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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이역, 타임슬립

으라차차, 무너진 간이역을 혼자 세우다

 

 

 

'으라차차', 무너진 간이역을 혼자 세우다

- 경전선 산인역 -

 

 

 

주말에 경전선 폐역을 찾았습니다. 지난 6월에 삼랑진에서 시작한 경전선 여행도 이젠 막바지를 향해 달리고 있습니다. 이번 달 말이면 광주송정역에서 장장 800리의 여정을 마치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번 경전선 여행은 처음으로 자가용을 가져갔습니다. 장모님 생신이라 부산에 가는 김에 들르는 길이기도 했고 이미 기차가 다니지 않는 폐역이라 마땅한 교통편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제일 먼저 찾은 곳은 함안역과 중리역 사이에 있는 산인역입니다. 산인하면 남해고속도로에서 마산과 부산으로 나뉘는 분기점으로 알려져 있지요.

 

 

경남 함안군 산인면 모곡리 1245에 있는 산인역은 1966년 9월 11일 영업을 시작했습니다. 2007년 6월 1일에 여객 취급을 중단하여 사실상 역의 기능이 사라진 상태였다가 2012년 10월 23일 결국 폐역 되는 운명을 맞았습니다.

 

 

역 앞 광장에는 더러 건물들이 남아 있었습니다. 예전 기차들이 다녔을 때 사람들이 요기를 했거나 아니면 그 추억을 더듬어 찾는 이들의 쉼터 역할을 했을 식당들이 다소 흐릿한 기억마냥 어수선한 모습으로 남아 있었습니다. 처음엔 그 낡은 건물이 옛 역사인 줄 알았는데 아름드리나무에 가린 옛 철로에 서자 버스정류장 형태의 작은 간이역 역사가 있었습니다.

 

쓰러져 있는 산인역 역명판

 

철로는 이미 걷어져 자갈만 그득했습니다. 이곳이 옛 산인역이었다는 걸 알 수 있는 단서는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혹시나 해서 이리저리 살피고 있는데 마침 역명판으로 보이는 것이 뿌리 채 뽑혀 처참하게 나뒹굴고 있었습니다. 생김새로 보아 역명판이 틀림없었습니다. 본능적으로 세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근데 의외로 묵직했습니다. 죽을힘을 다해 역명판을 들어 올렸습니다.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습니다. 세울 수는 있겠는데 역명판이 홀로 서 있게 하기에는 다리 밑동이 평평하지 않아 쉽지 않아 보였습니다.

 

쓰러져 있던 산인역 역명판을 여행자 혼자 세우다

 

"여보"

 

아내를 불렀습니다. 아무런 대답이 없습니다. 분명 차에서 내려 따라 나온 듯한데 더운 날씨 탓에 다시 차로 돌아간 모양입니다. 몇 번이나 불렀지만 대답이 없습니다. 하는 수 없이 혼자 악을 쓰며 힘을 냈습니다. '으라차차' 죽을힘을 다해 역명판을 세웠습니다. 거의 직각으로 섰을 때 어깨로 밀고 허벅지로 역명판 다리를 버텨 균형을 맞추기 시작했습니다. 암만 해도 울퉁불퉁하다 못해 둥글기까지 한 역명판 아래 콘크리트 덩어리가 문제였습니다. 이리저리 궁리를 하다 어느 순간 느낌이 왔습니다. "됐어." 조심스럽게 살짝 허벅지를 먼저 떼고 어깨를 슬며시 뗐습니다. 성공입니다. 거짓말처럼 역명판이 선 것입니다. 아무런 도움 없이 혼자 간이역을 세웠다는 느낌에 절로 뿌듯해졌습니다. 다음에 이곳을 찾는 이들은 쉽게 이곳이 산인역임을 확인할 수 있겠지요. "산인역"이라는 명판이 없다면 이곳은 폐역 된 그저 그런 역들처럼 잊히는 역에 불과하겠지요.

 

 

땀을 닦고 그제야 역 주위를 찬찬히 돌아봅니다. 역사는 아주 초라했습니다. 대개의 경전선 간이역이 그러하듯 이곳도 버스정류장 크기만 한 작은 콘크리트 역사 건물이 전부였습니다. 그 안에 사람 서넛이 앉을 만한 긴 나무벤치 하나가 놓여 있었을 뿐이지요.

 

 

 

벽에는 아무런 표식도 없었습니다. 기차운행 시간표를 붙였을 벽면에는 허연 자국만 남았습니다. 기차가 오가는 걸 볼 수 있게 양쪽으로 낸 창문도 유리창 없이 뻥 뚫려 있어 옛 흔적만 그저 가늠할 뿐입니다.

 

 

 

경전선 진주 마산 구간이 복선화되면서 이곳도 선로가 모두 철거되었습니다. 예전에는 총 3개의 선로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중 2선은 여객열차 선로였고 나머지 1선은 화물 취급용 선로였습니다. 당시만 해도 산인역이 어느 정도 규모가 있었다는 걸 보여주는 셈이지요.

 

 

그러다 1986년 무배치간이역으로 격하된 후 역 건물이 철거되고 여객열차를 취급했던 선로 1선과 화물 취급용 선로 1선을 각각 철거하여 결국 1선밖에 남지 않았는데 이마저도 근래에 철거되어 이젠 선로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기차를 기다렸을 승강장에는 온갖 잡풀들만 무성합니다. 기차들이 쇳소리를 내며 오갔을 선로를 따라 가만히 걸었습니다.

 

 

역명판이라도 세우길 잘했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물론 이마저도 언젠가 말끔히 치워지겠지만 그동안이라도 사람들의 기억 속에 이 허물어진 간이역이 소중히 자리 잡았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뙤약볕 아래 옛 흔적을 세워두고 여행자는 덕산역을 찾아 다시 길을 떠났습니다.

 

 

 

 

추천은 새로운 여행의 시작, 오른쪽 '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