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산행

안개 속 선경을 자아낸 남해 금산의 진면목

 

 

 

안개 속, 남해 금산의 진면목에 절로 감탄이 나오다

 

예부터 '일점선도一點仙島'라 불린 남해섬, 한 점 신선의 섬인 남해에서도 제일을 치자면 단연 금산이다. 이성계가 이곳에서 백일기도를 올리고 왕위에 오르게 되자 그 은혜에 보답하고자 산 이름을 보광산에서 금산으로 바꿨다는 이야기는 너무나 잘 알려진 이야기이다.

 

 

해발 701m인 금산을 오르는 데는 여러 가지 길이 있으나 그 중에 제일 빠르고 편리한 방법은 복곡저수지 매표소에서 셔틀버스를 타고 보리암에 닿은 뒤 쌍홍문으로 내려와 상주해수욕장 쪽으로 하산하는 길이다.

 

 

여행자가 찾은 이 날은 안개가 자욱한 날이었다. 산 아래서부터 날씨가 흐리더니 오르면 오를수록 한 치 앞을 볼 수가 없었다. 앞사람의 흔적을 쫓아 한걸음씩, 한걸음씩 뗄 수밖에 없었다.

 

삼불암(가운데)과 상사바위(오른쪽 끝)

 

비탈이 심한 길을 힘겹게 오른 셔틀버스가 내려준 곳은 산 정상 부근, 대로처럼 뻥 뚫린 산길이 낯설다. 몸이 아프지 않았다면 이런 길을 택할 리는 없었을 것이다. 적어도 여행자의 관점에서는 말이다. 건데 보리암에 이미 들렀다가 내려오는 노인 분들은 한결같이 기분 좋은 얼굴이다. "내 평생 언제 다시 이런 곳에 올 수 있겠노. 차가 있어 참 호강한 기라." 지나가던 한 무리의 사람들 틈에서 할머니가 일행에게 들으라는 듯 말했다. 이럴 때에는 편리가 영혼을 대신한다는 말도 꼭 진실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느끼게 된다.

 

안개에 가린 상주해수욕장

 

'비단 산'이라는 예쁜 이름을 가진 이 산은 오늘은 그저 '안개의 산'이었다. 산 능선을 따라 보리암으로 이어지는 엷은 산책길은 평소라면 멋진 경관을 연출하겠지만 오늘은 온통 오리무중이다. 다만 이따금씩 안개가 걷히면서 , 아주 가끔 속살을 보여주며 애간장만 녹일 뿐이었다.

 

삼불암은 큰 암벽 위에 서 있는 세 개의 바위로 마치 불좌상 같은데, 그 아래에는 이성계가 백일기도를 한 뒤 왕위에 올랐다는 이태조기단이 있다

 

이성계가 백일기도를 하기 전에는 바위 셋이 누워 있다가 기도를 마치자 그 중 두 개의 바위가 일어나 앉았다는 삼불암 너머로 상주해수욕장과 세존도가 아득히 보인다. 나머지 바위마저 일어나 앉았다면 이성계는 왕이 아니라 황제가 될 수 있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오랜 역사와 빼어난 절경의 보리암은 유명세에 비해 이렇다 할 유적은 없다. 고려 초기에 조성된 삼층석탑과 1970년에 세운 해수관음상이 있다. 창건 당시는 보광사였는데, 현종 원년(1600)에 왕실 원당으로 삼으면서 보리암으로 바꿨다고 한다.

 

 

삼층석탑은 가야 김수로왕의 부인인 허황후가 인도 아유타국에서 가져온 불사리를 원효대사가 모셔와 세웠다고 전하지만, 탑의 양식은 고려 초기의 그것이다. 웅장하고 위엄 있는 대장봉을 배경으로 서 있는 해수관음보살상은 세운 지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이제는 보리암의 명물이 되었다.

