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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자로 가는 길

지리산 최고의 전망대, 바로 이곳!

 

 

 

 

지리산 최고의 전망대, 바로 이곳!

[김천령의 지리산 오지암자 기행⑩] 지리산의 옛 베이스캠프, 금대암

 

마천에서 임천 냇물을 건너지 않고 금대산 비탈을 오른다. 산 그림자에 부셔지는 뿌연 오후의 빛. 길 중간쯤에서 잠시 건너편 마을을 내려다봤다. 도마 마을 다랑논은 예전의 풍경이 아니었다.

 

가을이면 황금빛 다랑논으로 전국의 사진가들을 불러 모았던 지리산의 명소는 더는 찾은 이 없는 곳이 되어 버렸다. 돈도 안 되고, 노인밖에 남지 않은 농촌의 현실에서 인내와 고통이 따르는 벼농사를 기대할 수는 없을 것이다. 더러는 밭으로, 더러는 그나마 편한 작물 재배지로, 돈이 되는 작물이 계단식 논을 채우고 있어 가을인데도 아직 초록으로 푸르기만 하다.

 

▲  금대암 가는 길에서 본 도마마을 다랑논(2009년)

 

벼농사를 짓지 않는다는 건 단순히 풍경 하나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삶의 토대가 없어지는 것이다. 문화가 없어지는 삭막함이란 더 이상 기억하고 추억할 것이 없는 불행이 스멀스멀 밀려오는 것이다.

 

평야지대의 논은 하나같이 반듯하고 산골짜기의 논도 자로 잰 듯 반듯해진 요즈음 이곳 지리산 산간마을에서 그나마 남아 있는 의중, 상황, 사포, 도마 마을 등의 층층 다랑논을 보존할 수는 없을까. 천년 넘게 이어온 이 땅 벼농사의 마지막 서정이 안타깝고 눈물 난다.

 

 지리산 파노라마. 왼쪽부터 하봉, 중봉, 천왕봉, 제석봉, 장터목, 세석평전, 영신봉, 칠선봉...

 

금대지리, 그 장엄한 파노라마

숨이 깔딱깔딱 넘어가는 금대산 바로 아래 벼랑에 있는 금대암은 해발 800미터가 넘는 곳에 있다. 암자에 이르니 스님 혼자 마당을 휘적휘적 걷고 있다. 방금 입구에서 수십 명의 단체 손님이 지나가서인지 “혹시 일행이요.” 하며 묻는 스님의 눈빛엔 언뜻 경계가 비쳤다. 같은 일행이 아니라고 했더니 스님은 순식간에 나한전으로 모습을 감췄다. 스님마저 마당을 비우니 암자는 깊은 적막에 빠졌다. 적막을 깨뜨린 건 누구인가.

 

▼ 나한전

 

일망무제. 금대암에 오르면 지리능선이 한눈에 들어온다. 금대암에 서면 왜 이곳이 최고의 지리산 전망대로 불리는지 단박에 알 수 있다. 금대암에서 지리산을 바라보노라면 활처럼 뻗은 지리능선이 한 폭의 그림인 양 손을 뻗치면 잡힐 듯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1915m인 천왕봉을 위시하여 왼쪽으로 중봉과 하봉이 보이고, 오른쪽으로 제석봉․장터목․연하봉․촛대봉․세석평전․영신봉․칠선봉 등 1500m가 넘는 거봉들이 구름 위로 솟아 있다.

 

 지리산 파노라마. 왼쪽부터 하봉, 중봉, 천왕봉, 제석봉, 장터목, 세석평전, 영신봉, 칠선봉...

 

다시 이 거봉들을 호위하듯 해발 1000m가 넘는 20여 개의 높은 봉우리들과 80여 개의 크고 작은 봉우리들이 서로 어우러져 한 편의 장엄한 파노마라를 이루고 있다. 이따금 봉우리마다 걸려 있는 구름은 감히 범접하지 못할 신령스러운 기운을 내뿜는다. 이 장관이 바로 ‘금대지리’라 불리는 함양팔경이다.

 

 

예로부터 금대암에서 보는 지리산 풍경은 최고로 꼽혔다. 그중 1643년 8월 20일에서 26일까지 지리산을 유람한 박장원의 <유두류산기>를 보면 그 감동이 오늘까지도 전해진다.

