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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자의 풍류와 멋

동백꽃 핀 섬 속 최고의 정원을 찾아

 

동백꽃 핀 섬 속 최고의 정원을 찾아

[김천령의 한국 정원 이야기①] 윤선도의 보길도 부용동 정원(상)

 

 

윤선도는 강화도로 향했다. 오랑캐가 쳐들어오고 왕이 남한산성으로 피신했다는 말을 듣고  집안의 노복과 가솔들을 이끌고 왕을 구하러 나섰다. 그러나 들려오는 소식은 참담했다. 왕이 항복했다는 것. 왕자가 있던 강화도는 함락됐고 왕은 삼전도에서 오랑캐 앞에 무릎을 꿇었다. 윤선도는 울분에 넘쳐 뱃머리를 돌렸다. 다시는 이 땅을 보지 않으리라 다짐하며 제주도로 향하던 중 한 섬이 그의 시선을 붙잡았다. 섬의 수려한 풍광은 세상 밖의 풍경이었다. 그는 이 '산들이 둘러 있어 바다소리가 들리지 않으며, 맑고 소쇄하고 천석이 절승한 물외의 가경'에 가던 길을 멈추고 그만의 왕국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보길도는 윤선도의 섬이 되었다.

 


 

▲ 세연정 보길도 부용동 원림 입구에 있다.
ⓒ 김종길

 

 

 


세연정은 부용동 원림 입구에 있다. 예나 지금이나 바깥에서 들어오면 제일 먼저 만나는 공간이지만, 예전 중심 생활공간이던 낙서재에서 보면 동북쪽에 치우친 별서 정원이다. 그 옛날 윤선도는 황원포에서 배를 내려 부용동으로 향했다. 황원포는 '소나무 숲 속에 가려 고깃배의 돛대만 섬 사이로 은은히 보이던' 한적한 포구였다. 고산 윤선도는 보길도에 오면 포구에 있는 작은 호광루 난간에 기대어 멀리 하늘빛 바닷빛을 바라보았다 한다.

세연정의 회화적 풍경

 

메마른 작은 개울이 정원으로 이어진다. 개울을 따라 세연정 경내에 들어가면 땅속에서 솟아나는 샘물을 볼 수 있다. 저 멀리 낙서재가 있는 격자봉 낭음계에서 흘러온 계곡물이 땅속으로 모습을 감췄다 이곳에서 다시 솟아난 것이다. 샘물이 모여 작은 연못을 이룬 상류에서 옛 봉화대 터였던 울창한 동백 숲을 돌아가면 S자 형 개울은 넓어지고 정원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낸다.

구불구불한 개울 양쪽 언덕에는 녹나무, 예덕나무, 동백나무 등 갖은 나무들이 심겨 있고, 개울 한가운데로는 불쑥 돌출된 제방이 놓여 있다. 개울 양쪽 언덕의 S자 모양의 제방과 돌출된 '수제(水制)'는 풍경을 감추었다가 정원을 하나씩 보여주는 긴장감을 주기도 하지만 호우 때 유속을 떨어뜨리기 위한 과학적인 구조물이기도 하다.

세연정의 제방과 돌출된 수제 풍경을 위한 인공물이기도 하지만 호우 때 유속을 떨어뜨리기 위한 과학적인 구조물이기도 하다.
▲ 세연정의 제방과 돌출된 수제 풍경을 위한 인공물이기도 하지만 호우 때 유속을 떨어뜨리기 위한 과학적인 구조물이기도 하다.
ⓒ 김종길

 


 

계담의 바위들 600여 평의 꽤 너른 연못인 개울(계담)에선 이름 있는 일곱 바위를 비롯해 집채만 한 기묘한 바위들을 볼 수 있다.
▲ 계담의 바위들 600여 평의 꽤 너른 연못인 개울(계담)에선 이름 있는 일곱 바위를 비롯해 집채만 한 기묘한 바위들을 볼 수 있다.
ⓒ 김종길

 

 


시선을 들어 멀리 보면 개울 여기저기 울멍줄멍 널려 있는 집채만 한 기묘한 바위들을 볼 수 있다. 귀암, 혹약암, 사투암, 유도암(遊跳巖), 무도암(舞跳巖), 용두암, 비홍교, 일곱 바위 '칠암(七巖)'이다. 칠암 중의 하나인 혹약암(或躍巖)은 두꺼비가 금방이라도 뛰쳐나갈 것처럼 잔뜩 웅크리고 있는 모습이다. 이곳에 이르러 개울은 600여 평의 꽤 너른 연못이 된다. 세연정은 이 개울을 막아서 만든 정원이다. 농부들이 개울을 막아 논에 물을 대던 보를 응용하여 윤선도는 크고 네모난 판석으로 보를 쌓아 개울을 막고 계곡 연못'계담(溪潭)'을 만들었다.

