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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자의 풍류와 멋

하회마을 옥연정사의 망태기 우편함 보셨나요?

 

 

 

 

안동 하회마을 옥연정사의 망태기 우편함 보셨나요?

- 서애 류성룡이 <징비록>을 집필했던 옥연정사

 

"옛날 우리 어릴 적만 해도 바깥으로 나가려면 이 뱃길밖에 없었어요. 학교도 배로 다녔으니까."

 

하회마을과 부용대를 오가는 나룻배를 운행하는 류시중(55) 씨의 말이다. 류 씨는 3년 전부터 하회마을에서 나룻배로 사람들을 실어 나르고 있다. 처음엔 직접 노를 저었지만 바람이 거센 데다 물살이 빨라 도저히 힘이 들어 1달을 겨우 넘기고 배에 모터를 달았단다.

 

 계강암

 

하회마을을 떠난 나룻배는 부용대 아래 강변에 이르렀다. 수심이 얕아 배를 운전하는 게 여간 조심스럽지 않다며 푸념을 늘어놓던 류 씨가 배를 정박하며 바로 앞 바위를 가리켰다.

 

"여기가 계강암이지요. 예전부터 나루가 있었어요."

 

부용대

 

계강암(繫舡巖)은 하회마을에서 강을 건너 있는 부용대 아래 돌출된 큰 바위이다. 낙동강 한가운데에 누운 듯이 있어서 '배를 매어 두기 좋다'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강으로 몸을 내민 바위에는 20cm 정도의'繫舡巖(계강암)' 글씨가 지금도 선명하다. 수백 년 동안 하회마을에서 바깥세상으로 나가는 나루터 역할을 해온 것이다.

 

옥연정사

 

배에서 내려 모래톱을 걸었다. 한없이 펼쳐진 모래톱을 보며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곳에 보를 설치한다는 소리가 난무했던 아찔한 순간을 떠올렸다. 만약 이곳에 보가 들어섰다면 계강암은 물론이거니와 이렇게 너른 모래벌판도 다시는 보지 못했을 풍경이 되었을 것이다.

 

 

벼랑 숲속에 숨겨진 간죽문을 들어서니 옥연정사다. 옥연은 부용대 아래의 맑고 푸른 소를 말하는데 옥연의 옥(玉)은 빛남을 말하고 연(淵)은 깊음을 말하는 것이겠다. 중요민속자료 88호로 지정된 옥연정사는 1586년(선조 19)에 서애 류성룡 선생이 세웠다. 특히 이곳은 서애 선생이 그 유명한 <징비록(懲毖錄)>을 집필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옥연정사가 지어진 배경에 불교와의 인연이 있는 점이 특이하다. 옥연정을 지을 때 탄홍이라는 스님이 10여 년 동안 곡식과 포목을 시주하여 완공하였다고 한다. 옥연정사를 완공한 뒤 선생은 <옥연서당기(玉淵書堂記)>에서 “북쪽으로 소(沼)를 건너 돌벼랑 동쪽으로 기이한 터를 잡았는데, 앞으로는 호수의 풍광을 지녔고 뒤로는 높다란 언덕에 기대었으며 오른쪽에는 붉은 벼랑이 치솟고 왼쪽으로는 흰모래가 띠를 두른 듯 했다”고 하며 옥연정사의 빼어난 경치를 한 편의 시처럼 썼다.

 

 

비단 선생의 기문이 아니더라도 높은 벼랑을 등진 채 강을 내려다보며 울창한 숲을 끼고 있는 옥연정사의 경치는 한 폭의 그림이 따로 없다. 벼랑 끝에 고요히 앉아 솔숲의 풍경을 그대로 들인 채 푸근하게 안긴 이 고풍스러운 풍경은, 오랜 세월이 흘러 묵직함을 넘어 보는 이들을 압도한다.

 

 

옥연정사를 오가는 방법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하회마을에서 나룻배로 건너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풍천면에서 도로를 따라 광덕사거리에서 화천서원을 거쳐 들어오는 것이다. 물론 예전에는 하회마을에서 배를 건너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래서일까. 옥연정사는 대문채와 사랑채가 양 끝에 있다. 대개 대문채를 지나면 바로 사랑채가 있는 구조와는 다르다. 하회마을에서 배를 타고 건너오면 곧장 사랑채로 출입을 했기 때문에 강 쪽으로 사랑채가 있고 대신 대문채는 화천서원 방향에 있다.

 

 

옥연정사는 강에서 바라봤을 때 사랑채, 별당채, 안채, 대문간채 순이다. 대개 ㅁ자형인 구조와는 달리 각각 독립된 영역의 ‘一자형’ 평면을 이루고 있다. 아마 벼랑이 있는 지세를 이용해 집을 짓다 보니 그런 것이겠다.

 

옥연정사의 망태기로 만든 우편함에 한참이나 눈길을 주었다.

 

한 줄로 늘어선 건물들을 살펴보면 그 현판만 봐도 깊음을 알겠다. 옥연서당이라는 현판에서 학문의 밝고 깊음을 알겠고., 비가 갠 뒤의 맑은 바람과 밝은 달을 뜻하는 ‘광풍제월’은 중국의 황정견이 주돈이의 고결한 인품을 평한 말이다. 원락재의 현판은 자연스러운 흐름과 부드러움이 잘 어우러진 행서체로 안동 지방 누정의 현판 글씨로는 손꼽힌다. 감록헌은 마치 막힘없이 흐르는 물줄기처럼 시원한 글씨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 세상으로부터 물러난 선생이 징비록을 썼다는 세심재와 <논어>의 유명한 글귀인 ‘먼 곳으로부터 벗이 찾아오니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에서 따온 원락재에선 선생의 체취가 지금도 느껴지는 듯하다.

 

 

흘깃 담장 너머로 유유히 흐르는 낙동강과 그 너머로 하회마을이 시원하게 보인다. 마루에 걸터앉으면 비스듬히 누운 햇살이 넘치고 넘친다. 대문채 밖의 장작더미에선 부지런함이 읽히고, 짚으로 새끼를 엮어 만든 망태기 우편함은 친근함에 배시시 웃음이 나오고, 잘 갈무리한 살림살이에선 검박함이 엿보인다. 마당 가운데의 장한 소나무엔 선비의 기상이 꼿꼿하다.

 

 

일순 바람이 분다. 낙엽이 하늘에 날린다. 서애 선생의 칠언절구를 가만히 되새겨본다.

 

버선발로도 스스럼없는 길

강 위를 날아간 구름이 사라진 하늘은 가을

마름꽃은 뜯어도 드릴 이 없어

해거름 아득한 물길 한갓된 시름

 

 

간죽문을 나섰다. 강의 동쪽에 있는 옥연정사에서 절벽의 서쪽에 있는 겸암정사로 향했다. 이 벼랑 틈에는 서애 류성룡과 그의 형 겸암 류운룡이 오가던 아슬아슬한 벼랑길인 '층길'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