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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가 있는 여행/TV, 영화 촬영지

1박2일 부여특집, 올해 가족과 함께 꼭 가야 할 여행지!

 

 

 

 

 

 

 

 

1박2일 부여특집, 올해 가족과 함께 꼭 가야 할 여행지

 

어제 <1박2일>이 부여를 찾았다. 1400년 전 백제의 영광을 재현한 백제문화단지에서 오프닝를 한 <1박2일>은 정림사지, 국립부여박물관, 궁남지, 부소산성과 낙화암까지 숨가픈 여정을 이어갔다. 천 년의 고도답게 볼거리가 많은 부여를 <1박2일>에서는 퀴즈행식으로 비교적 잘 담아냈다. 이들이 들른 부여의 명소를 지금부터 소개한다.

 

                         백제문화단지 천정문 앞에서 오프닝을 하는 <1박2일>

 


1. 1400년 전 백제의 영광을 재현한 백제문화단지

부소산에서 백마강을 건너면 백제문화단지가 있다. 대대적인 투자로 이루어진 이 문화단지는 1400년 전 화려했던 백제의 영광을 재현한 곳이다. 백제역사문화관을 비롯하여 궁궐인 사비궁, 사찰인 능사, 고분 공원, 백제인의 거주지인 생활문화마을, 위례성 등을 재현해 놓았다. 이곳은 <근초고왕> 등 드라마 촬영지로도 알려져 있다. <1박2일>팀은 이곳에서 오프닝을 했으며 생활문화마을과 위례성에서 본격 특집을 시작했다.

              중앙광장과 사비성

먼저 사비성을 둘러 보자. 삼국시대 왕궁의 모습을 최초로 재현한 곳이다. 정양문을 들어서면 드넓은 광장이 나온다.

           정양문

광장을 지나 천정문을 들어서면 중궁전인 천정전이 나오고 좌로는 동궁전, 우로는 서궁전이 있다.

          1박 2일이 오프닝을 한 천정문

중궁전의 정전인 천정전은 왕의 즉위 의례, 시년행사 등 각종 국가의시이 거행되고, 사신들을 맞이했던 왕궁의 가장 중요한 건물이다. 동궁전은 정전과 외전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정전인 문사전은 왕이 평소 문관에 관한 집무를 보는 공간이다. 외전인 연영전은 신하들의 집무 공간이다.
 

          천정전


                                      회랑

 

            능사

능사는 백제 성왕의 명복을 빌기 위한 사찰로, 부여읍 능산리 유적을 재현하였다. 높이 38m의 5층 목탑이 인상적이다. 이는 목탑 심초석에서 국보 제288호인 '창왕명석조사리감'이 발굴되어 567년 사리를 봉안하고 탑을 세웠다는 기록에 의해서다. 창왕은 성왕을 가리킨다.


          능사는 5층 목탑, 대웅전, 강당인 자효당, 향로각으로 구성되어 있다.

사비성을 둘러보고 제향루를 오르면 사비성 전경과 생활문화마을, 위례성이 한눈에 들어온다. 생활문화마을은 군관, 귀족, 중인, 서민 등의 주택을 계층별로 재현하였다. 이곳에서 <1박2일>팀이 게임을 하며 주요 촬영을 했다.

              <1박2일>팀이 게임을 하며 주요 촬영을 한 생활문화단지


위례성은 고구려에서 남하한 온조왕이 터전을 잡은 곳으로 백제 개국 초기의 도읍을 재현하였다. 백제문화단지 일대의 사비궁 등은 아직 세월의 무게가 없어서인지 고궁에 온 느낌은 들지 않고 삭막하다. 무슨 세트장에 온 느낌이 확 든다.

          재현한 생활문화마을(좌)과 위례성(우)

백제문화단지 관람은 크게 3코스로 나눌 수 있다. 1코스는 백제역사문화관→정양문→사비궁→능사→생활문화마을→정양문 코스로 1시간 정도 소요된다. 2코스는 정양문→사비궁→능사→생활문화마을→위례성→정양문→백제역사문화관 코스로 2시간 정도 소요된다. 3코스는 정양문→사비궁→능사→고분공원→제향루→생활문화마을→위례성→정양문→백제역사문화관으로 3시간 정도 소요된다.   

 



2. 두고두고 곱씹는 백제의 맛, 정림사지 오층석탑

<1박2일> 팀이 다음으로 간 곳은 정림사지, 이곳은 백제 여행의 순례지 같은 곳이다. 부여에 오면 늘 들르는 곳....

 


입장료는 1500원이면 정림사지와 박물관을 동시에 관람할 수 있다. 박물관은 불교의 상징인 卍자 모양이다. 전시실 내에는 정림사지처럼 연지가 있고 아늑한 공간을 연출하여 관람객들이 쉬어가기에 좋다.

