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섬2008.04.02 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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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소만 육지의 침강으로 생성된 전형적인 리아스식 해안이다. 육지가 바다로 엉금엉금 기어 들어가는 굴곡미는 대마도의 백미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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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미자카 공원 전망대 웅장한 아소만의 정경이 그림처럼 펼쳐진 곳이다. 이 비의 세계지도는 덕혜옹주의 남편인 소오타케유키가 젊은 시절의 호연지기로 그렸다고 한다.

한국에서 가장 가까운 일본의 섬 대마도 가는 뱃길은 호락호락 하지 않았다.
부산에서 대마도 북서쪽 해안까지는 불과 49킬로미터 밖에 되지 않는다. 일본보다 한국에 더 가까이 있는 섬이다.
선창 밖으로 나리는 빗속에 말 두마리가 등을 맞대고 있는 모습의 대마도가 어렴풋이 보인다. 나루가 많아 '쯔시마津島'라 불리는 섬이다. 해협을 건너 온 고대 한반도인이나 중국인 눈에도 대마도는 그렇게 멀고도 가까이 느껴졌으리라.

이즈하라 시청 시계탑 이 시계탑은 낮 12시가 되면 한국동요가 흘러 나온다. 한국관광객을 위한 것이다. 얄미울 정도로 현실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그들의 관광전략의 일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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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도는 단지 시,공간상의 거리감만은 아니다. 한국의 역사와는 뗄레야 뗄 수 없는 이 섬을 여행한 지도 벌써 두 달이 넘었다. 여행을 다녀 온 후 대마도의 한국 역사에 대해 글을 쓰는 것은 나의 능력 밖이라고 생각하였다.
독도 문제로 온 나라가 떠들썩하던 때 대마도가 우리 땅이라는 역주장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던 사회적인 분위기도 하나의 이유였다.

홉스봄의 민족주의가 서구의 그것에 대한 경계의 의미가 농후할지라도 방어적 민족주의인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볼 수 있겠다. 체 게바라가 그런 말을 했던가 " 제국주의(파쇼)에 반대하며 싸우는 이들이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그것을 그들이 닮아간다는 데 있다."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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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통신사비 조선통신사는 조선 국왕이 일본의 막부 앞으로 보낸 외교사절이다. 임란 이후 국교 재개를 계기로 총 12번 파견되었다.임란 직후에는 포로 송환 등의 의미로 '회답겸쇄환사'로 불리기도 하였다.

독도에 대한 감정이 고스란히 대마도가 우리 땅이라는 치환적인 사고가 때로는 우려스럽기도 하다.
얄미울 정도의 일본인들의 현실인식과 외교전술에 우리의 자긍을 보존하는 길은 때로는 그들보다 더 냉철하고 개방적인 사고로 접근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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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문(코라이몬) 조선통신사가 이 문을 통과하였다고 한다.

일본보다 한반도가 더 가까운 대마도는 고대 이래 일본이었다.
대마도가 일본의 중앙정부와 긴밀하게 관계를 맺게 된 것은 660년 백제의 멸망에서 비롯된다.
백제의 구원 요청에 663년 일본은 27,000명의 군사를 출병하게 된다. 그러나 백강(금강 하구)전투에서 참패를 당한 일본군은 백제 유민과 함께 대마도를 거쳐 일본으로 철수하게 된다. 그후 일본은 나당연합군의 일본 침략에 대한 위기감을 느끼게 되고 대마도에 백제식 산성을 쌓아 이에 대비하게 된다.

신라의 통일 후 잠시 외교사절들을 파견하기도 하지만 주로 상인층의 무역이 계속되어 대마도에 신라어 통역관을 설치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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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혜옹주와 소오 타케유키의 결혼기념비 고종의 딸 덕혜옹주는 일제에 의해 강제로 대마도주인 소오 타케유키와 결혼하였다. 강제결혼은 영문학자이면서 시인, 화가이기도 한 소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지금까지 알려진 것과는 달리 두 부부 사이에 애정이 있었다고 한다. 덕혜옹주의 우울증은 남편에게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당시의 무기력한 현실 등 그녀를 둘러싼 모든 것에 기인했으리라.

그후 일본인들이 고려 국왕에 특산품 등을 조공하면 화사품을 내려 주는 소위 '진봉선무역'이 정착되었다.
13세기 중엽 여몽연함군이 병력 40,000명, 대선단 900척으로1274년과 1281년 두 차레에 걸친 일본침략에 앞서 대마도를 공략하게 된다. 이 와중에 대마도 2대 도두 소오 스케구니가 전투에서 사망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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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젠지(수선사) 최익현 선생은 구한말 '을사오적'에 대한 상소문을 올리고 의병활동을 한 위정척사의 거두였다. 의병활동으로 일본군에 잡혀 절해고도 대마도에 유배되어 이곳에서 순국하였다. 유배생활 중 대마도인들에게 존경을 받았으며 그가 죽자 대마도인들이 슈젠지에 유해를 모시고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근래에 대마도와 한국에서 성금을 모와 추모비를 세웠다.

 대마도는 무역로를 상실하게 되자 왜구로 변하기 시작하였다. 고려말에 무려 529번이나 쳐들어 왔으며 한반도 뿐만 아니라 중국의 요동반도까지 휩쓸 정도로 그 위세가 대단하였다. 이에 고려 정부는 최영, 이성계 등이 왜구 토벌에 나섰고, 1389년에는 박위가 직접 대마도를 토벌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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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젠지의 불상들 일본사찰은 대개 묘지가 경내에 있는 게 특징이다. 불상들에도 가사를 입히고 있다.