칠암 너머로 정자 하나가 솟아 있다. '세연정'이다. 세연(洗然)은 주변 경관이 물에 씻은 듯 깨끗하고 단정하여 기분이 상쾌해짐을 말한다. 정자 뒤로는 우람한 소나무가 한 그루 있다. 봄이면 여기저기 어지러이 핀 영산홍과 대비되어 소나무는 홀로 청정하다. 세연정에는 동서남북 각 방향에 편액을 걸었다고 한다. 중앙인 북쪽에는 세연정, 남쪽에는 낙기란, 서쪽에는 동하각, 동쪽에는 호광루라는 편액이다. 칠암이 있는 서쪽에는 칠암헌을 따로 걸었단다. 세연정에 오르기 위해서는 엎드린 거북 모양의 바위 다리인 '비홍교(飛虹橋)'를 건너야 한다.

세연정 세연정에는 동서남북 각 방향에 편액을 걸었다. 중앙인 북쪽에는 세연정, 남쪽에는 낙기란, 서쪽에는 동하각, 동쪽에는 호광루라는 편액이다.
▲ 세연정 세연정에는 동서남북 각 방향에 편액을 걸었다. 중앙인 북쪽에는 세연정, 남쪽에는 낙기란, 서쪽에는 동하각, 동쪽에는 호광루라는 편액이다.
ⓒ 김종길

 

 


 

세연정과 계담 세연洗然은 주변 경관이 물에 씻은 듯 깨끗하고 단정하여 기분이 상쾌해짐을 말한다.
▲ 세연정과 계담 세연洗然은 주변 경관이 물에 씻은 듯 깨끗하고 단정하여 기분이 상쾌해짐을 말한다.
ⓒ 김종길

 

 


세연정 앞은 계담이고 뒤는 '회수담(回水潭)'이다. 자연 연못인 계담의 물이 세연정 옆 물구멍을 통해 인공 연못인 회수담으로 흘러간다. 방형에 가까운 회수담에는 네모난 섬 '방도(方島)'와 평평한 바위들이 물 위 여기저기에 드러나 있고 몇몇은 잠겨 있다. 윤선도는 연못을 상지(上池)와 하지(下池) 둘로 나누어 조성했다. 상지인 계담은 자연그대로의 아름다움으로 동적인 경관을 살리고, 인공적으로 조성한 하지 회수담은 물의 속도를 최대한 떨어뜨려 정적인 공간으로 연출했다.

특히 계담에서 들어가는 물구멍은 다섯인데 회수담으로 나오는 물구멍은 셋이고(오입삼출五入三出), 물이 들어가는 쪽은 높고 나오는 쪽은 낮게 만들어(고입저출高入低出) 수압 차이를 활용했다. 그럼으로써 물소리는 잦아들고 수면은 잠잠하여 회수담은 고요와 적막이 감도는 곳이 된다. 윤선도의 탁월한 공간 감각과 과학적인 사고, 예술적 안목을 엿볼 수 있다. 세연정은 이 빼어난 물의 공간인 두 연못 가운데 섬에 자리하고 있다. 흔히 계담과 회수담을 합하여 '세연지(洗然池)'라 한다.