 


전시관 내에는 정림사지를 1/12로 축소·복원하여 옛 사찰의 형태를 가늠할 수 있다. 석탑으로 많이 알려진 탓에 정작 정림사지에 대해서는 그냥 지나치는 경우가 많다. 정림사지는 백제시대의 다른 절들처럼 남북 일직선상에 중문, 탑, 금당, 강당이 차례대로 놓인 일탑식 가람 배치를 하고 있다. 그리고 회랑이 절 구역을 빙 둘러싸고 있다.

 


1942년 절터를 발굴할 때 발견된 기와조각에서 고려시대(1028)의 명문이 드러나 당시 절 이름이 정림사라는 것이 밝혀졌다. 그러나 백제 때의 절 이름이 무엇인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지금은 오층석탑과 석불좌상, 연지가 있어 옛 정림사를 상상할 수 있다.

 


정림사지 오층석탑.... 멀리서 보면 아름답지만 그다지 크게 보이지 않는 탑, 그러나 가까이 다가갈수록 그 장중함에 보는 이들은 숨을 멈추게 된다. 마치 신들린 사람처럼 고개를 한껏 쳐들고 탑 주위를 빙글빙글 한 바퀴 돌고 나서야 멈춘 숨을 '하아'하고 길게 뱉어내게 된다.

 

 


백제가 멸망해간 아픈 사연을 1,400년 채 끌어안고 온 이 석탑에는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새긴 글씨가 있다. 백제를 멸망시키고 난 소정방이 그것을 기념하여 탑에다 새긴 글씨이다. 한동안 이로 인해 이 탑이 소정방이 세운 것이라는 오해가 있기도 했다. 그가 새긴 글씨는 희미하지만 아직도 남아 있다. '大唐平濟國碑銘'

중국 역사서에는 백제에 탑이 매우 많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럼에도 백제의 탑이 남아 있는 것은 미륵사지 탑과 이곳 정림사지 오층석탑뿐이다. 미륵사지 석탑에 목탑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는 것에 비해, 정림사지 오층석탑은 훨씬 세련되고 원숙한 석탑으로서의 완성미를 보여준다.

장중하면서도 세련되고, 날렵하면서도 정돈되고, 육중하면서도 경쾌하고, 위엄이 있으면서도 왠지 살가운 석탑이 정림사지 석탑이다. 누군가는 그랬다. '이 탑을 보면 단번에 정면승부를 하는 것이 아니라 두고두고 곱씹는 맛을 느끼게 하는 백제의 맛'이라고...


오층석탑에 빼앗긴 정신을 잠시 가다듬으니 강당 자리에 새로이 지은 전각 안에 석불좌상 한 기가 보였다. 얼굴이나 몸체가 심하게 마모되었지만 아래쪽 대좌는 비교적 잘 남아 있다. 고려 현종 때인 1028년에 절을 크게 중수할 때 모신 석불로 11세기 불상으로 추정하고 있다.


정림사지 오층석탑은 높이 8.3m에 국보 제9호이고, 석불좌상은 5.6m에 보물 제108호이다.




3. 진귀한 유물이 너무 많은 국립부여박물관

<1박2일> 팀이 감탄을 하며 관람을 했던 곳은 국립부여박물관이다. 국립박물관은 무료입장인데 이곳 또한 그러하다.

 

                                      한국식동검

부여박물관 전시실은 모두 세 곳이다. 백제와 부여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곳이다.


                                              거친무늬거울

뒷면이 세모 모양의 무늬 등 굵은 선으로 이루어진 거울을 말한다. 별무늬나 번개무늬 등이 표현된 뒤와는 달리 앞면은 매끈하여 거울로 쓴다.

                                     남근형목간


전시관에는 유독 목간이 많다. 능산리절터에서 주로 발견된 목간은 6세기 후반의 것으로 추정하는데, 주로 불교의례나 제의, 문서행위 등을 기록하던 나무다. 그중에서도 눈길을 끄는 건 남성의 성기 모양을 닮은 '남근형목간'.


 

           남근형파수

'파수
把手'는 쉽게 말해 그릇 따위의 손잡이를 말한다. 이 유물은 마한의 것으로 제사유적에서 나왔다고 한다. 그 전체를 볼 수는 없으나 제례의식 등에 사용되었던 용기의 손잡이가 아닌가 생각된다. 생산과 풍요를 기원하는 신앙이 잘 드러나 있다.

 

           백제의 면직물(좌)과 백제인의 머리카락(우)

문익점보다 800년 빠른 백제의 면직물... 유물은 수장고에 있고 사진만 있는데 '문익점보다 800년 빠른 백제의 면직물'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여자변기

전시실 한 편에 별도로 전시된 두 토기가 눈길을 끈다. 다른 토기와 따로 전시되어 있는 이것은 놀랍게도 그것은 '남녀변기'였다. 여성의 변기는 그냥 '변기便器'라 표현하였지만 남자의 변기는 원래 '호자虎子'라는 이름이 있었다.

