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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자의 풍류와 멋

하회마을 가는 길에 꼭 들러볼 만한 삼구정

 

 

노모의 장수를 위해 지은 삼구정

 

안동 하회마을에 다다를 즈음 오른쪽으로 봉긋 솟은 언덕 위로 정자 하나가 보인다. 삼구정이다. 하회마을을 수차례 다녀갔지만 늘 이곳은 다음으로 미뤘다. 바로 길 옆인 데도 여태 가보질 못했던 것이다. 다행히 이번에는 하회마을에서 만나기로 했던 일행들이 조금 늦는 바람에 여유가 있어 삼구정에 들를 수 있었다.

 

 

삼귀정으로도 불리는 삼구정은 소산마을에 있다. 하회마을 가는 길에 있는 소산마을은 거촌임에도 하회마을의 유명세에 가려 늘 차창 밖으로 잠시 눈길을 주는 정도에 불과했다.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보자 한강수야/ 고국산천을 떠나고자 하랴마는/ 시절이 하 수상하니 올동말동하여라.

 

초등학생도 다 아는 이 시를 들으면 누구든 '아' 하게 된다. 김상헌이 청나라에 볼모로 끌려가면서 읊었던 이 시조가 소산마을 입구 시조비에 새겨져 있다. 소산마을은 바로 청음 김상헌이 청나라에서 돌아와 은거했던 곳이다. '청나라를 멀리하고 싶다'는 의미로 그는 거주했던 집도 청원루라 했다.

 

 

소산마을의 원래 이름은 금산촌이었는데 김상헌이 낙향하여 거주할 때 그 이름이 너무 화려하다 하여 검소한 뜻으로 소산으로 고쳤다 한다. 마을을 감싸고 있는 야트막한 주위 산세와 잘 어울리는 이름이겠다.

 

 

마을에 들어서면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것이 삼구정이다. 마을 뒷산에서 벌판으로 내리뻗던 긴 산줄기가 더 이상 달리지 못하고 멈춘 끝자락 도톰한 언덕에 삼구정이 있다. 얼핏 봐도 시원한 전망과 풍광이 좋아 답답한 마음을 풀기에 제격이겠다 싶다.

 

 

들판에서 보면 불쑥 솟은 이 언덕엔 아름드리 노거수들이 정자 주위를 아늑히 감싼다. 정자 앞으로는 매곡천이 흐른다. 산을 타고 온 땅의 기운이 이곳에서 멈추어 명당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도열한 노거수의 호위를 받으며 작은 일각문을 들어서면 제일 먼저 탁 트인 대청이 눈에 들어온다. 정자 기둥 사이로 사방이 탁 트여 있어 답답한 속이 뻥 뚫리는 듯하다. 정자 마당 바로 앞에는 고인돌 같은 바위가 셋 있는데, 이것이 거북바위다. 이곳에 십장생 중의 하나인 거북과 같이 생긴 바위가 있어 ‘삼구정’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이 정자는 어머니의 장수를 위해 1496년(연산군 2)에 사헌부 장령을 지낸 김영수가 형제와 상의하여 지었다. 그가 정자를 지은 것은 88세 되는 노모 예천 권씨를 즐겁게 해드리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이들 형제의 효행에 관해서는 허백당 성현(1439∼1504)이 쓴 삼구정 기문에 잘 묘사되어 있다. 형제들이 노모를 봉양하기 위해 가까운 고을 수령으로 부임해 왔을 뿐만 아니라, 효자로 이름난 중국의 노래자(老萊子)처럼 색동옷을 입고 재롱을 피워 노모를 즐겁게 해 드렸다는 것이다.

 

 

담장 너머로 오랜 세월 삼구정을 묵묵히 지키고 있는 노거수의 모습이 한 폭의 산수화 같아 이곳의 운치를 더해준다. 앞으로는 매곡천이 흐르고 넓은 들판이 있는 이곳의 아름다움을 읊은 시는 넘쳐난다.

 

 

그 가운데 조선 중기 문신인 계곡 장유는 삼구정 일대의 아름다움을 8경으로 가려냈다. 학가산의 맑게 갠 봉우리, 마애의 가파른 절벽, 마을에 피어나는 연기꽃, 역동의 찬 소나무, 풍산들의 파종하는 모습, 낙동강 굽이의 고기잡이, 삼복더위의 피서지, 중추절의 달구경이 그것이다.

 

 

정자 건물은 앞면 3칸, 측면 2칸이다. 4면이 모두 개방되어 있는 데다 널찍한 우물마루는 눈 맛이 시원하다. 삼구정은 오랜 세월을 지나는 동안 원형은 다소 훼손되었으나 정자 전체의 원형을 포함한 기본 틀은 변함없이 유지되고 있어 조선 초기 정자건축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삼구정 앞 문화재 안내문은 글씨가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로 방치되어 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게다가 이곳 안내문에는 '삼구정'으로, 문화재청 홈페이지에서는 '삼귀정'으로 되어 있다. 문화재 이름조차 통일되어 있지 않으니 더 무얼 바라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