 

“8월 25일 맑음, 가마를 타고 금대암에 들렀다. 안국사에서 5리 정도 떨어져 있었다. 지세가 외딴 곳에 있는데, 산의 한 면은 조금도 가려진 곳이 없어 마치 금강산이 한눈에 보이는 정양사의 남루와 같았다.(현재 내금강면 장연리 금강산에 있는 정양사의 남루는 경내에 있는 작은 누각이지만 이곳에 오르면 금강산 일만이천봉을 한꺼번에 구경할 수 있는 금강산에서 가장 유명한 누각이다.)

 

하룻밤 묵었던 제일봉인 천왕봉을 멀리서 바라보니 하늘에 기둥 하나 꽂혀 있고, 구름은 모였다 흩어졌다 하니 참으로 옛사람이 ‘내일이면 인간 세상의 일 해를 따라 갈 터이니, 황홀히 하루저녁 신선세계 나그네 되리’라고 한 것과 같았다. 그래서 시를 지어 읊었다. ‘짚신을 신고 첩첩 산중 험한 길을 다 밟고서 / 다시 오랜 사찰 금대사를 향해 돌아왔네. / 제일봉인 천왕봉 정상 어제 자던 그곳에는 / 흰 구름과 푸른 안개에 보일락 말락 하는구나.’”

 

 

이곳에서 지리능선이 모두 보이니 옛사람들도 지리산을 오를 때 금대암에서 등반 여정을 가늠해봤다. 지리산을 유람할 때 금대암이 일종의 베이스캠프였던 것이다. 엄밀히 말하면 ‘전진캠프(advance camp)’였다고 할 수 있겠다. 지금이야 차로 지리산 아래 마을 어느 곳이든 반나절 만에 이를 수 있고, 종주도 넉넉잡아 3박 4일이면 충분하지만 예전에는 마을까지 오는 데 며칠이 걸리고 등반을 하면 보름에서 한 달이 넘게 걸리기도 했다.

 

그러다보니 대부분 산청 단성의 단속사지나 쌍계사 등의 큰 사찰은 ‘베이스캠프(base camp)’ 구실을 했고, 천왕봉 바로 아래에 있던 향적사와 천불암 등의 작은 암자는 ‘어택캠프((attack camp, final camp)’, 금대암과 벽송사 등의 주요 암자는 지리산을 오르기 전 전진캠프 역할을 했던 것이다.

 

▲  해우소

 

잘 있느냐 금대암아!

금대암의 명물 전나무를 보기 위해 해우소로 내려간다. 푸른 이끼가 낀 돌층계를 내려서니 양편으로 도열해 있는 전나무들 사이로 아담한 전각 한 채가 보인다. 더 이상 소박할 수 없는 풍경. 삐걱거리는 문을 여니 작은 창으로 숲의 청량한 기운과 초록의 잎들이 해우소 안으로 마구 쏟아진다. 일체의 근심걱정은 이곳에서 모두 사라지고 마니, 금대암에 가면 해우소는 꼭 들를 일이다.

 

 

비탈에 일군 텃밭에 하늘을 찌를 듯 솟아 있는 전나무 한 그루. 이제 금대암의 상징이 되어버린 전나무의 나이는 500살이 넘었다. 높이가 40m, 둘레가 2.9m로 현재 우리나라 전나무 중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것이라고 한다. 찻길이 노이기 전 산길을 오르면 금대암의 입구였던 이곳에는 원래 두 그루의 전나무가 있었는데, 한 그루는 벼락을 맞아 없어졌다. 지리능선의 장엄한 풍경을 재는 긴 자처럼 전나무는 허공에 매달린 듯, 지리산에 기대어 있는 듯하다.

 

조선 성종 때의 문인 뇌계 유호인(1445~1494)은 이곳 금대암을 둘러보고 ‘잘 있느냐 금대암아 / 송하문이 옛날 같구나 / 송풍에 맑은 꿈 깨어 / 문득 잠꼬대를 하는구나.’는 시를 썼다.

 

                           ▲  500살 전나무

 

멀리 서암정사와 벽송사가 보인다. 예부터 지리산에서 맑고 깨끗한 곳으로 금대암과 벽송암이 제일이라고 했는데, 금대암에서 보면 벽송암(사)이 보인다. 서로 마주보는 곳에 있는 맑고 깨끗한 암자는 수행을 하기에 그만이다. 벽송사가 깨달음을 얻기까지의 수행처라면 금대암은 깨달은 후에 보림하기에 적격한 곳이 아닌가 싶다. 아직 깨닫기 전의 수행자는 맑고 포근한 곳이 수행하기에 좋고, 깨달은 이는 사방이 탁 트인 곳을 수행처로 삼아 큰 뜻을 품는다고 했던가.

