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빛, 나만의 서점
여러분에게 서점은 어떤 곳인가요? 아니 어떤 곳이었나요? 예전엔 동네 골목마다 서점이 하나 정도는 있었지요. 근데 어느 순간 하나둘 모습을 감추었고 이젠 도시에서 찾아보기 힘든 풍경이 되어버렸습니다. 온라인서점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지만 동네서점이 주던 자취와 추억을 채우기에는 역부족인 것 같습니다.
여기에 우리가 잊고 있었던, 우리에게 잊힌 기억들을 끄집어내는 18개 서점 이야기가 있습니다. 앤 스콧의 18 BOOKSHOPS 이야기입니다. 아홉 살 때 서점직원이 그녀의 책에 빨간 줄 달린 책갈피를 꽂아주었고 그때부터 책과 서점을 향한 사랑이 시작되었다는 앤 스콧은 일 때문에 자주 출장을 다녔던 아일랜드와 미국에서, 이들 문학을 더 깊이 있게 읽기 시작했다는군요. 아일랜드와 미국에는 작가가 너무나 많고, 세상에는 서점이 너무나 많았다고요. 그래서 책과 서점을 찾아다니는 탐험가가 된 앤 스콧은 자신만의 서점 이야기를 적고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기억 속, 나만의 서점은 어떤 곳이었나요? 그 기억들을 되살릴 수 있는 흔적들을 적어 봤습니다.
바람 실은 돛, 컴펜디엄서점, 캠든 하이 스트리트, 런던
컴펜디엄서점의 지적 수준은 대단했다. 직원들은 각자 자기 분야의 전문가였다. 궁금한 작가에 대해 물어보면 거의 짧은 세미나 수준의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손님들에게 필요한 책이나 시리즈도 기꺼이 찾아주었다.(16쪽)
하지만 내게 남아 있는 컴펜디엄의 자취는 그곳에서 구입한 책만이 아니다. 컴펜디엄이라는 장소와 그곳의 사람들을 통해 나는 새로운 사실을 깨달았다. 그건 바로 내 옆에 나란히 서서 책을 읽는 사람이 나와는 또다른 세상을 거닐고 있는, 이 서점이라는 곳이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기이한 공간이라는 사실이었다. 거리에서 보면 컴펜디엄서점의 유리문은 늘 열려 있었고, 넓은 유리창 너머로 진열된 책들이 보였다. 그 거리는 얼마나 분주했던가. 고르지 않은 길 위에서 짐을 싣는 사람, 옮기는 사람, 차에 타는 사람, 출발하는 사람, 분주한 거리를 건너 서점 안에 들어서면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 준비된 지성, 새로운 발견이 늘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나를 도와주는 사람이 언제나 있었다. “혹시 … 있나요?” 하고 물으면 솔향기 풍기는 책장 사이로 서점직원이 틀림없이 다가오곤 했다. 나는 그들에게, 그들의 반짝이는 눈빛에 익숙해졌고 내 삶 속에서 그곳의 형체와 질서를 이해했다.
내 마음속의 세계, 이마고 문디(19쪽)
세익스피어의 《소네트》 초판을 팔다, 패럿서점, 세인트 폴스 처치야드, 런던 1609년
1608년에 패럿서점을 연 월리엄 애스플리는 자신의 서점이 이듬해 봄에 벌어질 역사적 사건의 무대가 대리라고는 예견하지 못했다. 당시 세인트 폴스 처치야드에는 이미 서른 곳의 서점이 이 고대 묘지 위에서 성업 중이었다.(35쪽)
상념, 옛 출판사 터의 서점, 이오나 섬, 스코틀랜드
이 서점에는 내가 찾는 책이 종종 있지만, 책이 아닌 무언가가 나를 이곳으로 끌어당긴다. 건물에 깃든 출판사의 기억 때문은 아니다. 이 작은 거처에 머물렀던 사람들, 그리고 지친 손으로 신비스러운 켈트의 문양을 채색했던 사람들이 이 공간에 남긴 것이 무엇이든, 그것 때문에 나는 이곳으로 거듭 돌아온다. 그리고 새로운 땅으로 떠나던 날, 한 장의 어두운 사진 속에 남겨진 이민자 가족의 꿈을 듣기 위해 돌아온다. 아이들과 선원들의 기도소리를 듣고 싶어서 돌아온다.
