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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의 땅, 제주도

이색 제주여행, 대정읍성마을 걸어서 한 바퀴!

 

 

 

 

 

 

제주의 옛 역사를 찾아 대정읍성을 걷다

 

추사 김정희 유배지

 

제주 추사관과 김정희 유배지를 둘러보고 다시 동문으로 나왔다. 동문에서 남문을 거쳐 서문에 이르는 대정읍성을 한 바퀴 돌아볼 요량이었다. 대정읍성은 제주 세 읍성 중 하나로 태종 18년(1418) 현감 유신이 축성했다. 대정은 인정이 두텁다는 인성, 성을 평안하게 한다는 안성, 성을 보호한다는 보성의 3개 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규모는 길이 4890척(1467m), 높이 17척 4촌(5.22m)이라는 기록이 있다.

 

대정읍성

 

대정읍성을 한 바퀴 도는 이 길은 최근에 '추사유배길'이라 불리는 길 중의 하나인 1코스로 '집념의 길'로 불린다. 제주 추사관에서 출발하여 송죽사 터, 송계순 집터, 1차 적거지 터, 두레물, 동계 정온 유허비, 한남의숙터, 정난주 마리아 묘. 남문지 못, 단산과 방사탑, 세미물, 대정향교까지 이르는 길이다. 여행자는 여기에 아랑곳하지 않고 발길 닿는 대로 걷기로 했다.

 

삼의사비

 

제일 먼저 '제주대정삼의사비'가 눈에 띈다. 비문의 뒤를 살펴보면 '여기 세우는 이 비는 무릇 종교가 본연의 의무를 저버리고 권세를 등에 업었을 때 그 폐단이 어떠한가를 보여주는 교훈적 표석이 될 것이다....'로 시작하고 있다. 흔히 '이재수의 난'으로 알려진 1901년 제주민란 당시에 사회적 폐단을 시정하고자 장두로 나섰던 이재수, 강우백, 오대현 세 사람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석이다. 현기영의 <변방에 우짖는 새>로 소설화 된 이 사건은, 대정에서 포교 활동을 하던 프랑스인 천주교 신부가 부패한 관리와 결탁하여 주민들을 학대하고 수탈하자 주민들이 봉기하여 천주교 신자들을 살해하자 결국 관군이 파견되고 프랑스 함대까지 동원되어 수백 명의 사상자를 내고 장두들이 처형된 사건이다.

 

추사관 앞 돌하르방

 

이곳에는 모두 세 기의 돌하르방이 있다. 원래 우석목, 무석목, 벅수머리, ,돌영감, 두룽머리 등으로 불리다 돌하르방으로 불린 것은 1970년대였다. 성문 입구에 세워졌던 돌하르방은 제주 시내에 21기, 성읍에 12기, 대정읍에 12기, 도합 45기가 있다. 특이하게도 돌하르방의 키는 제주가 187cm로 가장 크고, 다음으로 성읍이 141cm, 대정이 134cm로 가장 작다. 그럼에도 벙거지 형의 모자를 쓰고 부리부리한 왕방울 눈이며, 큼지막한 주먹코, 꼭 다문 입, 배 위아래로 얹은 두 손의 모습은 엇비슷하다.

 

돌하르방

 

 

골목 입구에 대정 우물터라는 표지판이 선명하다. 사방을 돌로 높게 둘러싼 우물에는 아직도 물이 그득했다. 모터 소리가 요란한 것이 지금도 펌프질을 하여 인근 밭에 물을 대고 있었다. 우물의 이름은 '두레물'. 두레박으로 퍼 올리는 물이라는 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한자로는 '거수정'이라 했다. 옛날 대정골의 유일한 못으로, 명관이 추대되면 몰이 말랐다가도 펑펑 솟아나고 그렇지 않은 이가 추대되면 펑펑 솟아나던 물도 금세 말라붙어버렸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대정성이 처음 축조될 당시 주민과 군일들의 식수로 사용했다고 한다.

 

옛 우물, 두레물

 

 

마을을 돌다보니 집 마당에 감귤이 심어져 있는 풍경을 종종 볼 수 있었다. 육지에서 마당에 감나무나 매화나무를 심듯 여행자에겐 조금은 낯선 풍경이 이곳 제주에선 아주 익숙한 풍경이 된다.