 

 

보리암은 강원도 양양 낙산사의 관음보살상, 강화도 보문사 관음보살상과 더불어 치성을 드리면 효험이 있다는 우리나라 3대 관음보살상으로 손꼽힌다. 그 소문대로 이곳을 찾는 신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아 이곳은 늘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치성을 드리는 이들로 붐빈다.

 

해수관음보살상과 대장봉(관음봉)

 

맑은 날, 삼층석탑을 받들고 있는 탑대에 서면 보리암 주변의 절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아쉽게도 오늘은 안개가 바다를 이루어 관음상 뒤의 대장봉만 겨우 알아볼 수 있었다.

 

쌍홍문 위아래는 이렇게 뚫려 있다

 

층계를 내려와 쌍홍문으로 향했다. 금산을 수십 번이나 올랐지만 오늘처럼 내려가기는 처음이다. 바닥을 두드리면 장구소리가 난다는 음성굴은 숲에 가려 그 은밀한 구멍을 감추고 있었다. 안내문만 아니었다면  굴이 있는지조차 몰랐을 것이다.

 

쌍홍문 굴 안에서 잠시 명상에 잠기다. 멀리 상주해수욕장과 세존도가 손에 잡힐 듯 가까이 보인다

 

갑자기 서늘한 기운이 올라왔다. 몸이 부르르 떨렸다. 쌍홍문에 다다른 모양이다. 땅 속 깊이 돌길이 이어지더니 눈앞이 캄캄해진다. 옛날 부처님이 돌배를 만들어 타고 쌍홍문의 오른쪽 굴로 나가면서 멀리 앞바다에 있는 세존도의 한복판을 뚫고 나갔다고 한다.

 

쌍홍문. 옛날 부처님이 돌배를 만들어 타고 바다로 나갈 때 쌍홍문의 오른쪽 굴로 나가 세존도의 한복판을 뚫고 나갔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어찌 보면 쌍안경 같고, 두 눈이 크게 뚫린 해골 같기도 하고, 또 달리 보면 장수의 투구처럼 생긴 쌍홍문은 가까이서 보면 그 위용에 압도당하게 된다. 그래서일까? 쌍홍문 앞을 떡하니 지키고 있는 바위 이름이 공교롭게도 장군암이다. 신령스럽기까지 한 이 거대한 두 바윗덩어리를 아주 오래전부터 송악이 암벽을 타고 오르며 지켜보고 있다.

 

 

굴의 위아래는 서로 통해 있다. 손을 흔들어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면서도 서로 다른 세상의 느낌이다. 쌍홍문은 자연스레 보리암의 일주문 구실을 한다. 이 쌍홍문을 지나면 속세와의 인연은 끊어지고 부처의 세계, 선의 세계로 접어들게 된다. 굴 안 평평한 너럭바위에 잠시 앉았다. 반달 모양의 상주해수욕장이 보일 듯 말 듯, 속의 세상은 저만치 멀어져갔다.

 

 

산죽 사이로 난 길을 따라 정상으로 오르니 일월봉이 나왔다. 두 개의 바위가 층암절벽을 이루고 있는데, 가까이서 보면 날 일日자 모양이고 멀리서 보면 달 월月자 모양이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안개가 서서히 걷히기 시작했다. 안개 속에 묻혔던 풍경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냈다. 제석봉에 앉아 주위 기암절벽을 감상했다. 금산의 진면목에 절로 감탄이 나왔다.

 

 

화엄봉, 대장봉, 보리암, 형리암, 삼불암, 만장대, 사선대, 향로봉, 일월봉, 좌선대, 사자암, 저두암... 그 이름을 일일이 나열하기조차 힘들다.

 

 

봉우리 이 쪽, 저 쪽을 옮겨 다니며 이 찰나의 순간을 눈에 담았다. 언제 다시 안개가 모든 것을 덮어 버릴지 모를 일이었다. 그 걱정이 채 가시기도 전에 안개가 다시 몰려왔다.

