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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사에 머물다

안성 청룡사에 가거들랑 이것 꼭 보세요



안성 청룡사에 가거들랑 이것 꼭 보세요.

제법 너른 들이 골짜기를 만나니 뜨거운 햇살도 한풀 꺾이는 듯하다. 금방이라도 온몸을 시원스레 적셔줄 것만 같은 푸른 저수지를 지나니 이름도 익숙한 청룡사다. 절 입구 길거리에 사적비가 떡하니 버티고 있다. 숙종 46년(1720)에 청룡사를 중수하고 이를 기념하여 세운 비석이다.


청룡사 대문에는 사천왕상도, 금강역사상도 없다

청룡이 구름을 타고 내려오다

청룡사는 고려 원종 6년(1265)에 명본국사가 창건한 절로 본래 대장암이라 불렀다고 한다. 고려 말에 나옹화상이 크게 중창하면서 청룡사라 불리게 되었다. 나옹화상이 이 절을 중창할 때 하늘에서 꽃비가 내리고 상서로운 구름이 일면서 청룡이 구름을 타고 내려오는 것을 보았다 하여 청룡사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풍수설에 따르면 절이 선 자리가 청룡의 형상과 같다고 하여 청룡사가 비롯되었다고도 한다.


청룡사 하면 바우덕이와 남사당패

개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청룡사와 민가가 있다. 개울 이쪽의 민가는 남사당 마을이다. 청룡사 하면 남사당패를 자연 떠올리게 마련이다. 황석영의 소설 <장길산>도 이곳 안성을 그냥 지나치지 못했다. 남사당의 고단한 삶의 애환을 한바탕 어우러져 풀어내야만 했던 곳, 그곳이 안성이었고 청룡사였다.


인평대군의 원찰이기도 했던 청룡사는 조선 후기에 등장한 민중놀이패 남사당의 근거지였다. 이들은 청룡사에서 겨울을 난 뒤 봄부터 추수가 마무리되는 가을까지 전국을 떠돌며 연희를 팔며 생활했다. 청룡사에서 내준 신표를 챙겨들고 떠돌다가 다시 추운 겨울이 되면 둥지로 찾아오는 떠돌이였다.


이 남사당의 우두머리로 유명한 이가 바우덕이다. 원래 남사당은 남자들로 구성되어 있었다고 하나 안성 남상당패는 꼭두쇠 자리에 여자인 바우덕이를 앉혔다. 이후 바우덕이가 이끄는 남사당패는 전국적인 명성을 얻게 되고 마침내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노역자를 위로하고자 안성 남사당패를 불러 거방지게 놀이판을 벌였다.

그때 뛰어난 공연을 인정받아 바우덕이는 흥선대원군으로부터 정3품 이상이 사용하던 옥관자를 하사받는다. 바우덕이는 이후에도 전국을 떠돌다 힘든 유랑 생활 속에서 병을 얻어 죽었다고 한다. 청룡리 어느 개울가에 묻혔다고 하는데 지금 와서 보니 인근에 바우덕이의 묘라는 표지판이 보였다.




금강역사가 없으면 절은 누가 지키나

‘서운산 청룡사’라고 적힌 문간채(안내문에는 사천왕문으로 표기되어 있다.)가 소박하다. 특이한 것은 사천왕문에 사천왕상이 없다는 것이다. 아무리 살펴봐도 대갓집의 행랑채처럼 벽으로 막혀 있을 뿐 금강역사 그림도 없다. 어떤 연유일까. 거기에 대한 의문은 나중에 대웅전에서 풀렸다.

대웅전 양쪽 추녀 끝에 금강역사가 칼을 들고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사찰로 들어오는 모든 잡귀와 악귀를 물리치는 금강역사상은 대개 사찰의 대문격인 금강문에 있다. 금강문이 없는 사찰은 천왕문이 대문 역할을 대신하여 금강역사를 모시기도 하고 영광 불갑사처럼 금강역사상이 아닌 그림을 그려놓기도 한다. 그런데 이곳처럼 아예 사천왕상도, 금강역사상도 없는 경우는 드문 편인데, 추녀 끝에 금강역사를 그려 넣음으로써 잡귀의 침입을 막고 부정을 다스리는 묘안을 짜낸 것이 아닌가 조심스럽게 추측해본다.

