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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

역사와 함께한 적상산 야생화 산행



역사와 함께한 무주
적상산 야생화 산

흔히 무주와 장수, 진안의 머리글자를 따서 지은 이름인 '무진장'을 일러 전라북도의 지붕'이라고 한다. 고원지대라는 지형적 특성과 생활문화가 엇비슷하기 때문에 이 지역을 하나로 묶어 표현한 것이다. 그 가운데에 큰 산인 덕유산이 우뚝 솟아 있다. 덕유산에서 서북쪽으로 적상산이 있다. 적상산은 예로부터 천혜의 요새로 알려져 있는데, 이곳에 있는 적산산성과 사고 터, 안국사가 그것을 말해준다.

덕유산 스키장 전경

적상산 산행은 오지여행가 눌산 최상석님의 <언제나 봄날> 펜션에서 시작되었다. 차로 양수댐까지 이동해서 사고 터, 안국사를 거쳐 다시 펜션까지 내려오는 동선이었다. 야생화 촬영이 주목적이어서 일행 중 일부는 차로 다시 내려가고 나머지는 산행을 하였다.

                                      너도바람꽃

첫 장소는 눌산님이 평소 아는 너도바람꽃 군락지였다. 난생 처음 야생화를 찍는 여행자는 몇 컷 누르지 않았음에도 숨이 턱에 찼다. 무릎은 저절로 까지기 시작했다. 이날 꽃에 대한 예의를 온몸으로 배웠다. 응달이라 아직 매서운 기운이 가시지 않아서 얼마 후 길을 떠났다.

산정호수

양수댐 전망대에 서니 바람이 세찼다. 아래로 수직으로 뚫린 긴 터널에서 나오는 소름끼치는 무서운 소리에 오금이 저렸다. 가지 끝에 매달린 겨우살이를 보지 않았다면 그 괴기함에 혀를 내둘렀을 것이다. 양수댐으로 인해 생긴 산정호수는 물이 메말라 있었다. 예전 이곳에 안국사가 있었다. 댐이 생기자 안국사는 옛 호국사 터로 옮기게 되었다.

사고

호수를 안마당 삼은 곳에 사고가 있다. 원래 사고가 있던 자리가 물에 잠기게 되어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고 한다. 조선시대의 사고제도는 원래 4사고 제도였다. 임란 전에는 읍성 안에 위치했던 외사고들이 임란 후에는 모두 깊은 산중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5사고체제로 변화하였다.

사고 봉안행렬도

5사고는 내사고인 춘추관사고와 외사고인 강화 정족산, 묘향산, 태백산, 오대산 사고로 시작하였다. 그러나 묘향산 사고는 후금의 위협에 그대로 노출될 수밖에 없는 지리적 위치와 관리 부실로 이내 폐지되었다. 이를 대신해서 생긴 사고 터가 바로 적상산성이다. 그리하여 이곳의 산성을 수리하고 묘향산의 실록을 이곳으로 옮겨왔다. 그 후 1910년 일제가 저들의 편의대로 사고의 실록을 서울로 옮기면서 이곳 사고도 황폐화되었다.


안국사는 옛날 적산산성에 있던 여러 절 중에 유일하게 남은 사찰이다. 절 앞쪽으로 적산산성이 벼랑을 따라 길게 늘어서 있다. 원래 안국사는 지금의 양수댐에 있었다. 안국사가 자리한 곳은 옛 호국사지였는데, 절 앞의 숲에는 조선 인조 때 전라감사였던 유명은이 창건비용을 부담하여 호국사를 지었다는 비각이 있다. 호국사는 사고의 보존을 위해 승군을 모집하기 위해 지었는데, 1949년 여순사건 때 불타 버렸다고 한다.


안국사는 보수공사로 다소 어수선했다. 동종에 잠시 눈길을 주었다가 경내로 들어섰다. 사고의 선원각을 옮겨왔다는 천불전에 눈을 내었다가 산길로 접어들었다. 절 뒤편의 산길을 오르던 중 고개를 돌려보니 절로 감탄사가 나온다.

안국사 전경

군더더기 하나 없는, 나무랄 데 없는 멋진 조망에 한동안 서 있었다. 덕유산 봉우리와 스키장에 아직도 남아 있는 눈이 봄을 더디게 했다.


산길은 부드러웠다. 간혹 능선을 넘나드는 바람이 볼을 시리게 했지만, 산정의 앙상한 가지에도 봄볕은 들어왔다.


앞서가던 일행들이 분주해진다. 복수초 군락이 나타난 것이다. 여행자의 눈에는 쉽게 띄지 않았는데, 야생화를 전문으로 하는 이들은 탄성의 연속이다. 발아래를 유심히 보니 노란 꽃이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하마터면 밟을 뻔했다.

복수초

복과 장수를 상징한다는 복수초는 눈 속에서 피어날 떄 가장 아름답다. 봄이 되면 꽃이야 지천에 피겠지만 복수초와 바람꽃은 그 전에 피니 더욱 진기하게 여겨진다.


야생화 사진을 찍는 것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내가 먼저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이지 않으면 꽃은 나에게 아는 척도 하지 않는다. 대상에 대한 존중, 그것이 소통의 기본이라는 걸 꽃은 말하고 있었다.

사진 한 번 찍고 허리 펴고
사진 한 번 찍고 한숨 짓고
사진 한 번 찍고 무릎 톡톡
사진 한 번 찍고 눈물 뚝뚝


일행 모두가 복수초에 빠져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이제 갑시다."라는 누군가의 말이 없었다면 하루 종일 꽃에 빠져 있었을 것이다. 산길은 평탄했다. 사방이 절벽인 적상산이지만 그 안은 부드러운 흙을 안고 있었다. 외강내유라고나 할까.

적산산성 서문 터 일대

흙길 앞에 갑자기 절벽이 나타났다. 적산산성 서문 터였다. 일명 용담문이라고도 했던 서문에는 2층 3칸의 문루가 있었다고 전한다. 성문 밖에는 곡창과 군기창인 서창西倉이 있었으나 지형이 험하여 성내로 운반하기가 힘들어 조정에 상소하여 성안의 사고지 옆으로 옮겼다고 전한다, 지금도 마을이름이 서창이라고 한다.

                                     장도바위

서문 터를 벗어나면 다소 가파른 내리막이다. 적상산은 원래 고려 말에 최영 장군이 군사를 훈련시키던 곳이라고 한다. 최영 장군이 적상산에 오르던 중 정상 앞에서 절벽 같은 바위가 길을 막고 있어 허리에 차고 있던 장도를 뽑아 바위를 힘껏 내리쳤더니 바위가 양쪽으로 쪼개지면서 길이 열렸다고 한다. 그래서 이 바위를 '장도長刀바위'라 부른다.

생강나무

절벽 내리막길은 이내 끝이 났다. 현호색도 봄맞이 준비를 하고 있었다. 생강나무가 노란 꽃을 하나씩 피우기 시작했다. 봄이 오기는 오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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