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서 깊은 고장 능주, 죽수서원을 가다
조광조유허비에서 마을길을 돌아 택시회사가 있는 입구로 나왔다. 마을은 시골답지 않게 제법 컸다. 능주가 어떤 고장인 지는 큰 규모의 마을에서 금세 가늠할 수 있다.
능주는 조선시대에 인조의 어머니인 인헌왕후의 고향이라고 하여 한때는 목으로 승격되기도 했다. 인근에서 가장 세력이 큰 고을이었던 능주는 지금도 시골치고는 대촌을 이루고 있고 비록 화순에 속해 있지만 나이 든 사람들은 뿌리 깊은 고장에 대한 독특한 자존심을 지니고 있다.
오후가 길어지자 날은 무척 더웠고 햇살은 점점 뜨거워졌다. 죽수서원까지는 왕복 6km, 영벽정까지 걸을 작정이라 일단 죽수서원까지는 택시를 타기로 했다.
마을을 빠져나와 철길을 가로질러 지석천을 건너자 산기슭 아래로 멀리 홍살문이 보였다. 택시비는 4000원. 층층 놓인 층계를 따라 오르니 깊은 숲에 둘러싸인 서원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곳 역시 적막하기 이를 데 없었다. 조심스레 문을 열었다. 언덕 높이 사당이 올려다 보이고 양 옆으로 동서재가 자리하고 있었다.
사당인 천일재는 굵직한 기둥이 도열하여 엄숙하고 엄숙했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죽수서원은 깊은 골짜기에 자리한 듯 경건했다. 그리고 고요했다.
죽수서원(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130호)은 1570년(선조 3)에 사액서원으로 지어져 문정공 정암 조광조 선생을 모셨다. 1630년(인조 8)에는 혜강공 학포 양팽손의 위패를 추가로 모셨다. 양팽손은 능성현 출신으로 조광조와 함께 등용되어 강론했고 그가 세상을 뜨자 제사를 지냈다.
서원은 1868년(고종 5)에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어 제단만 남았던 것을 1971년 도곡면 월곡리 학포 부조묘 옆에 지었다가 1983년 현재의 위치에 다시 복원했다.
흔히 조광조는 시대를 앞서간 개혁가지만 너무 저돌적이고 급진적인 개혁정치를 추진해서 실패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도 그렇지만, 역사는 기득권 세력이 스스로 물러서는 법은 결코 없음을 보여주고 있다. 조광조는 선조 초에 신원되어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광해군 때에 이르러 문묘에 배향되었다.
추천은 새로운 여행의 시작, 오른쪽 '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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