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산사에 머물다

이렇게 좁은데도 참으로 장쾌하구나!!




깊은 산속 장쾌함에 가슴이 벅찬 산사, 안성 석남사

안성 일대에서 제일 높다는 서운산의 남쪽 기슭에는 청룡사가 있다. ‘청룡이 상서로운 기운을 타고 내려온’ 서운산에는 또 하나의 고찰이 있으니 용주사의 말사인 석남사가 그것이다. 지금이야 이렇다 할 전각도 없는 작은 절이지만 오랜 세월과 역사를 간직한 그 자태는 녹록하지 않다.

석남사 석탑(향토유적 제19호)

석남사는 통일신라 문무왕 20년(680)에 고승 석선이 창건했다. 그 후 가지산문의 2조인 염거국사가 중창했고, 고려 광종 때에는 혜거국사가 크게 중건하여 수백 명의 승려들이 머무는 등 이름 높은 스님들이 이 절을 거쳐 갔다.

조선 초기 불교를 억압할 때 전국에 있는 사찰을 통폐합했는데, 이때 안성군을 대표하는 자복사찰이 되었을 정도로 명찰이었다. 세조는 친필교지까지 내려 ‘석남사에 적을 둔 모든 승려의 사역을 면하여’ 수도에 전념하도록 했을 정도였다. 임진왜란 때 불타버려 해원이 중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석남사 가는 길은 호젓하다. 다소 가파른 배티고개를 넘어 좁은 산길로 접어들면 계곡물 소리 청량한 석남사에 이르게 된다. 절 바로 아래까지 차를 가지고 갈 수도 있으나 아래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계곡을 따라 천천히 걷는 것도 좋다. 그래봐야 10분이다. 다만 더운 여름에는 얼굴로 바로 내리쬐는 뜨거운 햇빛이 조금 곤욕스럽기는 하지만.


주차장에서는 시청 직원들이 단속 중이었다. 차들을 세운다. 사실 두어 대밖에 없었지만 말이다. 계곡을 깨끗이 보존하기 위해 음식을 먹거나 입욕을 하는 행위를 단속하고 있다고 했다. 그러고 보니 아이들이 정성스럽게 써서 붙인 글들이 전신주에 보였다.

금광루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힐 즈음 석문사에 도착했다. 입구에 있는 사무소에서 푸근한 인상의 직원이 문을 열고 나오며 묻는다. “혼자 오셨어요?” 그렇다고 하니 절과 마애불 안내를 해주겠다고 한다. 알고 보니 문화해설사였다. 고마운 일이었지만 정중히 사양했다. 나중에 부족한 부분이 있으면 그때 물어보겠다고 하면서.


금광루 아래를 지나 층계를 오른다. 조금씩 드러나는 절의 모습이 묘한 긴장감을 준다. 흡사 부석사 안양루 아래를 지나 무량수전에 오르고, 내소사 봉래루 아래를 지나 대웅전을 올려보는 것 같다. 제일 높은 곳에 대웅전은 자리하고 있었다. 층계를 중심으로 좌우로 건물들이 들어 서 있다.


영산전에 먼저 들렀다. 보물 제823호로 지정된 영산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건물이 크지 않음에도 팔작지붕이다. 영산전은 석가모니불과 그의 일대기를 그린 팔상도를 모신 불전인데, 이곳에는 16나안도 함께 봉안하였다. 영산전은 조선 초기에서 중기 사이의 건축양식으로 인해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앞에서 보면 높은 축대 위에 있지만 옆에서 보면 오래된 석탑을 곁에 두고 다소곳이 자리하고 있다.

영산전(보물 제823호)

영산전 옆 돌계단 좌우에 있는 2기의 아담한 석탑은 원래 절 아래쪽에 있던 것을 1970년대에 이곳으로 옮겨왔다고 한다. 고려 때 탑으로 추정되는데, 탑 하나에는 감실이 있어 눈길을 끈다.

계단의 끝에 대웅전이 있다. 본래 영산전 아래에 있었다고 하는데 어찌 된 일인지 지금은 제일 높은 곳에 자리하고 있다. 대웅전에서 가장 눈길을 끈 것은 기둥 모퉁이에 있는 귀공포였다. 화려함의 극치임에도 왠지 조금은 징글맞으면서도 괴기스럽기까지 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 귀공포의 형태로 인해 대웅전은 원래 팔작지붕이었다가 후에 맞배지붕으로 고쳐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대웅전(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08호)

대웅전 안은 더욱 화려하다. 중앙에 모신 석가삼존불 위로 보기 드문 중층의 닫집이 보인다. 닫집은 흔히 천개
天蓋라고도 한다. 부처가 설법할 때 햇볕을 가리기 위하여 산개傘蓋를 사용하였는데, 이것이 후에 불상조각에 받아들여져 닫집으로 발전했다고 한다.

대웅전 내부 삼존불과 중층의 보궁형 닫집

이곳의 대웅전 닫집은 중층의 보궁형이다. 닫집은 크게 부처님 위 천장에 구름무늬와 용, 봉황 등을 연출하는 운궁형
雲宮形, 지붕을 천장 속으로 밀어 넣은 형태인 보개형寶蓋形, 독립된 집 모양인 보궁형寶宮形으로 나뉜다.

대웅전 앞에 서니 다소 비좁게 느껴졌던 처음의 생각은 간 데 없고 장쾌함에 가슴이 벅찰 정도였다. 마치 숲속에 깊이 숨겨진 보물이 빛을 만나 그 아름다움을 마음껏 발산하는 것 같다.

깊은 산중임에도 대웅전 앞에 서면 장쾌함에 가슴이 벅찰 정도다.

절마당 끝에서 산길로 들어섰다. “10분 정도면 충분합니다. 제 걸음으로도 10분 만에 갔다 옵니다.” 다시 만난 해설사가 마애불 가는 길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길은 제법 넓었다. 산속의 길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너무나 평탄한 길이었다. 울창한 숲이 짙은 그늘을 드리웠고 길옆으로 계곡물이 시원하게 흐르니 별천지가 따로 없었다.


마애불 가는 길

그렇게 10여분, 해설사의 말이 에누리 없었음을 알았다. 갈 之자로 산길이 한 번 휘어지더니 나무 사이로 마애불이 보였다. 불상 앞에는 치성을 드린 흔적이 여기저기서 보인다. 바위의 질감이 좋지 못하나, 마애불의 형상은 또렷하다. 깊이 합장을 한 후 잠시 숨을 골랐다.

암벽에 양각된 이 마애불은 높이 6m, 폭 8m의 바윗면을 가득 채워 5.3m의 마애여래입상을 조각하였다. 다소 형식적이고 지방적인 요소를 띠고 있어 통일신라 내지 고려 초기의 마애불로 보고 있다.

석남사 마애여래입상(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09호)

한 무리의 사람들이 숲에서 나왔다. 행색으로 보아 등산객은 아닌 듯하고 약초꾼처럼 보인다. 그들을 따라 앞서거니 뒤서거니 걷다가 부도밭에 이르렀다. 모두 5기의 석종형 부도가 있는데 그중 조선 후기에 세운 것으로 보이는 두 기가 향토유적 제28호로 지정되어 있다.



김천령의 여행이야기에 공감하시면 구독+해 주세요
 * 이 포스트는 blogkorea [블코채널 : 김천령의 풍경이 있는 한국기행]에 링크 되어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