서점 바닥은 딱딱하다. 벽도 지붕도 딱딱할 것이다. 이 서점의 딱딱한 벽안에는 정신이 담겨있기도 하다. 월리엄 블레이크와 1912년 하지 축제날에 엽서를 썼던 여인과 송 콜롬바와 필경사들이 모두 이곳에 있다. 물론 나란히 똑바로 꽂힌 책들은 정돈된 삶이요. 알파벳으로 포정 된 삶의 선택들이다. 곧, 책이란 읽을 수 있도록 만들어진 우리의 삶아다. 하지만 그 어떤 책도 공건을 만나는 것, 좁은 문 뒤에 숨은 이 눈부신 빛을 만나는 것에 비할 수 없다.(54쪽)
《리틀 기딩》, 리키스서점, 인버네스, 스코틀랜드
서점 안은 매우 고요했다. 서점의 저 높은 곳이 매우 고요했다고 말하는 게 맞은 성싶다. 고요가 1층으로부터 위로 점점 물러서다가 지붕 서까래와 아치형 창문에 막혀 오도 가도 못하는 듯했다. 고요는 금빛으로 반짝이는 나무 벽과 층계 난간에, 무엇보다 저 멀리 시야 너머로 있는 책장의 시집들에 갇혔다. 나는 시집이 있는 위층을 올려다보고는 마지막을 위해 그곳을 남겨두었다. 1층에도 보고 들을 게 너무나 많았다.(60쪽)
엘리엇은 치유를 약속하며 시를 끝맺었다.
우리의 모든 탐색의 끝은
우리가 시작했던 곳에 도달하는 것
그리고 그곳을 처음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리키스서점처럼 때로 한 권의 책으로 영원히 기억에 남는 서점도 있다.(64쪽)
불 켜진 무대, 스미스서점, 안티구아 스트리트 1번지, 에든버러
나와 또다른 나, 나와 망명지를 배회하는 나, 나와 이해할 수 없는 나 사이의 다리에는 그러한 변모의 순간이 펼쳐지기 마련이다. 그 모든 것이 어디에서 시작되었는지 알고 싶다면 갈매기가 날아다니는 부두 근처의 거무스름한 작은 석조건물에 자리 잡은 서점 진열창의 불 켜진 무대를 떠올리면 될 것이다.(86쪽)
배우와 그의 서점, 그리고 새뮤얼 존슨과 제임스 보즈웰, 토머스데이비스서점, 러셀 스트리트 8번지, 코벤트 가든, 런던 1763년
보즈웰과 존슨이 함께 지낸 시간은 고작 270일이지만 《새뮤얼 존슨의 생애》는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정신과 자아를 만나 진정하고 엄정하게 교류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훌륭한 사례다. 그렇게 서로 다른 두 지성이 만나, 그토록 깊이 교류한 순수한 기록은 어디에도 없을 것이다. 그 기록 속에서 두 사람은 살아 있을 때처럼 생생하게 남아 있다. 데이비스의 서점에서 대화를 나눈 지 며칠 후에 보즈웰이 존슨의 집을 방문했고, 두 사람 사이의 위대한 대화가 시작되었다. 물론 두 사람 중 그 누구도 그들의 만남이 어떤 결실을 맺을지 결코 예측하지 못했지만 말이다.(139쪽)
시 읽는 정원, 킹스서점, 칼란더, 스코틀랜드 서점으로 돌아오니 서점 안은 9월의 긴 해가 비치는 바깥보다 조금 어두웠다. 사람들은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그들은 만난 지 얼마 안 된 내게도 말을 걸어왔다. 강렬한 에너지가 서점을 휘감는 듯했다. 나는 문득 서점 유리창에 붙은 문구가 기억났다. “그게 바로 당신이 여기에 온 이유!” 이제야 나는 그 답을 찾은 듯했다.(163쪽) 아일랜드에서 존재하는 법, 케니스서점, 골웨이, 아일랜드 꼭대기 층에는 앉을 수 있는 작은 의자도 있었는데, 그중 한두 개는 붉은 빛이 도는 황금빛 커버로 쌓여 있었다. 이 다락의 책들은 알파벳순으로 배열되어 있지 않다. 그렇다고 분야별로 꽂혀 있지도 않다. 이 책들이 알고 있는 것이라고는 오직 시간뿐이다. 그래서 동시대에 발간된 책들이 나란히 어깨를 기대고 꽂혀 있다. 