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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자의 풍류와 멋

오십천의 절경 관동팔경 죽서루에 올라서니

 

 

 

오십천의 절경 관동의 으뜸, 관동팔경 죽서루에 올라서니

 

삼척 죽서루에 올랐다. 예전부터 가보길 원했었는데, 어쩐 연유에선지 매번 지나치기만 할뿐 발길이 닿지 못했다. 우리나라에서 내로라하는 누각은 두루 다녀갔건만 이곳을 다녀가지 못해 늘 허전했던 마음 한편을 이번에 달랠 수가 있었다.

 

 

관동팔경 중에 유일하게 바다가 아닌 내륙에 있는 죽서루는 삼척 시내에 있다. 무슨 행사가 있는지 오십천 물줄기 건너에선 시끌벅적한 소리가 들렸고 이따금 보이는 아파트들이 시야를 가로 막아 과연 이곳이 죽서루로 가는 길이 맞나 하는 의구심마저 생겼다.

 

 

잠시 후 도착한 죽서루. 도시의 약간 후미진 제법 한적한 곳에 있었다. 입구가 공사 중이어서 혹시 못 들어가나 하는 생각에 가슴이 철렁했는데 다행히 입장료도 없이 통과다.

 

 

드넓은 광장 끝으로 낮게 엎드린 누각이 하나 보인다. 흔히 삼대 누각이라 일컫는 광한루나 영남루, 촉석루 정도의 크기는 되겠거니 여겼었는데 생각보다 크지 않는 규모에 잠시 어리둥절했다. 그렇다고 해서 실망을 했다는 것은 아니다. 미루어 짐작한 것에 미치지 못한 아쉬움만 남았을 뿐이다.

 

 

'관동제일루'와 '죽서루' 현판이 들어온다. 관동팔경 중 제일 큰 누정이자 가장 오래된 건물인 죽서루는 앞면 7칸에 옆면 2칸이다. 2층의 누각은 불쑥 솟은 암반 사이의 공간에 자리하고 있는데 붉어지는 나뭇잎에 살짝 몸을 숨기고 있는 모습이 다소곳하다.

 

 

가까이 다가섰다. 여행자의 눈길을 끈 건 들쭉날쭉한 기둥들이다. 누각 아래의 높고 낮은 암석에 저마다 다른 높이를 가진 기둥들이 인상적이다. 요즘 같으면 울퉁불퉁하게 제멋대로인 바위 표면을 평평하게 깎아내어 기둥을 세웠겠지만 우리네 옛 조상들은 있는 그대로의 암석에 기둥을 맞추어 정자를 올렸다. 길이가 모두 다른 기둥은 17개인데, 그중 8개만 주춧돌 위에 올리고 9개는 주춧돌이 아닌 자연석 위에 세웠다. 그 자연스러운 지혜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죽서루 안에 오르니 현판들이 빼곡 차 있다. 우리나라 팔경문화의 으뜸인 관동팔경의 하나인 죽서루다 보니 시인묵객들이 이곳을 그냥 지나칠 리는 없었을 터. 숙종의 어제시에서 송강 정철, 미수 허목, 율곡 이이, 단원 김홍도, 표암 강세황 등이 글과 그림으로 이곳의 아름다움을 남겼다. 송강이야 관동별곡으로 워낙 유명하니 이곳을 읊은 그의 시가 있는 건 당연한 일일 테고, 미수는 이곳 삼척에 부사로 부임한 인연이 있다. 죽서루에는 미수 허목이 쓴 ‘제일계정(第一溪亭)’을 비롯해 이성조의 ‘관동제일루(關東第一樓)’, 이규헌이 쓴 ‘해선유의지소(海仙遊戱之所)’가 걸려 있다.

 

 

천장은 서까래가 다 드러나는 연등천장이다. 그다지 높지 않은 천장임에도 답답하지 않고 시원하다. 마루는 기둥 밖으로 퇴와 난간을 내어 공간을 더욱 넓게 하였다. 탁 트인 내부의 공간이 넓어 자연스럽게 밖을 내다볼 수 있는 데다 시원스럽기 그지없다. 난간에 기대어 오십천 맑은 물줄기를 완상하며 시구를 읊조렸을 옛 풍류가 그립다.

