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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이역, 타임슬립

남도의 한갓진 간이역, 예당역의 나른한 봄날

 

 

 

 

 

 

 

남도의 한갓진 간이역, 예당역의 나른한 봄날

 

 

 

당혹스러웠다. 어디를 가야 할지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일단 기차표는 보성까지 끊었다. 기차는 섬진강을 건너 남도에 들어서고 있었다. 진상, 옥곡, 광양, 순천 다음이 벌교다.

 

 

차창 너머로 폐역이 된 원창역이 보인다. 비록 찾는 이 없는 폐역이지만 등록문화재답게 그 자태는 당당하다. 1930년대에 지어진 원창역사는 일제강점기 표준설계도서에 따라 건립된 그 특성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어 건축적, 철도사적 가치가 큰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쯤에서 결정을 내려야만 했다. 순천을 지나 보성의 어느 간이역에서 내려야겠다. 순천과 보성 사이에 있는 역은 벌교, 조성, 예당, 득량 네 곳이다. 그중 벌교는 갔었고 나머지 가보지 않은 세 역 중에서 결정을 내려야했다.

 

 

그러나 기차가 조성역에 섰는데도 미적거리다 내리지 못했다. 이제 남은 곳은 예당, 득량이다. 결국 예당역에서 내렸다. 경전선 여행도 거의 막바지라 그동안 가지 못한 역을 고르는데 이날따라 유독 떠오른 곳이 없어서였다. 무작정 떠나는 여행 습관 때문이기도 하다.

 

 

내리는 손님은 여행자 혼자. 할머니 두서너 분이 기차에 오를 뿐, 승강장은 다시 봄날의 고요함으로 남았다. 온통 유리로 된 역 건물이 이런 한갓진 시골에서 낯설게만 느껴진다. 마치 석빙고처럼 서늘한 기운마저 감도는 텅 빈 대합실 너머로 혼자 있는 역무원이 보였다. 높은 외로움이 아니라 깊은 고요함이 흘렀다.

 

 

 

예당역. 왠지 모르게 이름이 끌린다. 고풍스러우면서도 정감이 가는 그런 이름이다. 이곳은 원래 관 터(관공서가 들어설 자리)가 될 자리라 하여 ‘관기’라 불리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예장산의 이름을 따서 ‘예당리’라 했고 역명도 ‘예당역’이라 했다고 전해진다.

 

 

 

지금도 예당은 리 단위의 마을인데도 중고등학교까지 있을 정도로 꽤나 큰 마을이다. 1922년 7월 광주 송정까지의 기찻길이 나면서 임시승강장으로 있다가 1941년 2월 역무원이 배치되고 1966년 12월 보통역으로 승격됐다. 지금의 역사 모습을 갖추게 된 건 2001년 12월이다.

 

 

 

일단 조성역까지 걷기로 했다. 혹시나 해서 집에서 가져온 보성군 관광지도를 꺼냈다. 조성역까지 그냥 걷기보단 중간 중간 들를 만한 곳이라도 찾을 요량이었다. 지도 한쪽으로 작게 표시된 문화재 두 곳이 보였다. 봉능리 석조인왕상과 우천리 삼층석탑이었다. 마치 보물을 찾은 듯 반가웠다. 자칫 밋밋할 수 있는 여행길에 이 두 유물이 훌륭한 동선을 만들어줄 것임을 의심치 않았다.

 

 

역무원에게 봉능리 가는 길을 물었다. 석조인왕상은 모르는 눈치고 다만 전화번호부를 꺼내더니 봉능리에 봉산, 신방, 청능 등의 마을이 있으니 버스를 타라고 했다. 기사에게 봉능리라 하면 안 되고 봉산이나 신방, 청능 마을 중 아무 이름이나 대면 된다고 했다.

 

 

일단은 역사를 빠져나와 강아지 한 마리 얼씬하지 않는 한산한 마을길을 걸었다. 역무원이 시키는 대로 오른쪽 길로 접어드니 시원스런 4차선 2번 국도가 나타났다. 버스승강장에서 아주머니에게 길을 물었더니 도로 끝에 걸쳐 있는 육교에서 길을 물으라고 했다. 버스도 있지만 걸어서도 갈 수 있다는 말에 걷기로 했다.

 

 

 

갓길을 걷다 쌩쌩 달려오는 차들에 흠칫 놀라길 몇 번, 도로 너머에 있는 농로를 발견했다. 따가운 봄 햇살을 손바닥으로 가린 채 뚜벅뚜벅 걷기 시작했다. 나른한 봄날이었다.

 

 

 

추천은 새로운 여행의 시작, 오른쪽 '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