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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관 옆 박물관

예술품 같은 이것이 백제의 소변통이라고?



백제 때의 남녀 변기 이렇게 생겼다
진귀한 유물이 너무 많은 국립부여박물관

부여에 왔습니다. 예전에 몇 번 와 본 곳이지만 여전히 낯섦이 있는 고장입니다. 백제의 회한과 서러움이 깊었는지 폭우가 내렸습니다. 한 치 앞을 볼 수 없는 절망은 예나 지금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다만 인간에 의한 것인지, 자연에 의한 것인지만 구분될 뿐 인간이 느끼는 건 시공간을 초월해 같은 것 같습니다.

한, 중, 일 출판인 세미나 차 왔는데, 서둘러 왔더니 아직 접수시간이 한 시간 정도 남아 있었습니다. 폭우가 와서 마땅히 갈 만한 장소도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이리저리 곰곰이 생각하다 인근에 있는 국립부여박물관으로 차를 몰았습니다. 다행히 박물관은 열려 있었고 입장료도 무료였습니다.

                           한국식동검

진귀한 유물이 많은 부여박물관

전시실은 모두 세 곳이었습니다. 백제와 부여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국립으로 지정된 박물관은 그 격에 맞게 규모와 특성이 있습니다.

한국식동검에 눈이 갔습니다. 검이 가늘고 뾰족하여 '세형동검'이라고도 불리는 검입니다. 이 검은 중국 요령지역에서 유행한 ‘요령식동검’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습니다. 요령식 동검은 비파 모양을 닮아 '비파형 동검'으로 불리기도 합니다. 이 둘은 중국식동검과는 달리 검과 손잡이를 따로 만든 후 조립하여 사용합니다.

한국식동검은 금강 지역에서 처음으로 나타나는데 주로 돌널무덤에서 출토되고 있습니다.

                                 거친무늬거울

거울 주위로 하트 모양이 생겼습니다. 빛과 거울이 만든 형상이 신비함을 자아냅니다. 과거와 현재가 만나는 것을 이렇게 표현할 수도 있겠구나 싶습니다. 이 거울은 '거친무늬거울'입니다. 뒷면이 세모 모양의 무늬 등 굵은 선으로 이루어진 거울을 말합니다. 별무늬나 번개무늬 등이 표현된 뒤와는 달리 앞면은 매끈하여 거울로 쓰는 것입니다.

                           남근형목간

남근형목간과 남근형파수

전시관에는 유독 목간이 많습니다. 능산리절터에서 주로 발견된 목간은 6세기 후반의 것으로 추정하는데, 주로 불교의례나 제의, 문서행위 등을 기록하던 나무입니다. 그중에서도 특징적인 목간이 눈길을 끕니다. 남성의 성기 모양을 닮은 '남근형목간'입니다.

나쁜 기운을 막기 위한 주술적인 용도의 이 목간에는 '도연립道緣立'이라는 글이 보입니다. 길가에 세운다는 뜻입니다. 도성 바깥에서 사악한 기운이 들어오는 것을 막는 일본의 '도향제道饗際'와 관련지어 설명하기도 하지만 왕성한 생명력을 바탕으로 사악한 기운을 물리치는 의례인 민간신앙 남근숭배사상으로 추정하기도 합니다.

남근형파수

'남근형파수도' 보이는군요. 파수가 뭐냐고요. '파수
把手'는 쉽게 말해 그릇 따위의 손잡이를 말합니다. 이 유물은 마한의 것으로 제사유적에서 나왔다고 합니다. 그 전체를 볼 수는 없으나 제례의식 등에 사용되었던 용기의 손잡이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생산과 풍요를 기원하는 신앙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백제의 면직물(좌)과 백제인의 머리카락(우)

문익점보다 800년 빠른 백제의 면직물

한참 둘러보고 있는데 이번에는 아주 진귀한 물건이 보입니다. 바로 '면직물입니다. 유물은 수장고에 있고 사진만 있는데 '문익점보다 800년 빠른 백제의 면직물'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능산리절터 서쪽 돌다리의 백제 유적층에서 발굴되었는데, 제작연도가 567년인 '창왕명사리감'과 함께 출토된 것을 감안하면 문익점이 원나라에서 목화씨를 갖고 들어왔다는 14세기보다 800년이나 앞선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목화에서 실을 뽑아 직조한 직물로 보고 있는데 중국과는 다른 강한 꼬임의 위사緯絲(씨실-가로 놓인 실)를 사용하여 백제만의 독창적인 방식으로 제작되었습니다.

백제의 나무빗

그 옆에는 백제인의 머리카락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능산리절터에서 나온 것입니다.
절터에서는 머리카락과 함께 나무빗도 발견되었습니다. 세월에 틈이 메워졌지만 아직도 그 촘촘함을 엿볼 수 있습니다.

여자변기

이것이 백제의 남녀변기였다고?
전시실 한 편에 별도로 전시된 두 토기가 눈길을 끌었습니다. 왜 다른 토기와 따로 전시되었나 싶어 가까이 다가갔습니다. 놀랍게도 그것은 '남녀변기'였습니다. 여성의 변기는 그냥 '변기
便器'라 표현하였지만 남자의 변기는 원래 '호자虎子'라는 이름이 있었습니다.

남자변기 호자

호자라 불리는 이 변기는 1979년 부여 군수리에서 출토되었습니다. 호랑이의 모습을 한 동물이 앉아 있는 모습입니다. '만약 '변기'라고 적혀 있지 않았다면 누구도 그 용도를 알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변기라는 걸 알고 나서도 얼핏 보아서는 이게 무슨 변기인가 하고 의아해 여길 수 있습니다.

남성용 소변기로 추측하는 이유는 중국 남조의 청자로 만든 것들이 발견되었고 문헌에 소변기라 쓰여 있었기 때문입니다. 옛날 중국에 기린왕이라는 신선이 호랑이 입을 벌려 오줌을 누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집니다.

입을 크게 벌리고 앞다리에 힘을 잔뜩 준 호랑이는 비록 간결하고 해학적인 느낌을 주지만 포효하는 자세는 흐트러짐이 없습니다. 들어 올린 꼬리는 길게 늘어져 자연스럽게 손잡이가 되었습니다. 새끼 호랑이 모양을 하고 있어 '호자虎子'라고 부른 듯합니다.

장군

백제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제3전시실에서 관람은 끝이 났습니다. 아, 물론 야외 전시장이 남았군요. 3전시실 옆에는 박만식 교수가 기증한 토기들이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장군'이 보입니다. 흙으로 빚은 것이지만 그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습니다. 술이나 간장 따위를 옮길 때에도 쓰이지만 흔히 '오줌장군'으로 많이 알려져 있지요.

연꽃무늬 수막새

부여박물관은 볼거리가 너무 많았습니다. 하기야 678년 백제의 역사에 비한다면 너무나 적은 유물이겠지요. 그럼에도 남아 있는 유물들은 하나같이 감탄을 자아냅니다. 관람하는 내내 혼자 탄성을 지르다 탄식을 하곤 했었습니다. 비는 계속 내리고 여행자의 부여박물관 이야기도 계속 될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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