 

             차태현이 김종민에게 음료수통이라고 속였던 남자변기 호자

호자라 불리는 이 변기는 1979년 부여 군수리에서 출토됐다. 호랑이의 모습을 한 동물이 앉아 있는 모습이다. '만약 '변기'라고 적혀 있지 않았다면 누구도 그 용도를 알기 어려웠을 것이다.
남성용 소변기로 추측하는 이유는 중국 남조의 청자로 만든 것들이 발견되었고 문헌에 소변기라 쓰여 있었기 때문이다. 옛날 중국에 기린왕이라는 신선이 호랑이 입을 벌려 오줌을 누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입을 크게 벌리고 앞다리에 힘을 잔뜩 준 호랑이는 비록 간결하고 해학적인 느낌을 주지만 포효하는 자세는 흐트러짐이 없다. 들어 올린 꼬리는 길게 늘어져 자연스럽게 손잡이가 되었다. 새끼 호랑이 모양을 하고 있어 '호자虎子'라고 부른 듯하다.


부여박물관은 볼거리가 너무 많다. 하기야 678년 백제의 역사에 비한다면 너무나 적은 유물이겠지만...



 

4. 경주 안압지보다 40년이나 앞서 만들었다는 궁남지


<1박2일>에서는 궁남지를 경주 안압지보다 40년이나 앞서 만들었다고 자막을 내보냈다. 여름이면 화려한 연꽃으로 둘러싸인 궁남지는 우리나라 연못 가운데 최초의 인공정원으로 알려져 있다. 연못 가운데에는 섬이 하나 있는데 이곳에 포룡정이라는 정자가 있고 다리가 연결되어 있다.

 


 


궁남지에 대한 기록은 <삼국사기>에 보인다. “3월에 궁궐 남쪽에 못을 파서 물을 20여리나 끌어들이고 사방 언덕에 버드나무를 심었으며, 물 가운데는 섬을 만들어 방장선산方丈仙山에 비겼다.”고 되어 있다.

이때가 백제 무왕 35년(634) 3월이다. ‘궁 남쪽에 못을 팠다’라는 것에서 궁남지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이로 보아 궁남지는 백제 무왕 때 만들어졌으며 주위에서 발굴된 우물과 주춧돌 등의 유적으로 백제의 별궁 연못으로 보고 있다. 궁남지 옆에 있는 화지산이라는 낮은 산이 있는데, 그곳을 별궁 터로 추측하고 있다.

‘방장선산’은 흔히 삼신산으로 불리는 봉래, 영주, 방장을 의미한다. 고대 중국 사람들은 동해바다 가운데에 신선이 사는 3개의 삼신산이 있다고 생각하였다. 궁남지에 섬을 만들어 방장산에 비겼다고 하니 이 또한 신선사상의 영향으로 볼 수 있겠다.




<삼국사기>에는 이외에도 무왕 37년(636) "8월에 망해루에서 군신들에게 잔치를 베풀었다"는 기록과 무왕 39년(638) "봄 3월에 왕이 궁녀들과 함께 큰 연못(大池)에서 배를 띄웠다"는 기록이 있다.

이로 보아 궁남지에서 뱃놀이를 즐겼으며, 뱃놀이를 즐길 정도였으니 그 규모를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상당히 컸음을 유추해 볼 수 있다. 당시에는 궁남지라는 이름이 아니었고 다만 큰 연못(大池)으로 불렸음을 알 수 있다.


일설에는 이 궁남지가 신라 안압지보다 40년이나 앞서 만들어져 안압지에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을 액면 그대로 믿기는 어렵다. 일설에는 이 궁남지가 신라 안압지보다 40년이나 앞서 만들어져 안압지에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을 액면 그대로 믿기는 어렵다. 안압지를 가본 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지만 안압지와 궁남지는 그 생김새부터 너무나 다르다. 물론 궁남지의 원래 모습이 어떤 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둥글게만 조성된 궁남지를 보며 들쑥날쑥한 동선과 직선과 곡선이 지극히 조화로운 안압지를 연상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궁남지에 마동설화를 새겨 놓은 비가 있다. 궁남지가 마동인 무왕의 출생과 관련이 있다는 이야기다. 무왕의 어머니가 이 연못에 살던 용과 교통하여 무왕을 낳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또한 <삼국사기>의 ‘무왕이 궁 남쪽에 연못을 팠다’는 기록과 배치된다. 무왕 자신이 연못을 팠으니 맞지 않는 이야기로 전북 익산의 마룡지에서도 볼 수 있듯이 무왕과 관련된 장소에 신성이 부여되어 전해지는 전설로 볼 수 있겠다.