 

추사유배길 표지판

 

추사 유배길을 알리는 표지판이 이채롭다. 세련되고 획일화된 표지판이 아니라 추사의 흔적이 오롯이 담겨 있는 표지판이다.

 

 옛 대정 동헌터였던 초등학교

 

초등학교에는 돌하르방과 비석군이 있었다. 그중 붉은 글씨가 새겨져 눈길을 끄는 비석이 하나 있다. 광해군 6년(1614) 제부도에 유배 온 동계 정온 선생의 적려 유허비다. 정온은 후에 '제주 오현'의 한사람으로 귤림서원에 모셔졌다. 이 비는 추사의 건의를 받아들여 헌종 8년(1842) 이원조 목사가 세웠다. 

 

 

동계 정온 선생 유허비

 

돌하르방

 

초등학교 입구에 기대선 돌하르방은 그 옛날 성문을 지키던 하르방의 당당함보다 그저 아이들의 소꿉친구인 것처럼 다정한 듯 애살맞다.

 

대정읍성의 흔적

 

밭과 집 사이에 읍성이 가로질러 있고 무너진 성터는 다시 민가의 담장이 되기도 한다.

 

남문지 돌하르방

 

남문지 돌하르방

 

남문의 돌하르방은 주택에 있는 사찰의 사천왕상이 된 것 같기도 하고 오래된 감귤창고를 지키는 경비병 같기도 하다. 한없이 친숙한 돌하르방이 너무나 자연스럽다. 이 돌하르방은 오른손을 위로, 왼손을 아래로 한 여느 돌하르방과 달리 양손을 마주하고 있다.

 

우연히 발견한 초가

 

마을을 돌다 우연히 만난 초가 한 채... 오랜 세월을 버텨온 듯한 이 초가는 금방이라도 무너질 태세다.

 

감귤과 30여 년 된 감귤창고

 

노란 감귤 너머로 오래된 감귤창고가 보인다. 마침 이 집 앞을 지나가던 아주머니의 말에 따르면 적어도 30년은 되었을 거라고 했다. 지금은 마을엔 감귤창고가 거의 없고 과수원에 가면 새로이 멋지게 지은 감귤창고를 볼 수 있단다.

 

산담

 

집과 집 사이의 밭에는 무덤이 더러 보인다. 무덤 주위에 돌을 쌓은 ‘산담’을 마을 가운데서 보니 다소 생소하다.

 

 

서문 쪽으로 가니 골목길이 잘 정비되어 있다. 쭉 뻗은 골목길에는 올레꾼을 위한 숙소도 더러 보인다.

 

 

무너진 성터는 다시 깔끔히 정비가 되었고 그 아래 녹슨 대문이 눈길을 끈다.

 

 

육지의 솟을대문마냥 담장 가운데로 우뚝 솟은 대문을 가진 이 집은 짐작대로 제법 규모가 큰 집이었다.

 

서문지 돌하르방

 

서문지의 돌하르방은 그냥 지나칠 뻔했다. 담장 한 귀퉁이에 쳐박혀 있는 돌하르방이 애잔하다.

 

 

10월 말인데도 따뜻한 제주에는 아직 호박꽃이 피어 있다.

 

홍살문거리

 

예전 홍살문이 있었다는 거리는 대정읍성의 정중앙으로 골목이 있는 북쪽을 빼고는 동, 서, 남 세 방향으로 도로가 시원스레 뻗어 있다.

 

 

‘쉐막’으로 쓰였을 법한 양철 슬레이트 지붕을 인 토담집이 계속 눈에 밟힌다.

 

송계순집터

 

송계순 집터는 현재 밭이다. 제주에 유배 온 추사가 첫 번째로 머물던 집이었다. 유배인이 도착하면 고을 수령은 그가 거처할 집과 관리할 사람을 지정하는데, 이를 '보수주인(保授主人)'이라고 하며 당시 포교였던 송계순이 그 역할을 맡았다. 추사는 이곳에서 2년 정도 머물다가 헌종 8년(1842) 제주도의 이사 시기인 '신구간(新舊間)'에 두 번째 적거지인 강도순의 집으로 옮겼다.

