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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사에 머물다

연못에 비친 부처의 이상향, 울진 불영사

연못에 비친 부처의 이상향, 울진 불영사

 

 
경북 지역의 사찰은 대개 오르는 맛은 좋으나 깊은 맛이 덜하다. 가파르고 험준한 산세의 영향이다. 협곡인 불영계곡을 처음 찾는 이들은 계곡 어드메쯤 가파른 언덕에 불영사가 있을거라 짐작한다. 내륙에서 가든 동해에서 가든 불영사로 가는 길의 계곡이 험준하다 보니 불영사가 자리잡은 터조차 그러하리라고 쉬이 단정지어 버린다. 


10년 만에 다시 불영사를 찾았다. 불영사 초입의 다리에서 보는 계곡의 풍광이 무척 수려하다. 소나무가 듬성듬성 자라는 바위벼랑에 물든 연둣빛이 봄의 완연함을 말해준다. 산사로 가는 길은 남도의 깊숙한 길처럼 평탄하고 끝이 보이지 않는 숲에 감추어져 있다. 아름드리 붉은 소나무들을 보며 '과연! 울진이구나' 하며 연신 감탄을 한다.

 
숲속 바위면에 새겨진 '미륵존불'을 유심히 보다 양성당혜능선사의 부도로 향했다. 부도 입구에는 1300여 년의 세월을 버티다 쓰러진 굴참나무에 사람들이 신성한 돌을 쌓아 만든 돌무지가 있다. 일종의 신앙의식인 셈이다. 불영사를 지은 의상대사가 심은 나무라고 전해진다.

 
숲길을 돌아서니 오랜 고목 사이로 만발한 도화꽃이 살짝 고개를 내민다. 이 험준한 산에 풋풋한 흙길이 있다는 것도 신기한데, 갑자기 앞이 환해지면서 너른 공터가 나온다. 당혹스러운 건 10년 전에 왔을 때나 지금이나 매한가지이다.

절 서쪽에 우뚝 솟은 바위가 연못에 비친 모습이 부처의 환영과 같다 하여 '불영사'라 하였다.

불영사佛影寺. 신라 진덕여왕 5년인 651년에 의상대사가 세웠다. 인도의 천축산을 닮았다 하여 산 이름을 '천축산'이라 하고 큰 연못에 살던 아홉 마리의 해로운 용을 쫓아 내고 절을 지어 '구룡사'라 하였다고 한다.

 
그런 후에 절의 서쪽 산 위에 부처를 닮은 바위가 연못에 비치어 절이름을 '불영사'로 바꾸었다고 전해진다. 지금도 불영사 서쪽의 산 능선에는 부처 형상의 바위가 있고 연못에 그 모습이 비친다.


 두 손을 모은 채 깊이 합장하는 부처 바위의 모습은 경이로움을 준다. 연못에 일렁이는 물살이 부처의 모습을 정확히 드러내지 못하게 하지만 그로 인해 연못 속의 부처는 더욱 신비롭다. 형체가 있어되 형체가 없으니 말이다.

 
드러나되 보이지 않고 보이지 않는 듯 나타난다. 바람에 움직이는 물살에 부처도 그저 몸을 맡긴다. 그러할 뿐...... 아무 미혹도 없다. 움직이는 듯 하면서도 움직이지 않는다. 그러할 뿐......

수명을 다해 쓰러진 굴참나무(왼편)와 대웅전 앞의 돌거북(오른쪽)


 연못 주위를 탑돌이 하듯 돌아본다. 물과 흙, 풀, 아무 것도 잡히는 게 없다. 물은 이미 안과 밖의 경계가 없다. 불영사는 물 속에도 있고 물 밖에도 있다. 어디가 실재인지 구분조차 생기지 않는다. 내가 믿고 있는 건 내가 만든 또 하나의 허상일 뿐......

 
대웅전 앞의 돌거북 두 쌍이 발길을 잡는다. 돌거북은 불영사가 있는 자리가 화산이어서 그 불기운을 누르기 위한 것이라고 전해진다. 머리만 나와 있어 마치 대웅전을 짊어지고 연못을 향해 엉금엉금 걸어가는 듯하다.


 대웅전 옆 승방의 오죽대를 돌아가면 상사화가 길을 연다. 아직 꽃을 피우지 않은 상사화의 푸른 빛에 명부전이 다소곳이 자리하고 있다. 단지 걸음 몇 보이면 끝날 이 길이 왜 이리 숨막힐 듯 아름다운지 나는 알 수 없다.

보물 제730호인 응진전은 불영사에서 가장 오래된 멋스러운 건물이다.


길게 몸을 늘어뜨려 배웅을 하는 배롱나무를 뒤로 하면 응진전이다. 응진전은 개인적으로 불영사 건물 중 가장 마음에 든다. 연못을 바라보며 야트막한 주위 산세에 안겨 있는 응진전의 위치도 탁월할 뿐더러 건물이 주는 고색창연함은 여행자의 마음에 깊은 적막마저 들게 한다.


 연못은 이미 경계가 아니라 연속이다. 물 속에도 부처가 있고 불영사가 있고 연등이 있고 꽃이 있다. 발 아래 밟히는 잡초의 촉감이 그대로 몸에 전해진다. 바람에 날리는 연못 냄새, 이따금 울어대는 산새 소리, 아득한 봄날 나는 꿈을 꾸고 있다.

 
나무가 하얀 쌀밥을 토해 내고 있다. 스님이 방금 출타를 하였는지 사립문은 반쯤 열려 있다. 고개를 내밀어 안을 들여다보기에는 지켜보는 하얀 눈들이 너무 많다.

 
바위 위에 앉은 '우윳빛깔' 부처님은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다. 봄이 오니 미소가 한층 밝아졌을까. 초파일을 준비하는 인부들이 쉴새없이 연등을 달아 맨다.

 
내가 돌아온 연못을 돌아 보니 산그림자가 따라 온다. 봄날의 나른한 꿈을 꾸었던가. 시계를 보려다 다시 호주머니에 집어 넣는다. 아주 오랜 세월이 흘렀으리라. 오늘만큼은 시간을 잃어 버리고 싶다.

불영사는 연못을 중심으로 대웅보전, 극락전, 명부전, 응진전, 법종루 등 전각들이 배치되어 있다.


나른하게 들리던 사람의 발자국 소리마저 들려오지 않는다. 인부들도 서둘러 연장을 정리하기 시작한다. 더 이상은 머물 수 없다는 걸 깨닫기까지는 그닥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양성당혜능선사의 부도

 깊은 산중이라 해는 이미 간데 없다. 하는 수 없이 시계를 보니 한숨이 나온다. 갈 길이 바쁘다. 일행들을 불렀다. "갑시다."

불영교 난간 사이로 본 불영계곡


 ▒ 바람이 소리를 만나니 바람에 손을 씻다(http://blog.daum.net/jong56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