대웅전 추녀 끝의 나라연금강

절마당에서 보니 오른쪽엔 입을 굳게 다문 ‘밀적금강’, 왼쪽 추녀에는 입을 벌린 채 공격 자세를 취하고 있는 ‘나라연금강’이 그려져 있었다. 이것이 아마 사천왕문에 아무런 조각상이 없는 이유가 아닐까 짐작해본다. 천왕문에 사천왕상이 없고 별도로 금강문이 없으니 대웅전 추녀 끝에 금강역사를 그려 부처님을 외호한 것일 게다.

대웅전 추녀 끝의 밀적금강


그 천연덕스러움에 홀딱 반한 대웅전 기둥

절 안에는 대웅전 좌우로 명부전, 산신각, 관음전 등이 있고 명본국사가 세웠다는 삼층석탑이 가운데에 덩그러니 있다. 절의 전체 규모는 아주 소박한데 비해 대웅전은 유독 웅장하다. 정면 3칸, 측면 4칸의 구조에서 오는 웅장함도 있겠지만 층층 잘 쌓은 기단과 맵시 좋은 양 처마 끝, 날개를 활짝 편 듯한 팔작지붕, 자연스런 굵직한 기둥들로 인해 더욱 장엄해 보인다.


특히 눈길을 끈 건 대웅전 기둥이었다. 사방을 받친 튼실한 기둥은 자연목을 그대로 썼다. 굽은 것은 굽은 대로, 기둥으로 세운 천연덕스러움이 살아 있다. 구불구불한 아름드리나무를 가지와 껍질만 자르고 벗긴 채 나뭇결을 그대로 살렸다. 청룡사 대웅전 기둥의 자연스러움은 개심사 범종루의 그것과 견줄 만했다.


법당 정면의 처마 밑으로 내달린 공포 장식도 눈여겨보아야 한다. 소의 혀와 같이 생긴 장식인 쇠서의 윗몸에 그려진 청․황․백색의 연봉오리들은 비록 색이 바랬지만 눈길을 끈다. 대웅전은 이처럼 화려한 꽃과 연꽃 문양으로 가득하고 문설주 위의 부처님들은 무언의 설법을 하고 있다.

대웅전 문설주 위의 부처님과 공포 쇠서에 그려진 청․황․백색의 연봉오리

대웅전의 장엄함은 외부뿐만 아니라 화려한 내부에서도 느껴진다. 석가모니불을 모신 법당 안은 서까래를 그대로 노출시킨 연등천장으로 그냥 보기에도 시원스럽다. 불상 위 닫집의 치장이 화려하다.

대웅전 불단과 사인비구가 만든 동종

자신의 작품이 모두 보물이 된 승려 사인이 만든 동종

대웅전에는 18세기의 뛰어난 승려이자 장인인 사인비구가 만든 동종이 있다. 보물 제11호인 동종은 강화 동종, 홍천 수타사 동종 등 사인비구가 만든 8구 종 중의 하나로 가장 전통적인 신라 범종의 형태를 갖추고 있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가 만든 동종은 모두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한 사람이 만든 작품이 모두 보물로 지정된 경우는 처음이다.



청룡사 입구의 사적비

사적비에서 다리를 건너 부도군으로 향했다. 길을 따라 얼마간 가니 바우덕이 사당이 보였다. 한글로 적힌 현판이 퍽이나 어울리는 사당이다. 아무도 찾지 않는 이곳 불당골. 안성 남사당패의 본거지였고, 바우덕이가 기예를 익힌 곳이었다. 뜨거운 햇살에도 사당 앞을 한참이나 서성거렸다.

불당골의 바우덕이 사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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