 

 

나한전 옆 층계를 오르면 집채만 한 너럭바위가 공중에 솟아 있다. 너럭바위는 하늘의 기운과 땅의 기운이 만나는 곳에 있다. 한낮의 햇볕이 데운 열기가 아직도 바위에 그대로 남아 있다. 암자에서 좌선하는 ‘선불장’으로 이곳이 제일이겠다. 이곳에 앉으니 사방이 한눈에 들어온다. 합장!

 

 

허공을 걷는 듯 구름 위를 걷는 듯

금대암만큼 조선시대 유람록에 자주 등장하는 암자도 드물다. 1400년대 김종직의 <유두류록> , 남효온의 <지리산일과>, 김일손의 <두류기행록>, 1600년대 박여량의 <두류산일록> 등의 유람기에서 흔히 볼 수 있다. 그중에서 가장 인상 깊은 대목은 김일손이 <두류기행록>에 남긴 글이다. 김일손은 1489년 4월 14일에서 4월 28일까지 지리산을 유람했는데, 등구사에서 2박을 하고 4월 16일 금대암에 이르게 된다.

 

 

“한 승려가 물을 긷고 있었다. 나는 정백욱(일두 정여창)과 함께 불쑥 들어섰다. 뜰에는 모란 몇 그루가 있었는데, 반쯤 시들었어도 그 꽃은 매우 붉었다. 누더기 승복을 입은 승려 20여 명이 가사를 입고서 뒤따르며 범패를 하고 있었는데 그 속도가 매우 빨랐다. 내가 물어보니 이곳은 ‘정진도량’이라고 했다. 정백욱이 그럴 듯하게 해석하기를 '그 법이 정일하여 잡됨이 없고, 나아가되 물러섬이 없습니다. 밤낮으로 쉬지 않고 매진하여 부처가 되는 공덕을 쌓는 것입니다.

 

만약 조금이라도 게을리 하는 자가 있으면 그 무리 가운데 민첩한 한 사람이 긴 막대기로 내리쳐 깨우치게 하여 잡념과 졸음을 없애게 합니다.‘라고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부처가 되기도 고되군요. 학자가 성인이 되는 공부를 이와 같이 한다면 어찌 성취함이 없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암자에는 여섯 개의 고리가 달린 석장이 있었는데 매우 오래된 물건이었다.”

 

 

이쯤에서 궁금해지는 것 하나. 금대암의 이름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옛날부터 ‘금대’라는 이름이 지어진 이유가 궁금했던 모양이다. 사람들은 저마다 지리산의 여러 사찰 가운데서 창건된 지가 오래되었다는 데서, 지리산에서 경치가 으뜸이라는 데서, 금박으로 칠했다는 데서 ‘금대’라는 이름을 유추했지만 이는 억측일 뿐이었다.

 

 

금대는 <정토경>에 나오는 말이다. 정토경은 무량수경, 관무량수경, 아미타경의 <정토삼부경>을 말한다. <관무량수경-정종본>에 왕비 위제희의 이야기가 나온다. 인도 왕사성의 아사세라는 태자가 나쁜 친구 조달의 꾐에 빠져 부왕인 빈바사라를 잡아 일곱 겹으로 된 감옥에 감금하고 누구도 가까이 가지 못하게 했다.

 

 

그러나 왕비인 위제희는 몸을 깨끗이 씻어 꿀 반죽을 몸에 발라 남몰래 왕에게 먹였다. 태자 아사세가 이 사실을 알고 어머니를 죽이려 했으나 신하의 만류로 궁궐의 깊은 곳에 어머니를 가두고 만다. 슬픔과 근심에 쌓인 왕비 위제희는 부처가 있는 기사굴산을 향해 간절히 예배했다. 이에 부처는 위제희와 미래 세상의 일체 중생들이 서방 극락세계를 보는 열여섯 가지 법을 가르쳐 주게 되니 이가 ‘16관법(觀法’)‘이다. 위제희와 대중을 위한 관법이 여섯, 미래중생을 위한 관법이 일곱, 삼배구품왕생이 셋이다.

 

 

그중 공덕이 높은 수행자가 삶을 마치려고 할 때 아미타불이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 등 대중들과 무리들에게 둘러싸여 자색을 띤 금빛 연화대(금대)를 가지고 그 수행자를 영접하는데, 수행자가 돌아보면 자색을 띤 금색 연화대(금대)에 이미 올라앉아 합장하는 자신을 보게 된다. ‘금대’라는 말은 여기서 유래한 것이다. 부처님의 몸이 금빛이라서 부처가 있는 자리를 금대라고 한 것도 일리가 있는 말이다.

