을 제어하는 것은 김매는 것이요, 소를 모는 것은 정진이요, 그 수확이 감로의 열매이니 이런 것이 자신의 농사라고 말했다. 농사꾼이 땅을 갈아 농사를 짓듯이 붓다 또한 인간 정신을 계발하는 농사를 짓고 있다는 것을 ‘나도 밭을 간다’라고 했던 것이다.

 

 

해 저무는 하늘가로 아스라이 구름이 깔렸다. <화엄경>에 “삶이란 한 조각 구름 일어나는 것이요, 죽음이란 한 조각 구름 사라지는 것(生也一片浮雲起 死也一片浮雲滅)"이라고 했다. 설국의 정적을 새 한 마리가 깨뜨린다. 파적. 무상이다.

 

가지에 얼어붙은 눈 편편이 떨어지고

저무는 하늘에 솔바람 파도 소리

돌 위에 지팡이 짚고 고개 돌리니

눈 덮인 봉우리 높이 새가 구름 곁을 난다

- 설암 추봉(1651~1706)의 <설후귀산雪後歸山>

 

 

 

 

 

 백장암

 실상사의 산내 암자인 백장암은 수청산(772미터) 중턱에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백장사(百丈寺)로 기록되어 있고, ‘수청산(水淸山)에 있다’고 단 한 줄로만 언급되어 있다. 1468년(세조 14) 실상사가 화재로 폐허가 되자 1679년(숙종 5)까지 백장암이 중심 사찰로 승격되면서 백장사가 된 것이다. 이는 당시 지리산을 유람한 이들의 기록에도 나타나는데, 대개 백장암(당시 백장사)에서 투숙을 하고 지리산을 유람했다.

 

양대박은 1565년 가을에 백장사에서 투숙하고 천왕봉에 올랐다. 1586년 9월 3일 다시 백장사를 찾아 하룻밤을 묵었다<두류산기행록>. 유몽인은 1611년 3월 29일 백장사에서 1박을 했다<유두류산록>. 이들은 대개 운봉현에서 인월역을 거쳐 백장사에 하룻밤을 묵은 후 지리산을 유람했던 것이다.

 

그러나 백장암도 1679년(숙종 5)에 화재로 모두 소실되었다. 이조참판과 진주목사를 지낸 송광연(1638~1695)은 1680년 윤8월 26일 천왕봉을 내려와 군자사를 들렀다가 백장사에 이르렀다. ‘절(백장암)을 새로 창건하고 있는데 아직 완공되지 않아서 잠시 쉬었다가 인월역에서 숙박을 하게 되었다’고 적고 있다<두류록>.

 

실상사와 비슷한 시기에 창건된 백장암에는 국보 제10호인 삼층석탑과 보물 제40호인 석등, 보물 제420호인 백장암청동은입사향로가 있다. 백장암 삼층석탑은 통일신라시대의 기존 석탑과는 다른 ‘이형 석탑’으로 주목을 받고 있다. 탑 전체를 두른 조각들이 장엄하고 섬세하여 바로 뒤에 있는 정교하고 단아한 석등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

 

백장 회해(百丈 懷海: 749~814)는 당나라의 선승이다. 백장산(百丈山)에서 살았기 때문에 백장이라고 부르고 이름은 회해(懷海)이다. 초조 달마대사에서 육조혜능, 남악회양, 마조도일에 이어 제9대 조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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