조선에 들어와서도 왜구의 침입은 계속되었다. 조선 세종 때에는 이종무가 일만 칠천 여 명의 병사를 이끌고 대마도를 공략하였다. 이에 대마도주는 군사의 철수와 대마도가 조선의 속주가 될 것을 요청하였다. 조선은 대마도를 경상도에 예속시키고 경상도 관찰사를 통하여 모든 보고를 하도록 만들었다. 결국 무로마치 막부의 반대로 대마도 속주 문제는 철회되었다. 대마도 토벌과 속주 문제는, 이후 대마도가 우리 땅이라는 강력한 근거로 주장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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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일전쟁 승전비 러,일전쟁 당시 대마도는 병참기지였다. 만제키바시 운하를 만들어 기습공격에 성공하여 일본은 러시아에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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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도 토벌 후, 조선은 삼포를 개방하는 등 대마도의 무역을 활성화 시켜주고, 조선에 협력한 자들에게는 벼슬도 주었다. 조선의 입장에선 대마도가 남동쪽 울타리로 생각되어 이의 안정이 급선무였다. 대마도는 이러한 안정의 댓가로 무역 등 경제적 기득권을 확보하게 된다. 이러한 대마도와의 관계가 삼포왜란과 임진왜란으로 타격을 입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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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해역관도 대마번주 앞으로 파견되었던 역관들의 광경을 바위에 새겨 놓았다.

대마도는 토요토미의 조선출병을 기피하려는 입장이었다. 조선과의 전쟁은 무역의 단절을 의미하며 이는 대마도의 생존문제와 직결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토요토미의 명을 거역할 경우 대마도의 영지에 관한 권한을 몰수당할 것이고 게다가 목숨까지 부지하기 어렵다고 판단되자 조선 침략의 길잡이 역할을 택하게 된다. 전쟁 내내 대마도는 일본의 조선침략 병참기지가 되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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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해역관 추모비 1703년 와니우라 근처에서 익사한 역관 일행의 추모비다. 대마도 입항 직전에 갑자기 몰아친 폭풍으로 108명의 역관 일행이 모두 숨졌다. 최근 명단이 발견되어 비석에 이름을 새기었다.
 
종전 후 조선은 조선 침략의 길잡이 뿐만 안니라 직접 참전까지 한 대마도를 괘씸하게 여겨 무역을 모든 무역을 단절시켜 버렸다. 대마도에게 무역의 단절은 곧 죽음을 의미하였다. 이에 대마도는 조선과 일본의 관계 회복과 그로 인한 무역을 재개하기 위하여 필사적으로 노력하였다. 조선 정부도 게속하여 남쪽 변방이 불안정한 상태로 둘 수는 없었다. 새로이 토쿠가와 막부가 들어서고 남변의 안정이 중요하다고 여긴 조선은 일본과 국교를 재개하게 된다. 드디어 1607년에 국교재개를 알리는 회답겸쇄환사를 일본에 파견하게 된다.
이후 대마도는 조선의 울타리로 자처하며 조선통신사의 초빙 교섭 등 외교를 독점하게 되고 이로 인한 무역의 활성화로 풍족한 생활을 영위하게 된다.

이러한 대마도의 기득권은 메이지유신으로 점차 없어지기 시작하였다. 메이지정부는 대마도의 대조선 창구 역할을 없애고 일본외무성이 직접 나설려고 하였으나 외교경험 미숙 등으로 한동안 대마도에 위임하였다. 이후 대마도의 나가사키현 편성, 러,일전쟁 때의 병참기기화, 한일합방 등으로 대마도는 서서히 일본과 한국의 외교 중심에서 변방의 외딴 섬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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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미츠시마쵸 한국전망대 서울의 파고다공원 누각을 본떠서 지었다고 한다. 어째 좀......안목이 의심스럽다.

한반도의 끝자락 부산이 희미하게 보이는 와이우라 해변에서 대마도와 우리의 질긴 인연을 되새겨 보았다.
이 척박한 변방의 섬, 일본보다 한반도와 더 가까이 있는 섬에서 질곡과 침략의 역사를 넘어 새로운 한, 일 관계를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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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안과 부산이 어렴풋이 보인다.

더 많은 여행기와 스크랩은 DAUM 블로그 김천령의 바람흔적(http://blog.daum.net/jong5629
)에서 해 가시면 됩니다.
Posted by 김천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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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안녕하세요.
    남녘이 아니라 아예 바다를 건너 소식을 전하셨군요.
    하긴 가끔 대마도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바다와 대마도의 숨결이 느껴집니다.

    2008.04.02 13:53 [ ADDR : EDIT/ DEL : REPLY ]
  2. 회환이 땅 대마도 이야기네요
    덕혜옹주가 애정이 있었다는데 저도 공감합니다.

    오늘도 멋진 기사 추천드리고 갑니다.

    2008.04.02 14:38 [ ADDR : EDIT/ DEL : REPLY ]
  3. 비밀댓글입니다

    2008.04.02 14:59 [ ADDR : EDIT/ DEL : REPLY ]
  4. es7up7745

    정말 1년 만에 또 느껴보는 대마도 사진 넘 조아용..

    2008.04.03 05:12 [ ADDR : EDIT/ DEL : REPLY ]
  5. 북어

    아깝다, 우리 땅이어야 했는데

    2008.04.03 13:10 [ ADDR : EDIT/ DEL : REPLY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