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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자의 풍류와 멋

하회마을에서 가장 그윽한 정취가 있는 겸암정사

 

 

 

 

살림집에 가까우면서 그윽한 정취가 있는 하회마을 겸암정사

 

층길 끝 겸암정사, 예전에도 몇 번 다녀간 곳이지만 벼랑길로 오니 마치 비바람 속에 떨다 쨍한 햇빛을 본 듯 감회가 색다르다. 하회마을을 감싸고 흐르는 S자 낙동강 물길. 그 바깥 벼랑 위에 버티고 서서 하회마을을 내려다보고 있는 겸암정은 솔숲에 고요히 들어앉아 있었다. 정자에서 내려다보면 강 건너 모래밭과 송림, 하회마을이 한눈에 들어온다.

 

 

겸암정사는 정자라고 하기에는 입구부터 그 자리한 모양새가 예사롭지 않다. 단출한 정자라기보다는 살림집에 가깝기 때문이다. 정사는 절벽 가장자리에서 조금 물러난 곳에 'ㅡ'자형의 정자인 바깥채가 있고 그 뒤에 살림채가 'ㄱ'자형을 이루고 있다. 살림채 왼쪽에는 방앗간채가 있다.  

 

개방성을 강조한 바깥의 정자와는 달리 살림채는 나지막한 담장에 가려져 있음에도 높낮이가 다른 땅의 생김으로 그 안을 쉽사리 볼 수 없다. 다만 정자 뒤쪽의 모서리와 살림채 사이의 좁은 틈새에 안마당으로 통하는 문이 있을 뿐이다.

 

 

겸암정사를 몇 번 들렀어도 살림채는 늘 볼 수 없었는데 이번에는 대문이 반쯤 열려 있었다. 인기척을 하고 들어갔더니 마침 안주인이 빨래를 널고 있었다. 집 구경을 좀 하겠다고 하니 하얀 빨랫감을 탈탈 털며 들어온 김에 정자 현판을 보고 가라고 덧붙인다. 그러고 보니 바깥에서 정자를 오를 도리가 없어 여태 정자의 겉모습만 구경하고 돌아갔을 뿐이었다. 정자는 살림채 안마당에서 판벽의 올거미 널문을 열면 곧장 들어갈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살림채는 정자의 뒤쪽으로 물러앉아 있어 겸암정사의 전체 경관을 흐트러뜨리지 않는다. 마치 주인을 지키는 충직한 무사처럼 있는 듯 없는 듯 묵묵하게 뒤에서 정자를 보필하고 있는 형상이다.

 

 

축담 위에 높이 앉은 살림채는 둥근 두리기둥을 하고 있어 더욱 규모 있게 보인다. 서쪽으로는 부엌 2칸을 두고 기둥 밖으로 축담을 쌓아 돌려서 내부를 넓게 했다. 안방은 2칸인데 앞으로 툇마루를 달았다. 대청은 4칸으로 대청 건너 ㄱ자 모서리에 2칸짜리 방을 두고 그 끝에 반 칸 정도의 마루를 놓았다.

 

 

살림채를 구경한 후 정자의 판문을 열자 한 폭의 그림이 따로 없다. 햇빛 넘치는 마루 끝으로는 나무들이 붉게 물들어 스스로 그림이 되고, 푸른 강물이 넘실거리는가 싶더니 강 건너 솔숲의 풍광이 들어온다. 그 너머로 손에 잡힐 듯 아스라이 펼쳐지는 산 능선의 물결은 한 폭의 산수화를 연상케 한다.

 

 

강습재(講習齋)와 각수재(閣修齋) 두 편액이 양 옆에 붙어 있는 대청은 4칸으로 시원스러울 정도로 넓다. 앞으로는 둥근 두리기둥이어서 시야는 더 거침이 없다. 구조는 대략 이러하다. 높은 축대 위에 一자형으로 지은 2층 누각의 정자는 대청을 중심으로 오른쪽으로 2칸통 방을 두고 이분합 들문을 설치했다. 왼쪽에는 1칸만 방으로 하고 그 앞쪽을 툇마루로 꾸며 대청을 보다 넓게 만들었다. 정자의 앞면과 좌우로는 기둥 밖으로 헌함(누각 또는 대청 기둥 밖으로 돌아가며 놓은 난간이 있는 좁은 마루나 방)을 돌려 계자 난간을 설치한 점이 눈길을 끈다.

 

 

‘겸암정’이라고 쓴 현판은 류운룡의 스승인 이황 선생의 글씨라고 한다. 뒤편 ‘겸암정사’라는 현판은 원진해가 9살 때 쓴 것이라 전해지고 있으며, 양진당 6대손 류영이 찾아 걸었다고 한다.

