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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자로 가는 길

딸을 위해 지은 암자 '변산 월명암'

딸을 위해 지은 암자 '변산 월명암'
- 바람도 달도 쉬어가는, 꿈에 그리던 암자

실상사지

월명암月明庵.
변산 일대를 제집 드나들 듯 자주 온 나였지만 월명암을 오르지 못했었다. 매번 아쉽고 아쉬운 회한을 이번에는 기어이 풀고야 말리라. 직소폭포 가는 길목에서 아내와 딸아이를 산정호수로 보내고 홀로 암자를 올랐다.


처자식을 버리고 혼자 가는 산길은 편치 않았다. 암자로 가는 길이 벼랑길이라 다섯살난 아이가 가기에는 아무래도 무리가 따랐다. 속세를 버리고 깊은 산중으로 떠나는 스님에 비하면 한낱 터럭같은 범인의 고민에 불과하니 도라는 것은 애초 나의 것이 아님을 알겠다.


암자가는 초입은 가파른 암벽길이다. 숨이 턱에 까지 찰 정도로 만만치 않은 길이다. 다만 밀어주고 끌어줄 수 있도록 오르는 길이 넓다. 중간 중간 내변산의 장엄한 산능선을 바라볼 수 있는 벼랑이 있어 거친 숨을 재울 수 있다. 삼십 여 분을 오르고 나니 평탄한 흙길이다.


암자로 가는 길은 대개 좁은 산길이다. 험하고 가파른 길이야 넓으면 서로 기대어 오를 수 있어 좋겠지만 좁은 산길은 혼자만 다닐 수 있다. 쓸데 없이 사람들과 수다를 떨지 말고 자신의 내면에 충실해라는 무언의 가르침이 길 위에 있다.


산중은 단풍이 채 들기도 전에 잎이 떨어졌다. 제 할 일을 마치고 이제 자신의 자리인 땅으로 돌아가는 소리를 낙엽이 낸다. 인적 하나 없는 고요한 정적을 바람이 깨뜨린다. 초겨울의 바람소리가 하늘을 가른다. 시리다. 암자로 가는 길에서 만난 바람 소리는 이미 이 세상의 것이 아니었다. 바람에 몸을 맡긴 채 한참을 우두커니 서 있었다.


호젓한 산길을 벗어나니 하늘을 찌를 듯 전나무 한 그루가 길손을 맞이한다. 악산인 변산에 어찌 이리 푸근한 터가 있단 말인가. 월명암이 앉은 자리는 한 눈에 보아도 아늑하다. 절마당에 서면 변산 일대가 아스라이 펼쳐지고 멀리 서해바다까지 보인다.


천삼백여 년의 역사를 가진 월명암은 변산반도 능가산 법왕봉에 자리잡고 있다. 부설거사가 오대산으로 가던 중 만경현 백연지에서 날이 저물어 하룻밤 묵게 되었다. 이곳에서 구씨의 딸인 묘화라는 여인과 인연을 맺어 등운과 월명 두 남매를 낳게 되었다. 딸인 월명을 위해 이곳 변산에 토막을 짓고 도를 닦아 월명은 이 자리에서 득도하였다.


 한국전쟁에 불타 버려 옛 암자는 기억 저편에 남아 있지만 산자락의 기묘한 암봉과 깊은 계곡, 고려 때에 이곳에서 궁궐을 짓는 목재를 내어갈 정도로 울창한 숲은 바람마저 쉬어가게 한다. 산은 산이되 예사롭지 않은 산이다. 꿈에도 그리던 절집은 새로 지어 그윽한 맛은 덜하지만 암자에서 바라본 변산 풍경은 영원히 잊지 못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