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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관 옆 박물관

바람의 소리, 옛 미술관을 찾다

 

 

 

바람의 소리, 옛 미술관을 찾다

- 모처럼의 여행, (옛) 바람흔적미술관

 

경남 합천군 가회면 중촌리 대기 마을.

이 외진 곳은 이젠 대처가 되었다.

철쭉제로 이름을 날리게 된 황매산을 거들먹거리지 않더라도

기묘한 바위산 모산재와

그 아래 고즈넉이 자리한 영암사지로도 알음알음 알려졌다.

 

봉창 넷(나무실 마을)

 

중촌리. 이 일본식 이름은 유학이 깊은 고장에 어울리지 않는 이름이다.

모처럼의 외출이다. 눈을 감아도 선명하게 그려지는 이곳은 여행자의 고향이다.

하얗게 꽃을 피운 오도리 이팝나무를 지나 고갯마루를 오르면

한 폭의 동양화처럼 모산재가 펼쳐진다.

 

목곡으로 향했다.

원래 이곳은 '나무실'이라 불렸다.

얼마나 아름다운 이름인가, 나무실!

하는 일 없이 마을을 한 바퀴 돌았다.

지붕을 새로 인 집,

마당에는 잡풀이 무성했다.

봉창이 보였다. 대나무로 살을 댄 아주 예쁘장한 봉창은 모두 넷이었다.

바람만 드나들고 뭇짐승은 이곳을 에둘러 가야 했다.

 

 꽃잎

 

나무실 마을에서 한참을 머물다 도착한 미술관.

꽃잎이 우수수 바람에 떨어진다.

바위 위에 앉은 꽃잎...검은 바위에 하얀 그림자가 수북이 쌓였다.

바람흔적 미술관....

 

이바구

 

조용히 이바구했던 미술관은 폐허가 된 지 오래다.

커피 한 잔, 차 한 잔. 그저 양심대로 마시고 갔던 곳.

마음마저 떠나고 삐걱거리는 의자와 녹슨 난로만이 휑한 공간에 남아 있다.

 

 처음

 

주인 떠난 찻집 주방에는

아직도

바싹 마른 그릇이며,

물이 나오지 않는 싱크대며,

가스 없는 가스레인지가 그대로 놓여 있다.

'처음처럼' 다시 돌아갈 수는 없을까.

 

 

 

우두커니 빈 찻집에 앉아 있으니 배가 고프다.

마당 한켠 나무 그늘 아래의 책상 하나, 의자 하나.

나만의 소박한 밥상을 차렸다.

식탁에는 아내가 싸준 빵, 토마토, 참외, 딸기주스가 전부였다.

나 홀로 먹는 작은 성찬은 봄볕에 퍽이나 눈부셨다.

 

 바람

 

불쑥 나온 배가 달팽이처럼 꼬인 계단을 위태롭게 오른다.

녹슨 계단의 난간을 꼭 부여잡으며...오른다.

 

 모산재와 한밭 마을

 

옥상에 오르니 모산재와 인근 풍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산중의 제법 너른 땅에 자리한 대기 마을은 그 자체로 자연이다.

어릴 적 우리는 대기마을을 '한밭'이라 불렀다. 아름답지 않은가.

 

살기 좋은 마을로 뽑혀서인지

지금은 외지인들의 화려한 집들이 숲속 군데군데 들어와 있다.

촌로들은 무슨 상관이냐, 며 그저 마을 정자나무 아래에서 가난한 낮잠을 잔다.

 

 미술관

 

어느 해,

미술관의 주인은 남해로 갔다.

모산재 기슭 산중 호수 아래 있던 미술관은

남해 바닷가 호수 언덕배기로 둥지를 옮겼다.

 

주인은 떠났어도 문은 열려 있다.

살며시 들여다보았다.

습기 가득한 퀴퀴한 냄새가 부재를 말해줄 뿐이었다.

 

흔적

 

바람흔적 미술관,

그 이름처럼 이곳에는 바람개비가 많았다.

지금은 녹이 슬어 바람이 불 때마다 삐걱삐걱 소리를 낸다.

여행자는 이곳에서 '바람흔적'이라는 말을 되뇌었다.

 

 폐허

 

처음 바람이 소리를 만난 지도 벌써 십 년이 넘은 것 같다. 경북 봉화의 깊은 산사 찻집에서 여행자는 시 한 구절을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바람이 소리를 만나면

꽃이 필까 잎이 질까

아무도 모르는 세계의 저쪽

아득한 어느

먼 나라의

눈 소식이라도 들릴까

 

바람이 소리를 만나면

저녁 연기

가늘게 피어 오르는

청량의 산사에 밤이 올까

창호문에 그림자

고요히 어른거릴까 ....

 

- <바람이 소리를 만나면>, 지현 스님


다시 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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