 

 

중요민속자료 89호로 지정되어 있는 겸암정사는 서애 류성룡(1542∼1607) 선생의 맏형인 겸암 류운룡(1539∼1601) 선생이 29세 되던 해인 1567년(명종 22)에 학문 연구와 제자를 가르치기 위해 지은 것이다.

 

 

류운룡은 15살 되던 해에 퇴계 이황의 문하에 들어갔는데, 퇴계가 도산에 서당을 열었을 때 제일 먼저 찾아가 배움을 청했다고 한다. 류운룡의 학문적 재질과 성실한 자질을 총애한 이황은 주역(周易) 겸괘(謙卦)의 ‘겸손한 군자는 스스로 자기 몸을 낮춘다’는 뜻이 담긴 ‘겸암정(謙菴亭)’이라는 현판을 써 주며 '새 집을 지었다는데 가보지 못해 아쉽다'는 편지글을 각별히 적어 주었는데 류운룡은 그 이름을 귀하게 여겨 자신의 호로 삼았다고 한다.

 

 

이번에는 정자에서 살림채로 나와 정사 마당으로 향했다. 정자의 동쪽 면 누마루 밑으로 정사 마당을 출입할 수 있다. 누마루 아래의 문이 낮아 정사의 이름처럼 스스로 몸을 낮추어야 들어갈 수 있다. 정사의 온돌방과 대청의 출입은 살림채와의 사이에 세운 대문으로 들어가 정사 몸체의 대청 뒷벽에 단 판문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정사 몸체 뒤쪽은 대청에 여닫이문만 두고 모두 벽체를 쳐서 살림채가 들여다보이지 않게 했다.

 

 

살림채를 들어가는 대문과 정자의 양끝 기둥에도 담장이 연결되어 있어 정자 난간마루뿐만 아니라 바깥에서는 아예 살림채를 볼 수 없도록 철저히 차단되어 있다. 이 담장은 살림채 동쪽의 마루 끝 기둥에서 시작되어 뒤쪽의 산을 둥글게 돌아 서쪽 뜰에서 끝이 나는 반달 모양이다. 다만 정자의 서쪽에는 바깥으로 출입하는 일각문이 있어 누정을 드나들 수 있게 했다. 서쪽의 일각문은 외부인들의 출입전용문인 셈이고 동쪽의 누마루 아래 문은 내외 구분 없이 드나들 수 있게 한 것이다.

 

 

잠시 이곳의 풍경을 굽어본다. 동쪽 옥연정사의 반대편인 부용대의 서쪽 입암산 절벽 위에 자리한 겸암정사는 하회마을을 바라다보며 강을 사이에 두고 빈연정사와 마주하고 있다. 높은 절벽 아래로는 화천이 깊은 소(沼)를 이루며 굽이돌아 흘러나가고 뒤로는 솔숲이다. 절벽 아래로는 넓은 바위가 있고 빈연(賓淵)이라는 깊은 소(沼)가 있는 절경을 자랑한다. 강마을과 솔숲, 드넓은 모래밭이 부감되는 곳에 자리하고 있다. 조용하고 그윽한 정취가 감도는 곳이다. 마을에서 길이 멀고 외진 곳에 자연이 어울린 진풍경을 느낄 수 있는 곳으로 정사의 위치로 알맞은 곳이라 하겠다.

 

 

 

이쯤에서 정사가 무엇인지 궁금하다. 겸암정사는 보통의 정자와는 달리 서당 구실을 했다. 정사(精舍)는 경치 좋은 곳에 지어 한가로이 거처하는 집인 정사(亭舍)와는 다르다. 흔히 정사(精舍)라 하면 불교에서 승려가 불상을 모시고 불도를 닦는 곳을 의미하거나 학문을 가르치거나 정신을 수양하는 곳을 일컫는다.

 

 

 

원래 불교 최초의 절이라 할 수 있는 죽림정사(竹林精舍, Venuvana)가 그 효시인데, 도교나 유교에서도 경치 좋은 곳에 학문을 연구하거나 정신을 수양하는 곳으로 정사를 짓기도 했다.

 

 

송나라의 주희도 무이산에 정사를 지어 무이구곡을 읊기도 했다. 즉 정사는 수려한 산천이 주는 정기가 인간에게 투여되어 인격이 함양된다고 믿는 지식인들에 의해 지어진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리하여 고장마다 아름다운 경치를 감상하며 정사를 지었고, 그중 별당채를 정사라 부르거나 선비의 집 사랑채의 당호를 정사라 하기도 했다. 예전에는 서원의 경우도 정사라 이름을 붙인 경우도 있다. 이처럼 정사는 여러 가지 용도로 쓰였음에도 화려한 외양보다는 자연 속에서 아주 검박하게 운영되었다는 특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