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 동네 빨래터 풍경, 기억하시나요?
군북역에서 내려 오일장이 열리는 군북면 소재지로 무작정 걸었다. 신촌마을을 지나 덕촌마을에 이르렀을 때였다. 시골마을답지 않게 제법 많은 집들이 도로를 따라 죽 늘어서 있는 마을의 끄트머리 어딘가에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인가 싶어 다가갔더니 할머니로 보이는 세 분이 빨래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동네 빨래터였다. 참으로 오랜만에 보는 풍경에 여행자도 아무 거리낌 없이 빨래터로 내려섰다. 날씨는 따뜻하다 못해 초여름을 방불케 할 정도였다.
인사를 하자 할머니들도 반갑게 어디서 왔냐며 맞이해주신다. "여기보다 훨씬 좋은 데도 많은데, 이런 빨래터가 멋지다고예?" 요즈음 동네 빨래터도 보기 힘든 풍경이지만 제법 번듯하다는 여행자의 말에 할머니들이 이구동성으로 텔레비전을 보니 이보다 더 좋은 빨래터도 많다는 것이었다. 텔레비전에 나오는 빨래터 장면은 대개 방송을 위해 설정이 많다는 말에 "하모, 그렇기도 하겠제." 하며 또 까닭 없이 웃어젖힌다.
"여기 빨래터는 오래되었어. 모르긴 몰라도 백 년은 더 됐지 싶어. 내가 시집 온 지가 벌써 오십 년이 넘었는데 그때도 동네에서 이 빨래터를 이용했거든. 물이 땅에서 펑펑 솟아 참 깨끗했는데 지금은 물도 잘 솟지 않고 저 짝 아래로 물이 잘 빠져나가지도 않아. 예전에는 물이 좋아 우물로 쓰기도 했어"
건너편에서 혼자 빨래하고 있는 할머니에게 조심스럽게 연세를 묻자 미장원에서 갓 볶은 윤기 나는 머리카락을 매만지며 세 사람 중에 누가 가장 나이가 많이 들어 보이냐고 오히려 반문한다. 순간 당황한 여행자. 말 한마디 잘못 건넸다가는 오늘 초상 치르겠다 싶어 뜸을 들이고 있는데 이를 눈치 챘는지 할머니가 빙그레 웃더니 서열을 정리해준다.
"저기 할매가 올해 팔순이라. 나는 일흔셋이고. 칠학년 삼반이제. 근데 인역은 올해 우찌 되는지 모르겠네." 윤기 나는 머리카락의 할머니가 건너편 푸근한 인상의 할머니에게 물었다. "나요. 거기가 일흔셋이모 나하고 갑장이네. 뱀띠니께." "아, 그라요. 진짜 동안이네. 나보다 어린 줄 알았드만. 내가 조금 늙어 보이긴 하지. 그럼 월성댁이 우리하고 갑장이니 전부 동무네." 할머니들도 여행자 덕(?)에 서열정리를 한 듯했고 덕분에 두 할머니는 친구가 됐다. 한눈에 봐도 수더분하니 인심 좋게 생긴 할머니는 사실 육십 대로 봤었는데 칠학년 삼반이라는 말에 할머니들도 여행자도 모두 놀랐던 것이다.
할머니 세 분 다 덕촌마을에 사시는데 빨래터에는 간혹 나오신단다. 겨우내 집에서 세탁기만 돌리다가 오늘 볕이 하도 좋아 나왔는데 세 분이 우연히 모이게 된 것.
근데 비눗물로 인해 물이 뿌옇다. 배수로가 없나 싶어 살피고 있는데 아래쪽으로 진흙더미가 쌓여 물이 빠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예전에는 물도 펑펑 솟고 배수도 잘 되었는데 경지정리하고 기차역 공사하고 난 뒤부터 물길이 막혔는지 영 신통치 않아. 이젠 빨래터도 수명이 다 된 기라. 여서 빨래를 해도 집에 가서 다시 세탁기에 돌려야 돼. 볕이 좋아 심심풀이로 빨래를 하는 거지. 찌든 때만 여기서 빼내고 빨랫감은 다시 깨끗이 헹구어야 돼."
할머니들은 연신 웃어댄다. 그런데도 손은 쉬지 않는다. 마치 노련한 장인처럼... 쓱쓱 옷을 문대다가 첨벙첨벙 물에 헹구고 빨래를 비틀어서 대야에 담는 것이 아주 익숙한 손놀림이다.
그렇게 한참을 웃으며 수다를 떨었다. 참으로 오랜만에 보는 살갑고 정겨운, 흐뭇한 풍경이었다. 할머니들의 걸쭉한 입담에 봄은 그렇게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었다.
추천은 새로운 여행의 시작, 오른쪽 '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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