 

 

암자 마당에 내려섰다. 허공을 걷는 듯 구름 위를 걷는 듯 아득한 풍경. 그 옛날 벽송사에서 이곳을 오갔던 응윤 스님(1743~1804)이 바라본 금대암 풍경이 오늘에도 생생하고 아련하다.

 

 

“(금대암에서 바라보면) 반야봉으로부터 천왕봉에 이르기까지의 산봉우리가 화려한 병풍이나 비단 장막처럼 펼쳐져 있다. 정면으로 바라보면 골짝 골짝의 구름이 한눈에 들어온다. 오는 것, 가는 것, 멈추어 선 것, 가로로 비껴 있는 것이 여기저기 보이는데 드문드문한 것은 주름진 비단 같고, 펼쳐진 것은 비단 폭 같으며, 넓게 퍼진 것은 바다와 같다. 문득 보이다 바로 없어지는 갖가지 변화하는 형상이 가장 기이한 경관이다.”

 

▲  지안재

 

 금대암은 언제 지어졌을까

 금대암의 창건에 대한 이야기는 기록마다 다르다. 심지어 암자에 있는 문화재 안내문도 서로 기록이 달라 혼란만 주고 있다. 안국사 부도 안내문에는 신라시대에 창건되어 1403년(태종 3)에 행호 조사가 중건한 것으로, 금대암 안내문에는 656년(신라 태종 무열왕 3년)에 행호 조사가 창건한 것으로, 금대암 전나무 안내문에는 1403년(태종 3)에 행호 조사가 창건한 것으로, 금대암 3층석탑 안내문에는 656년(신라 태종 무열왕 3년)에 행평(行平) 조사가 창건한 것으로 각기 달리 적고 있다. 일부 백과사전에는 656년(신라 태종무열왕 3) 행우(行宇) 조사가 창건하였다고 적고 있다. 행평(行平) 과 행우(行宇)는 금대암을 중창한 행호(行乎) 조사의 오기로 보인다.

 

행호 조사는 생몰연대를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조선 초기의 승려로 <법화경>의 이치를 깨달아 천태종의 지도자가 되었다고 전해진다. 태종이 지은 치악산 각림사의 낙성식을 주관했고, 장령산에 대자암의 주지로 임명됐다. 세종이 즉위하자 판천태종사로 임명됐으나 얼마 뒤 벼슬을 버리고 지리산의 금대사와 안국사, 천관산 수정사, 강진 백련사를 중수했다. 조선 초기 불교가 배척되는 분위기에서도 효령대군 등을 불교에 귀의시키는 등 왕실에 불교를 보급하는 데 힘쓴 인물로 전해진다.

 

금대암은 신라시대에 창건한 것으로 전해지나 그 후의 역사는 전해지고 있지 않다. 다만, 신라의 도선국사, 고려의 보조국사와 진각국사, 조선의 서산대사가 도를 닦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응윤 스님1743~1804)도 <경암집-금대암기>에서 ‘신라․고려시대로부터 우리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이름나고 덕망 있는 고승이 모두 이 암자에 거주했는데, 고찰할 만한 사적은 없다.’고 했다.

 

이덕무는 <천장관전서>에서 군자사를 언급하면서 고려 때 불일국사(보조국사 지눌)의 전법제자인 진각국사가 군자사를 중창하여 제자 신담으로 하여금 이 절에 주석하게 하고, 자신은 금대암으로 물러나 거쳐했다고 적고 있는 것으로 보아 금대암은 조선시대에 처음 지어진 것이 아니라 중창되었으며 고려시대에 이미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이로 보아 적어도 고려시대 이전에 창건되어 조선 초기 행호 스님에 의해 중창된 것으로 보는 것이 맞겠다.

 

금대암은 경상남도 함양군 마천면 가흥리 금대산에 있다. 대한불교조계종 제13교구 본사인 해인사의 말사이다. 한국전쟁 때 소실되었다가 금대암복구기성회가 중건했다. 현재 건물로는 무량수전과 나한전·선원 등이 있고, 유물로는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34호로 지정된 삼층석탑을 비롯하여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268호인 동종과 제269호 신중탱화, 경상남도기념물 제212호인 함양 금대암 전나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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