 

 

제석봉 옆 산장에 잠시 들렀다. 벼랑 끝에 지어진 산장은 고졸했다. 돌로 쌓아 올린 벽과 초록으로 타고 오른 담쟁이, 파란 함석지붕에 붉은 지붕선이 퍽이나 잘 어울렸다.

 

 

"참 집이 좋으네요. 경치도 죽이고요." "막걸리나 한 잔 하고 가시오. 그러면 풍경도 그만이제," 마당 한쪽에서 불을 때던 할머니가 여행자에게 술을 권했다. 마음 같아선 막걸리 한 잔 걸치고 주인장 살아온 이야기나 들으면 좋으련만... 아쉬운 발길을 돌려야 했다.

 

"건강하세요. 다음에 술 마실 수 있으면 그때 꼭 들르겠습니다."

 

 

흔들바위

 

도무지 흔들릴 것 같지 않은 흔들바위를 지나니 작은 채마밭이 나왔다. 아마 산장의 할머니들이 가꾸는 산중의 텃밭인 모양이다. 잘 자란 푸성귀가 싱그럽다.

 

 

정상에 오르니 큰 돌무더기가 나왔다. 망대라고 불리는 봉수대이다. 이곳 봉수대는 남해안에 침입하는 왜구를 막기 위해 고려 명종 때 지어졌다. 조선시대에 있던 다섯 갈래의 봉수 경로 중 제2선인 동래 노선에 속한 금산 봉수대는 장방형의 돌담으로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다.

 

문장암. 조선 중종 때의 학자인 주세봉이 썼다는 '由虹門 上錦山'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망대에 오르는 길목에는 유난히 큰 집채만 한 바위가 눈에 띈다. 바위에는 '유홍문虹門 상금산上錦山(홍문으로 금산에 오르다)'이라고 글씨가 새겨져 있다. 조선 중종 때의 학자인 주세붕이 쓴 것이라 전해지는데, 이 때문에 문장암이라 불렸다.

 

 

바위에 올라 한려수도를 굽어보았다. 안개가 옅어진 틈으로 간혹 햇빛이 바다에 번득거렸다. 맑은 날이면 멀리 지리산, 여수까지 조망할 수 있어 망대라는 이름이 걸맞다.

 

 

금산에서 가장 웅장하고 큰 바위인 상사바위가 전설을 이야기하고 싶어서인지 안개 사이로 언뜻 모습을 드러냈다. 옛날 돌쇠라는 머슴이 주인집 딸을 짝사랑하여 애를 태우다 죽어 구렁이가 되었다. 구렁이가 된 머슴이 주인집 딸을 휘감고 놓아주지 않았는데 어느 날 밤 주인의 꿈에 한 노인이 나타나 금산에 있는 높은 바위에서 굿을 해보라고 하였다. 노인이 시키는 대로 굿을 하였더니 구렁이는 마침내 딸을 풀어주고, 그만 벼랑 아래로 떨어져 죽었다는 상사바위의 이야기가 아찔하다.

 

한 여자 돌 속에 묻혀 있었네

그 여자 사랑에 나도 돌 속에 들어갔네

어느 여름 비 많이 오고

그 여자 울면서 돌 속에서 떠나갔네

떠나가는 그 여자 해와 달이 끌어주었네

남해 금산 푸른 하늘가에 나 혼자 있네

남해 금산 푸른 바닷물 속에 나 혼자 잠기네

                                    - 이성복의 시, <남해 금산>

 

오늘 금산 38경은 안개 속에 묻혔다. 망대, 문장암, 탑대, 천구암, 가사굴, 이태조기단, 삼불암, 천계암, 천마암, 만장대, 음성굴, 용굴, 쌍홍문, 사선대, 백명굴, 천구봉, 제석봉, 좌선대, 삼사기단, 저두암, 촉대봉, 향로봉, 사자암, 팔선대, 상사암, 구정암, 감로수, 농주암, 화엄봉, 일월봉, 요암, 부소암, 상주리 석각, 세존도, 노인성, 일출경....

 

                                                                        

 추천은 새로운 여행의 시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