그중에는 친구도 있고, 적도 있을 것이다. 가장 값비싸고 희귀한 책들은 엷고 투명한 시트지로 고이 쌓여 있다. 오래되고 유명한 책이란 뜻이다. 존싱, 제임스 조이스, W. B. 예이츠, 오스카 와일드, 사뮈엘 베케트, 극작가 브라인언 프리엘… 같은 사람들의 손에서 탄생한 책들. 케니스서점은 목록을 들고 와서 책을 무겁게 사들고 가는 곳이 아니다. 한두 권이면 족하다.(189쪽) 케니스서점의 문에는 엮은 바구니가 걸려 있었다. 판매용으로 걸어둔 게 아니라 옛날에 바구니 제조를 생업으로 삼았던 이 마을에서 풍요를 기원하는 방식이라고 했다. 서점 안은 풍요롭고 충만했다. 내가 평생 고르고 볼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책들, 많은 그림들, 카드들, 소책자들, 책을 쓰기 위한 종이들, 메모하기에 좋은 공책들, 가죽양장에 도금을 하고 새틴 리본을 단, 행복한 미래를 기록할 일기장들이 있었다. 시간이 더 있었으면, 무한한 시간이 있었으면 하고 바라게 되는 곳이었다. 시간만 더 있다면 어느 구석에 앉아 구경하고 읽고 사고 다시 일고 떠났다가 다시 돌아올 텐데. 여름이면 서점에 햇살이 따라 들어왔고, 겨울이면 책들이 제자리에 조신하게 꽂혀 있었다. 서점이 평화와 고요에 잠기는 크리스마스만 빼고.(191쪽)
오래된 빛, 아틀란티스서점, 런던
플라톤의 뱃사람들은 아틀란티스 섬이 얼마나 빛났는지 평생 잊지 않았다고 한다. 그들은 아틀란티스 사원들의 은장식과 금첨탑이 어땠는지, 온통 상아와 금으로 지어진 내부가 어떤 모습이었는지, 황동과 구리가 얼마나 번쩍였는지 기억했다. 세상의 모든 신비로운 장소처럼 그곳에 도달하려면 시련과 시험의 공간을 거쳐야 했다.(199쪽)
서점 안에 들어서니 따오기 머리를 한 고대 이집트의 신, 토트가 서 있었다. 토트는 언어의 힘으로, 말의 힘으로 자신을 창조한 신이다. 그는 글을 고안했고, 마법을 창조했다. 그런 의미에서 글쓰기와 마법은 하나로 연결된 재능이다. 또한 그는 신들의 전령, 곧 헤르메스이자 신들의 서기였다. 그는 말을 하는 자이자 글을 쓰는 자였다. 게다가 사자死者들의 심판관으로, 저울 위의 깃털 하나와 영혼의 무게를 비교하는 일도 했다. 그날 아틀란티스서점에 서 있던 토트 상에는 가운데 선반에 꽂힌 가지각색의 책들이 비쳤다. 빛은 곳곳에서 나왔다. 천정에서도, 장식전등과 램프에서도, 반짝이는 유리 액자에서도 나왔다. 서점 뒤편에는 책상이 하나 있었고, 책상 위에 서류와 꼬리표 달린 책들이 무겁게 쌓여 있었다. 주인은 그곳에 앉아 있다. 밝은 색 옷을 입은 그녀가 내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내가 문을 열고 들어선 이곳은 어떤 세상일까?(200쪽)
음악을 틀지는 않았지만 나는 그 큰 공간에서 리듬을 느꼈다. 어쩌면 내 심장의 리듬이었는지 모른다. 어쩌면 서점의 리듬이었는지도. 누군가 배달을 오고 사인을 하고 정리하는 듯한 소리가 났다. 하지만 일단 문이 닫히고 나자 서점은 다시 혼자서 출렁이는 바다가 되었다.
아들이 부탁한 책이 다 포장되었다. 이제 가야 할 시간이다. 그런데 들고 갈 책이 너무 많았다. 결국 그 아름다운 책들을 우편으로 보내기로 했다. 내 주소가 조용한 서점에 울려 퍼졌다. 지상에서의 나의 거처와 이곳의 마법이 서로 닿는 순간이었다.
나는 세상의 이미지, 이마고 문디에서 그게 어디쯤일까 생각해 보았다.(204쪽), 끝.
※ 『오래된 빛, 나만의 서점』에 나오는 인상적인 문구로 서평을 대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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