 



 

 

5. 부여 여행의 백미, 부소산성과 낙화암

 


<1박2일>에서는 예고만 나왔던 부소산성과 낙화암을 미리 가보자. 그 옛날 백제의 흔적을 구석구석 느끼고 싶다면 삼충사에서 옛 성의 흔적을 따라 반월루와 사자루를 거쳐 낙화암과 고란사에 이르는 길을 산책하듯 거닐면 된다. 쇼오시간은 전체 4km정도로 2시간 남짓...

 

            삼충사

삼충산는 백제의 충신이었던 성충, 홍수, 계백을 기리기 위해 지은 사당.

 

             부소산성 토성


삼충사 옆을 돌아 숲길로 접어들면 옛 부소산성의 흔적이 오롯이 남아 있다. 토성의 흔적이다. 숲길이 아주 호젓하다.
 


부소산의 누각 이름에는 해와 달이 있다. 해를 맞이하는 영일루가 동쪽에 있고, 달을 구경했던 송월대가 서쪽에 있다. 반월루는 딱 그 중간쯤에 있다. 높이 106m에 불과한 언덕 같은 부소산이지만 평지에 우뚝 솟은 산이라 해와 달을 보기에 이처럼 좋은 장소도 없을 듯하다.

 

          반월루

반월루에 오르면 가슴이 탁 트이는 전경과 부여 시내를 천천히 에둘러 흐르는 순하기 그지없는 백마강이 한눈에 들어온다.

 

             부여 시내와 백마강

이곳의 풍경을 보고 있노라면 저도 모르게 아득한 백마강을 거슬러 그 옛날 사비로 가게 된다.

 

 

옛 백제 왕자들이 산책했다는 태자골 숲길도 있고...

 



              사자루

사자루는 부소산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다.
원래 달구경을 했다는 송월대가 있었던 자리로, 1919년 임천면의 문루였던 개산루를 이곳으로 옮겨 지으면서 사자루라 이름 지었다고 한다. 건물을 세울 때 정지원이라고 적힌 백제시대 금동석가여래입상이 발견되기도 했다. 사자루 현판은 의친왕 이강이 썼다.

 

           고란사 나루

사자루에서는 금강이 백마강으로 들어오는 장대함을 볼 수 있다.

 

           해강 김규진이 쓴 고란사 현판

강변 언덕에 있는 고란사는 아주 작은 절이다. 황톳물 백마강이 바로 앞에 흐르고 강을 오르내리는 선착장이 코앞이다. 고란사가 언제 창건되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백제 아신왕 때 창건되었다는 이야기도 있고, 낙화암에서 목숨을 던진 궁녀들의 혼을 달래기 위해 고려 초기에 지었다는 이야기도 있니다. 다만 확실한 것은 법당 건물은 조선 정조 21년(1797)에 은산의 숭각사에서 옮겨왔다는 것이다.


 

           낙화암 백화정

다시 가파른 계단을 오르면 낙화암.  백화정에 잠시 올랐다가 벼랑 끝에 서서 저무는 해를 바라본다. 강 아래에서 들려오는 노랫소리. "백마강 달밤에 물새가 울어~" 구슬픈 음악을 싣고 배 한 척이 다가온다. 


 


낙화암에 오면 누구나 삼천궁녀를 떠올리게 마련이다. 그에 대한 말도 무성한데, <삼국유사>에는 사비도성이 함락될 때 궁인들이 투신했다고 하여 '타사암'이라 불렸다고 적고 있다. '낙화암'이라는 이름은 고려시대 문인들의 글에도 자주 나타난다. 그럼에도 궁녀의 수를 삼천으로 언급하지는 않았다.

15세기 후반의 문인 김흔이 <속동문선-낙화암>에서 '삼천가무위사진三千歌舞委沙塵 삼천 궁녀들이 모래에 몸을 맡겨' 으로 표현하였는데, 이는 사실에 바탕을 둔 것이 아니라 백제 멸망의 역사를 극적으로 묘사한 시적 표현으로 여겨진다. 낙화암에 서 보면 이조차도 허망하게 느껴진다.


 

 

백제,
천오백년, 별로 오랜 세월이 아니다.
우리 할아버지가 그 할아버지를 생각하듯
몇 번 안 가서 백제는
우리 엊그제, 그끄제에 있다.
...

신동엽의 <금강> 중에서


 


※ 어제 <1박2일>에서 보여준 부여는 빙산의 일각입니다. 부여에 가면 누구나 들르는 여행지 위주로 소개하였지요. 이번 주 <1박2일>에서는 부소산성과 낙화암이 나올 듯한데요. 다음에는 부여의 숨겨진 여행지를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추천은 새로운 여행의 시작. 오른쪽 '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