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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관 옆 박물관

홍대 북카페에서 보낸 1박 2일, 각각의 공간들

 

 

 

 

홍대 북카페에서 보낸 1박 2일, 각각의 공간들

 

▲ 북카페 '자음과 모음'

 

10월 3일. 진주로 가는 버스 안에서 난 이 글을 쓰고 있었다. 해는 이미 떨어졌고 차 안에선 아무리 해도 불을 켤 수가 없었다. 좌석 위, 작은 실내등에서 희미한 빛조차 얻을 수 없는 상실감. 하는 수 없이 읽고 있던 책을 덮었다. 인삼랜드 휴게소에서 잠시 멈췄던 버스는 무주를 지나고 있었다.

 

 

책을 접는 대신 수첩과 펜을 꺼내 들었다. 워낙 악필인데다 어둠 속에서 글자를 끼적거리니 나중에 내 글씨를 알아볼 확률은 적었지만, 흔들리는 버스 안에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것밖에 없었다. 어둠이 만들어준 밀폐된 공간에서 생각의 편린들을 끄집어내어 적는 것, 깊은 고독만큼이나 아름다운 일이다.

 

▲ 북카페 '자음과 모음'

 

어제는 비가 억수같이 쏟아졌다. 인적 하나 없는 지리산 산중 암자를 벗어난 나는 나무 한 그루 없는 서울 홍대 거리를 이틀이나 배회하고 있었다. 홍대 입구 역에 내려 북카페 예닐곱 곳을 무작정 둘러보기로 한 것.

 

▲ 북카페 '자음과 모음'

 

 

일단 지하철역에서 가장 먼 ‘자음과 모음’ 북카페로 향했다. 1km 정도만 걸으면 충분하겠지만 도시에서의 도보는 썩 유쾌한 편은 아니었다. 게다가 합정역 바로 코앞에 북카페가 있다는 걸 알았을 때는 심한 배신감마저 들었다.

 

 

다행인지, 북카페에 들어서자마자 비가 후드득 쏟아지기 시작했다. 아내가 준 노란 우산이 쑥스러웠지만 조심스럽게 꺼내어 테이블에 올렸다. 커피 한 잔을 주문했다. 비 오는 날 빗소리를 들으며 책을 보는 것도 운치 있으리라. 하얀 벽면의 문자가 편안하다. 서가에 꽂힌 책들로 카페 안 공기가 훈훈하다고 여길 즈음 밖으로 나갔다. 야외는 책가도처럼 출판사에서 낸 책 그림이 빼곡히 벽면을 채우고 있었다.

 

 

‘후마니타스’ 북카페는 엄숙했다. 빈자리가 두엇 보였으나 무언가에 너무나 열중해 있는 사람들을 보니 잠시 앉아있기에도 부담스러웠다. 북카페 사용 규칙을 읽었다. 비가 잠시 주춤하는 사이 ‘다산북스’로 향했다.

 

 

 ▲ 후마니타스 책다방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다산북스의 24시 카페다. 오늘같이 비가 나리는 날에는 더욱 좋으리라. 백석의 시구처럼 그리움이 밀려왔다.

 

 

흰 당나귀가 지키고 있는 인상적인 입구를 한참이나 바라보다 2층으로 올라갔다. 비가 오니 운치 있는 테라스. 꽤 낭만적이다. ‘흰 바람벽이 있어’ 시를 읽다 거리로 나왔다.

 

▲ 다산북스 북카페 '나와 나타샤와 흰당나귀'

 

 

 

북카페 ‘꼼마’를 찾기까지 조금 헤맸다. 홍대거리의 북카페는 공통적으로 간판이 작았다. 유심히 보지 않으면 지나치고 말 정도로 간판 구실을 못하고 있었다. 알림을 목적으로 한 것이 아니라 단지 여기에 있음을 나타내는 아이콘 정도로 여겨졌다.

 

 

 

문학동네가 운영하는 북카페 ‘꼼마’는 독특한 구조였다. 2층 천장까지 닿은 높다란 책장에는 책이 빼곡히 꽂혀 있었다. 사람의 키에 닿지 않는 책은 위태위태한 사다리를 올라서 끄집어내야 하는 수고로움이 있었다. 그럼에도 이 사다리와 높은 책장은 꼼마의 상징처럼 충분히 매력적이다. 두 권의 책을 골랐으나 사는 것은 내일로 미루었다.

 

▲ 문학동네 북카페 '꼼마'

 

 

 

 

이튿날, 인문카페 ‘창비’를 찾았다. 손님은 단 한 명. 심플한 인테리어가 특징인 카페 안은 단조로웠다. 그 단조로움 속에 여유가 묻어났다.

 

 

 

애써 치장하지 않은 담박함이 창작과 비평사의 연륜을 말해주고 있는 듯했다. 혼자 깊이 침잠하여 글쓰기에는 이곳이 참으로 좋겠다 싶다.

 

▲ 인문카페 '창비'

 

 

도로를 가로질렀다. 홀로 떨어진 북카페 ‘정글’. 1층에는 디자인 서점이 있었고, 2층과 3층이 북카페였다.

 

 

고양이 한 마리가 입구를 지켰는데, 또 다른 한 마리가 바닥에 배를 깐 채 느긋하게 손님을 바라보고 있었다.

 

▲ 북카페 '정글'

 

 

디자인전문 출판사답게 이곳의 북카페 중에선 가장 예뻤다. 공간 구성과 책의 배치에서 북카페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거실을 중심으로 사방으로 크기가 다른 룸을 곳곳에 두어 규모에 맞는 세미나를 언제든 할 수 있도록 공간을 구성한 것이 인상적이었다.

 

▲ 북카페 '정글'

 

▲ 캐슬 프라하

 

 

마지막으로 들른 북카페는 ‘작업실’ 2006년에 생긴, 이곳에서 가장 오래된 북카페란다. 역시나 손바닥만 한 간판 때문에 찾기는 수월하지 않았다.

 

▲ 북카페 '작업실'

 

이미 커피를 마신 터라 주인에게 양해를 구하고 그냥 둘러보기로 했다. 여태까지 본 북카페 중 가장 좁은 공간이었지만 왠지 모르게 분위기는 활달했고 젊은 에너지가 넘쳤다. 확실히 북카페 ‘작업실’은 가장 홍대스러웠다.

 

▲ 북카페 '작업실'

 

 지난 10월 1일에서 5일까지 열린 제10회 서울 와우북페스티발

 

오후가 되자 홍대거리는 사람들로 넘쳐났다. 잠시 넋을 잃은 채 밀려드는 사람들을 구경했다. 조금 높은 층계에 올랐더니 사람들의 머리만 보인다. 이 무수한 사람들.

 

 

어진 말들을 모아 글로 엮어내고 종이로 묶는 것이 책이 아니던가. 저 각각의 사람들과, 저 각각의 공간들과, 저 각각의 책들에서 빛나는 수백수천의 불빛들. 이날 밤 난 양손에 여덟 권의 책을 든 채 버스도 택시도 잡히지 않는 축제의 소도시를 밤새 걸어야 했다.

 

 

 

가을 남도여행, 이 한 권의 책과 함께!(클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