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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사에 머물다

남도 사찰 여행 일번지 '달마산 미황사'




 

남도 사찰 여행 일번지 ‘달마산 미황사’


 

 남도에는 이름난 사찰들이 많다. 선암사, 송광사, 보림사, 대원사, 무위사, 운주사, 쌍봉사, 대둔사, 불갑사 등 이루 다 헤아릴 수가 없다. 이 모든 산사를 다 답사를 해보았지만 동쪽에는 선암사가, 서쪽에는 이곳 미황사가 풍광이 으뜸이다.


 

 미황사. 여행자가 번질나게 찾는 절집 중 하나이다. 충남의 개심사, 경북의 청량사와 봉정사, 전북의 내소사와 개암사, 전남의 선암사와 이곳 미황사는 지나는 길에 매번 꼭 들리는 비장의 답사처였다. 딱히 내세울만한 문화재가 아니더라도 절이 자리한 그 위치만으로도 항상 찾고 싶은 산사들이다.


 

 미황사는 땅 끝에 이르기 전, 바위능선이 공룡의 등줄기처럼 바다를 향해 달리는 달마산 기슭에 자리하고 있다. 우리나라 육지의 제일 끝에 자리한 미황사는 불교의 남방해로전래설의 창건설화를 간직하고 있다.


 

 몇 년 만에 다시 찾은 미황사는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아니 절로 가는 길이 넓게 포장되고 절마당 앞에 전각들이 새로 생겼다. 그래도 변화가 없다고 말하는 것은 사찰 입구에 번잡한 가게나 숙박업소, 식당들이 전혀 없어 그 한적함만은 잃고 있지 않다는 나름의 위안에서였다. 최근에 찾는 이들이 많아졌지만 수년 전만 해도 찾는 이가 거의 없었다. 내가 소개해주면 누구나 만족하는 사찰 중의 하나였다.


 

 미황사 초입은 남도의 여느 사찰과는 달리 숲길이 짧아 아쉬움이 남는다. 숲길을 돌아서면 이내 절집이다. 멀리 달마산 바위능선이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고 최근에 세운 전각들이 앞을 가로막고 있다. 조금은 답답한 느낌이 들지만 옛 모습을 복원하였다하니 마음은 한결 가벼워진다. 자하루를 지나면 축대가 나오고 그 틈으로 맑은 샘이 솟는다. 멀리서 보면 달마산 바위에서 샘이 솟는 듯하다.



 

축대를 올라서면 빛바랜 단청이 고운 대웅전이 달마산의 준봉들을 배경으로 우뚝 서 있다. 단청은 바람에 바랜지 오래지만 나뭇결이 참 곱다라는 느낌을 떨칠 수가 없다. 화려함이 주는 아름다움은 순간이지만 은은함이 주는 고움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 진해지는 법이다.


 

 대웅전 왼쪽의 돌계단을 올라서면 스님들이 거처하는 요사채이다 대웅전 오른쪽 위로는 응진전이 담쟁이에 둘러 싸여 그 모습을 반쯤 감추고 있다. 이것이 미황사의 전부이다. 그럼에도 미황사를 극찬하는 이유가 뭘까. 문화재라고는 보물 제947호인 대웅전과 보물 제1183호인 응진전 밖에 없다. 전각들도 요사채를 포함해 몇몇이 전부이다. 미황사는 눈으로 보이는 눈요깃거리보다 뒤편의 산세와 잘 어울리는 절터와 그곳에 앉은 대웅전이 주는 편안함, 발길을 돌릴 수 없는 그 무언가 때문에 미황사는 오래도록 답사객들의 뇌리를 떠나지 않는다.


 

 대웅전의 외부는 단청이 다 지워져 나뭇결이 다 드러나지만 내부는 화려하다. 삼존불을 모시 법당 안에는 후불탱화가 걸려 있고 학이나 모란 그림, 나한도와 제불도가 눈길을 끈다. 외부 기둥 위의 용 조각이 돋보이고 주춧돌에는 여수 흥국사 축대에서 볼 수 있는 게나 거북 등이 조각되어 있다.



 

미황사가 언제 창건되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숙종 18년인 1692년에 당시 병조판서를 지낸 민암이 지은 사적비에 창건설화가 기록되어 있다.


 

 창건설화에 의하면 신라 경덕왕 8년인 749년에 돌로 된 배가 달마산 아래 사자獅子포구에 이르렀다. 배는 며칠 동안 사람들이 다가가면 멀어지고 물러나면 가까이 다가오는 일이 계속되었다. 그러자 의조화상이 두 사미승과 100여 명의 제자들과 함께 목욕재계하고 맞이하니 비로소 배가 포구에 도착했다. 배에 올라보니 금인金人이 노를 잡고 있고 금으로 된 함과 검은 바위가 있었다. 금함 안에는 화엄경․법화경·비로자나불상·문수보살상·보현보살상·40성중聖衆·53선지식·16나한·탱화 등이 들어 있었다. 배 안에 있던 검은 바위를 깨니 검은 소 한 마리가 나와 금세 큰 소가 되었다.


 

 그날 밤 의조화상의 꿈에 금인이 나타나 말하기를, "나는 우전국(인도) 왕으로 금강산에 봉안하고자 경전과 불상을 싣고 왔으나 금강산에 절이 가득해 새 절터가 없어 돌아가던 중인데 이곳의 지형이 금강산과 비슷하므로 소등에 불상과 경전을 싣고 가다가 소가 머무는 곳에 절을 지으라"고 했다. 이에 다음날 소등에 경전과 불상을 싣고 길을 떠났는데 한 곳에 이르러 소가 한 번 크게 울 드러눕자 그곳에 통교사通敎寺라는 절을 짓고, 소가 다시 일어나 가다가 마지막으로 멈춘 곳에 미황사를 지었다. 절 이름을 미황사라고 한 것은 소의 울음소리가 지극히 아름다워 ‘미’자를 넣고 금인을 상징한 ‘황’자를 쓴 것이라 한다



 

 이 창건설화에 따르면 불교가 4세기 말 중국을 통하여 우리나라 북쪽을 거쳐 전파되었다는 통설만을 정설이라고 단정하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불갑사 창건설화도 해로 전래설을 뒷받침하고 있는 등 우리나라 서남해안지방에는 바다를 건너 불상이나 경전 등이 전해져서 절을 지었다는 설화가 많이 퍼져 있다. 그중에서도 미황사 창건설화는 인도에서 직접 불적이 전래된 점이 주목된다.



바람이 소리를 만나니 바람에 손을 씻다. 김천령(http://blog.daum.net/jong56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