 

 

이처럼 경치 좋은 곳에 있는 우리네 '누'와 '정'은 학문을 수양하고 풍류를 즐기며 휴식을 취하는 곳이기도 하다. 무릇 누정은 여러 가지를 고려한 뒤에야 짓는다. 그래서 누각이나 정자에 올랐을 때 지은 이의 뜻과 안목을 헤아려야 제대로 즐기는 법도 안다고 말할 수 있겠다.

 

 

근데 이곳 죽서루에 오르니 아쉬움이 남는다. 오십천 절벽에 자리한 죽서루의 위치야 나무랄 데 없지만 지금은 그 옛날의 멋스런 풍경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바로 죽서루에 서면 오십천 건너의 자연스런 풍광 대신 높은 아파트와 건물들이 시야를 가로막는다는 것이다. 옛 조상들이 누정을 지을 때에는 정자 자체의 건축적인 면뿐만 아니라 정자가 선 자리와 정자에서 바라보는 풍광 등을 고려해서 지었겠다.

 

 

그래서 옛 누정을 살필 때에도 그 건물 자체의 아름다움을 보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누정에 달린 현판이나 시문을 읽어 그 뜻을 되새기거나 누정에서 풍광을 내려다보며 자연과 하나가 되고자 했던 옛 선현들의 자연관을 읽을 수 있어야 제대로 관람하는 것이겠다.

 

 

그렇게 볼 때 죽서루에서 보는 풍광은 답답하기 그지없다. 옛 누정을 제대로 이해했다면 그 건물 자체만 보존·관리하는 게 아니라 건물에서 바라보는 풍광까지 문화의 영역에 포함하여 관리해야 한다. 즉, 우리 선조들이 중요시했던 '차경'의 개념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문화재에 대한 보호정책은 자칫 껍데기만 보호하는 데 그칠 뿐이다. 누정은 건물 자체뿐만 아니라 누정을 둘러싼 환경 또한 보존되고 관리되어야 올곧은 누정의 보호관리라고 볼 수 있겠다.

 

 

바위 화단에 오죽이 여태 푸른 잎을 달고 있다. 주위의 기기묘묘한 바위와 수목들이 죽서루와 퍽 어울린다. 때론 나무들이 전망을 가리기도 하지만, 오히려 도시의 삭막한 풍경을 살짝 감추고 있어 그렇게 답답하지만은 않다.

 

 

누를 내려와 바위 사이를 걸었다.

 

 

갖은 형상의 바위들이 금세 시선을 빼앗는다. 바위들의 생김새가 하도 이상한 것이 많아 저마다 이야기 하나쯤은 가지고 있을 거라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신라 문무왕이 죽은 후 호국용이 되어 동해를 지키다가 오십천으로 뛰어들 때 죽서루 옆 바위를 뚫고 지나갔다는 용문바위는 일부러 빚은 조각품처럼 기이하고도 아름답다.

 

 

 

이 바위 위에는 '성혈자리'가 있어 더욱 눈길을 끈다. 고인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성혈을 이곳에서 보니 이곳의 역사가 그리 짧지 만은 않은가 보다.

 

 

풍요와 다산을 상징하는 성혈은 조선시대에 와서는 칠월 칠석날 자정에 부녀자들이 성혈터를 찾아가서 일곱 구멍에 좁쌀을 담고 치성을 드린 다음 좁쌀을 한지에 싸서 치마폭에 감추어 가면 아들을 낳는다는 민간신앙이 성행했다. 용문바위의 성혈은 직경 3~4cm, 깊이ㅣ 2~3cm 정도의 크기로 모두 10개가 있다.

 

 

오십천을 건너기로 했다. 죽서루에서 내려다보는 풍경이야 옛 맛을 잃었다 할지라도 그것이 선 자리는 오십천 벼랑 위니 인간이 그것마저 훼손하지는 않았을 터. 강 건너에서 올려다보는 죽서루의 당당한 자태를 보고 싶었다.

 

 

죽서루는 조선시대 삼척부의 객사였던 진주관의 부속건물이다. 보물 제213호로 오십천과 더불어 명승 제28호로 지정되어 있다. 언제 누가 창건하였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고려 원종 7년(1266)에 이승휴가 안집사 진자후와 같이 죽서루에 올라 시를 지었다는 것을 근거로 1266년 이전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 뒤 조선 태종 3년(1403)에 삼척 부사로 재임한 김효손이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죽서'란 이름은 누의 동쪽으로 죽장사라는 절과 죽죽선이라는 이름난 기생이 살던 집이 있어 ‘죽서루’라 하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