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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사에 머물다

남원시 한복판에 자리한 고요한 선원사



남원시 한복판에 자리한 고요한 사찰, 선원사

춘향전이 아니더라도 남원은 ‘전통’의 상징으로 사람들의 뇌리에 깊이 박혀 있다. 지금도 도시 곳곳에서 예스러운 풍경을 쉽게 만날 수 있다. 예부터 남원 일대의 여덟 가지 빼어난 풍경을 꼽아 남원팔경이라 하였다. 그 중 남원을 대표하는 만복사와 선원사가 팔경에 속해 있다. 수백의 승려가 아침에 시주 받으러 갔다가 저녁에 돌아올 때의 행렬이 장관인 만복사귀승萬福寺歸僧과 해질녘에 은은히 들려오는 선원사의 종소리를 꼽는 선원모종禪院暮鐘이 그것이다.

만행산 선원사

'해질녘 종소리’가 아름답다는 선원사는 일반의 생각처럼 산에 있을 법하지만 실은 남원 시내인 도통동에 있다. 여행자는 이 절을 몇 번이나 다녀갔었다. 그럼에도 아직 글 한 줄 남기지 못했다. 종종 가는 편이라 ‘다음에 적지 뭐’ 하다가 늘 습관처럼 빠뜨리곤 했었다.

연리지

도심 가운데 사찰이 있다는 게 오늘날의 시선으로서는 약간 의아할 수도 있겠지만 초기 우리나라의 불교사찰은 대개 평지에 있었다. 평지사찰에서 산지사찰로 옮겨가는 과도기의 사찰이 불국사라면 평지사찰에만 있던 회랑이 왜 불국사에 있는지를 이해하게 된다.


아파트와 주택가에 둘러싸인 선원사 옆으로는 대로가 있다. 차들이 씽씽 달리는 도로가 바로 옆인데도 절 안에 들어서면 이내 사위가 조용하다. 가지가 붙은 느티나무 두 그루가 눈길을 끈다. ‘만행산 선원사’라는 현판이 달린 문을 들어서면 대웅전과 약사전, 칠성각, 명부전 등이 자리한 조촐한 경내가 나타난다.

약사전과 대웅전

소담한 경내와는 달리 이 작은 절의 속은 옹골차다. 전북 유형문화재 제119호인 약사전과 그 안에 모신 보물 제422호인 철조여래좌상, 전북 문화재자료 제45호 대웅전과 그 안에 있는 전북 유형문화재 제25호인 동종이 있다.

대웅전(전북 문화재자료 제45호)과 명부전

이 유산들만 보아도 예전에는 제법 큰 절이었음을 알 수 있다. 한때 만복사에 버금가는 큰 사찰이었으나 정유재란 때 만복사와 함께 불타 버린 뒤 영조 30년(1754)에 다시 짓고 철불을 약사전에 모셨다고 한다.

선원사약사전(전북 유형문화재 제119호)

신라 헌강왕 1년(875)에 도선국사가 세운 선원사는 처음 진압사찰로 창건하였다고 한다. 도선국사가 남쪽의 산천을 유람하다가 남원에 이르러 지세를 살펴보니 객산인 교룡산이 힘이 세고 주산인 백공산이 너무 허약하여, 지세를 돋우고자 선원사를 비롯하여 만복사, 대복사를 창건했다는 설이 있다. 선원사가 자리한 백공산은 만행산의 한 줄기에 불과한데 굳이 만행산이라 한 것은 큰 산의 힘을 빌려 교룡산의 기운을 누르고자 함이었다고 전한다.

선원사철조여래좌상(보물 제422호)

약사전에 있는 철조여래좌상은 높이 1.2.m 정도로 대좌와 광배는 없고 불신만 남아 있다. 고려 초기의 불상으로 추정되는데, 현재는 금칠을 하여 마치 금동불처럼 보인다. 동종은 대웅전 안에 있는데 높이 66cm 정도로 조선시대의 범종이다.

선원사동종(전북 유형문화재 제25호)

약사전 옆면, 사람 人자 모양의 맞배지붕으로 비와 바람을 막기 위한 풍판이 달려 있다

대웅전과 약사전은 둘 다 사람 人자 모양의 맞배지붕이다. 용마루와 처마의 선이 직선에 가까워 작은 건물임에도 무거운 느낌을 준다. 맞배지붕에 흔히 보이는 풍판이 옆에 달려 있다. 비와 바람을 막기 위한 용도이다. 약사전에는 철불을, 대웅전에는 완주 위봉사 보광명전의 주불을 옮겨 모시고 있다.

약사전 뒷벽에는 괘불이 있다

그 외에도 괘불이 약사전 뒤에 보관되어 있다. 대웅전 앞의 석탑은 1960년대에 세운 것으로 전해진다. 선원사는 남원의 역사와 함께해 왔다. 절이 도시 가운데에 있는 것이 말해주듯 예부터 남원시의 번영은 곧 선원사와 깊은 관계가 있다는 걸 보여준다.

대웅전 처마 밑 용조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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