 

 복원된 북문

 

지금은 북문이 있지만 옛 탐라순력도에는 동문, 남문, 서문만 있을 뿐 북문의 흔적은 없다. 처음에 북문이 있었다가 어느 시기에 폐쇄된 것으로 보인다.

 

 

성 위를 걷다 마을로 내려섰다. 송주사 터를 찾기 위해서다. 지도를 보고 지레짐작으로 이쯤이 아닌가 싶어 불쑥 들어갔는데 어느 민가였다.

 

“무슨 일이요? 거긴 우리 집인데....”

 

막 집안으로 들어서던 아주머니가 소리쳤다. 양해를 구하고 옛 송죽사 터를 찾는다고 하니 송죽사는 잘 모르겠고 우리 집이 예전에 사당이 있었던 자리라는 이야기는 들었다고 했다. 아주머니는 10여 년 전부터 여기서 집을 짓고 살았는데 예전 동네 사람들이 이 터를 사당이 있었던 자리라고 했단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집터를 한 번 둘러보는데 바로 옆집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옆집의 생긴 모양이 송죽사 터임을 밝히는 사진 자료와 정확히 일치했다.

 

 

송죽사 터는 광해군 6년(1614)에 제주에 유배된 동계 정온 선생이 10년 동안 귀양살이 했던 '막은골'이다. 1799년 부종인 대정현감이 '열락재'라는 서당을 지은 곳이라 해서 '서당터'로도 불리었다. 추사가 귀양살이 중에 정온의 병자호란 중의 우국충정을 기리는 비를 세울 것을 제주목사 이원조에게 건의하자 헌종 8년(1842)에 ‘동계정온적려유허비’를 세웠다.

 

송죽사 터

 

이듬해 정온의 절개를 소나무와 대나무에 비유하여 '송죽사'를 건립하여 그의 넋을 기렸다. 현판은 이원조가 청하여 추사가 썼다. 송죽사는 고종 8년(1871)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절되었고 이때 현판도 유실되었다. 비석은 몇 번 옮긴 우여곡절 끝에 지금은 초등학교에 세워졌다.

 

 

읍성을 한 바퀴 도니 어느새 점심때가 되었다. 식당이 몇 군데 보였는데 정식을 한다는 어설픈 글씨로 적힌 식당이 보여 들어갔다. 알고 보니 치킨집이었다. 메뉴도 엄청났다. 어차피 맛은 제쳐두고 시장기만 달래면 될 터... 밥을 주문하니 정식밖에 되지 않는단다.

 

‘도연치킨’, 10년 전에 대구에서 내려왔다는 허정임(45) 아주머니는 인상만큼이나 음식을 내놓는 손이 푸짐했다. IMF 때 도시 생활을 청산하고 고향으로 내려온 아주머니는 이곳 생활을 무척이나 만족해했다.

 

“아파트에 살 때는 머리가 아파 매일 두통약을 먹어야 했어요. 근데 이곳에 오니 공기가 좋아서 그런지 거짓말처럼 두통이 사라지더라고요.”

 

마늘 농사를 13년째 지으며 식당도 운영하는 아주머니에겐 딸이 셋 있다. 한참 식사를 하고 있는데 “안녕하세요.” 하며 여자아이가 밝고 큰소리로 인사했다. 막내딸이라고 했다. 무척이나 귀여웠다. 손님이 오면 늘 깍듯하게 인사한단다.

 

인근에 추사관이 있어도 식당을 찾는 손님들은 거의 없다고 했다. 올레길하고도 떨어져 있고 추사 유배길이 생겨 걷는 길이 생겼지만 찾는 이가 드물다고 했다. 치킨집인데도 주로 밭에 일하는 인부들의 밥 배달을 하고 요즈음은 인근 제주영어마을 인부들의 식사를 제공하고 있다고 했다. 조금은 투박했지만 정성들여 차린 밥을 뚝딱 먹어 치우고 일어서는데 아주머니가 한마디 건넨다.

 

“혹시 유명한 분인데 제가 못 알아보는 건 아니겠지요?” 자꾸 이리저리 묻고 무언가를 열심히 적고 있으니 괜스레 궁금했던 모양이다. 그럴 염려는 없으니 안심하십사 인사를 드리고 가게를 나왔다.

 

 

 

                 추천은 새로운 여행의 시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