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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물고 싶다

감춰두고 스님만 몰래 볼 심산이군. 이렇게 아름다운데

 

 

 

"감춰두고 스님만 몰래 볼 심산이군. 이렇게 아름다운데..."

송광사에서 조계산 홍골 가는 길의 단풍

 

조계산 양 기슭에 있는 송광사와 선암사는 굴목재라는 재로 넘나들 수 있다. 송광사에서 아름답기로 소문난 우화각을 빠져나오면 침계루 맞은편 산 아래로 조그마한 단칸짜리 건물 두 채가 서 있는 걸 볼 수 있다. 척주각과 세월각이다. 죽은 사람의 위패가 절에 들어오기 전 세속의 때를 씻는 곳이다. 남자의 혼은 '구슬을 씻는다'는 척주각에서, 여자의 혼은 '달을 씻는다'는 세월각에서 각각 세속의 때를 씻는다고 한다.

 

 

이곳을 지나가는 이들은 많아도 눈여겨보는 이는 많지 않은 듯하다. 마치 번잡한 저잣거리 구석의 장의사처럼 처연한 분위기만 물씬하다. 보조국사가 꽂은 지팡이라는 고사목은 깃대처럼 높이 솟아 있어 지나온 삶을 돌아보게 한다.

 

 

계곡 이쪽으로 제법 우람한 건축물들이 담장 너머로 보인다. 저편의 대웅보전 및 수선영역과는 다른 화엄전 영역이다. 선종에 바탕을 두고 화엄사상을 수용한 보조국사의 정혜쌍수 정신이 깃든 곳이다.

 

 

화엄전 영역을 지나면 푸른 대숲이다. 대숲을 벗어나면 조계산으로 접어들게 된다. 승과 속의 경계이면서 승속이 하나가 되는 곳이기도 하다.

 

 

대숲 끝 오른쪽으로 돌담을 두른 채마밭이 보인다. 이제 산속의 평범한 풍경이 그려지나 하며 계곡을 옆으로 끼고 타박타박 걷는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온통 붉은 단풍숲이 느닷없이 눈앞에 나타났다. 작은 돌다리가 계곡에 걸쳐 있는 이곳은 일반인들이 출입할 수 없는 수행공간이다.

 

 

온통 붉다. 송광사 일대에서 가장 단풍이 아름다운 곳이기도 하다. 출입금지 푯말을 보고 아내가 참지 못하고 결국 한마디 한다.

 

"스님만 감춰두고 몰래 볼 심산이군. 이렇게 아름다운데..."

 

 

단풍숲을 비켜 계곡을 건너면 조계산을 대표하는 골짜기인 홍골로 이어진다.

 

 

홍골은 송광사에서 계곡을 따라 얼마간 올라가면 왼쪽에 있다. 홍골의 우리말 이름은 '홈골'로, 아랫마을 사람들은 '홈대골'이라 불렀는데 좀 배웠다는 사람들이 한자 홈통 홍(篊)자를 써서 ‘홍골’로 부르게 되었단다.

 

 

효령봉과 시루봉 중간의 장박골 말발굽 능선 삼거리에서 길게 뻗어 내린 골짜기가 깊고 가팔라 마치 그 모습이 홈통 모양을 닮아서 붙여진 이름이다. 홈통은 물을 대기 위해 대나무를 반으로 쪼개거나 가운데 마디를 없애 만든 관을 말한다. 혹 어떤 이들은 단풍이 많아 붉을 홍(紅)자가 아닌가 여기는 이도 있으나 이 골짜기에 사실 단풍은 그다지 많은 편은 아니다.

 

 

절집 뒤 은밀하게 숨어 있던 단풍숲은 딱 그만큼이었다. 산속으로 접어들자 단풍은커녕 메마른 잎만 숲에 나뒹굴고 있었다.

 

누군가 친 발이 계곡을 가로질러 있었다. 발아래론 폭포에서 떨어진 맑은 물이 소를 이루고 있다. 몸을 씻기에 이만한 곳도 없을 터... 스님이 그랬나 보다. 초겨울임에도 아직 발이 그대로 있으니 미처 거두지 않았음이라. 세속의 눈을 피해 승이 잠시 몸을 씻었던 것일까? 절이 지척이니 선녀가 내려와 선뜻 목욕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니...

 

 

산을 오를수록 가을이 끝났음을 알겠다. 산이 깊어질수록 겨울이 성큼 왔음을 알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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