 

세연정과 회수담 자연 연못인 계담의 물이 세연정 옆 물구멍을 통해 인공 연못인 회수담으로 흘러간다.
▲ 세연정과 회수담 자연 연못인 계담의 물이 세연정 옆 물구멍을 통해 인공 연못인 회수담으로 흘러간다.
ⓒ 김종길

 

 


 

동대와 서대  정원의 중심인 세연정에서 바라보기 가장 좋은 곳에 만든 무대이다.
▲ 동대와 서대 정원의 중심인 세연정에서 바라보기 가장 좋은 곳에 만든 무대이다.
ⓒ 김종길

 

 

 


세연정에서 물길을 건너면 돌로 단을 쌓은 동대와 서대가 있다. 정원의 중심인 세연정에서 바라보기 가장 좋은 곳에 만든 무대이다. 정원 안에 음악과 더불어 무희들이 춤을 추는 무대를 조성한 이 공간은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아주 독특한 공간이다. 회수담의 물은 서대와 동대 뒤의 작은 개울을 거쳐 하류로 흘러간다. 이 낮은 개울가에는 토성처럼 둑을 쌓고 대나무와 상록수를 심어 숲을 이루었다. 담이 아닌 숲과 언덕이 그대로 울타리가 되었다.

동대를 돌아가면 개울을 막은 '판석보(板石洑)'로 이어진다. 우리나라 정원에서 이곳에서만 볼 수 있는 유일한 석조보로 마을 사람들은 굴뚝다리라고 부른다. 물이 없을 때에는 아름다운 돌다리가 되고, 폭우가 내리면 물이 넘쳐 폭포가 된다.

 

세연정 개울가 언덕  담이 아닌 숲과 언덕이 그대로 울타리가 되었다.
▲ 세연정 개울가 언덕 담이 아닌 숲과 언덕이 그대로 울타리가 되었다.
ⓒ 김종길

 

 


 

판석보 우리나라 정원에서 이곳에서만 볼 수 있는 유일한 석조보로 마을 사람들은 굴뚝다리라고 부른다.
▲ 판석보 우리나라 정원에서 이곳에서만 볼 수 있는 유일한 석조보로 마을 사람들은 굴뚝다리라고 부른다.
ⓒ 김종길

 

 

 


관광객들은 대개 세연정에 올라 일대를 둘러보고 돌아가거나 조금 세심한 사람이라면 판석보를 건너 계담을 한 바퀴 돌며 세연정 일대의 풍경을 감상하고 돌아간다. 그러나 '옥소대(玉簫臺)'를 오르지 않고서는 세연정을 보았다 할 수 없다. 판석보를 건너면 산 쪽으로 작은 오솔길이 보인다.

오솔길을 따라 잠시 오르면 느닷없이 거대한 석문이 나타나 비현실적인 풍경을 자아내는데 이내 옥소대에 다다른다. 수십 명이 둘러앉을 정도로 널찍한 옥소대에 오르면 황원포 앞바다가 손에 잡힐 듯하고 발 아래로 세연정이 내려다보인다. 그제야 옥소대에서 춤을 추면 연못에 그림자가 거꾸로 보였다는 것이 사실임을 믿게 된다.

옥소대를 내려와 축대를 쌓은 둔덕에 서면 건너편 세연정 일대가 한눈에 펼쳐진다. 이곳에서 바라보는 세연정 풍경은 압권이다. 물 위에 떠 있는 듯한 정자도 그러하거니와 물속에 펼쳐지는 똑같은 진경에 놀라게 된다. 바닥이 암반이라 맑디맑은 물속에 비친 세연정은 그 자체로 선경이다.

 

옥소대 옥소대에 오르면 황원포(사진 오른쪽 바다)와 세연정(사진 왼쪽 아래)이 한눈에 보인다.
▲ 옥소대 옥소대에 오르면 황원포(사진 오른쪽 바다)와 세연정(사진 왼쪽 아래)이 한눈에 보인다.
ⓒ 김종길

 

 


 

세연정 세연정 창으로 들어온 계담 풍경
▲ 세연정 세연정 창으로 들어온 계담 풍경
ⓒ 김종길

 

 

 


여기까지가 세연정 일대의 풍경이다. 한국을 대표하는 이 정원은 눈으로만 봐도 아름답기 그지없다. 흔히 정원 하면 일본을 꼽으면서 우리에게도 그런 정원이 있는가 하는 의문을 갖는 이들에게 자신 있게 부용동 정원과 소쇄원을 들곤 한다. 그러나 우리 정원은 단지 눈으로만 보는 '시경(視景)'에 그치지 않는다.

그럼, 눈으로 보는 것만으론 우리 정원을 충분히 알 수 없다면 무엇을 더 보태야 할까. 부용동 정원은 내면을 중시한 우리 정원의 특성에다 이곳만의 또 다른 면모를 알아야 제대로 느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