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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의 땅, 제주도

작은 비석 다섯이 주는 옛 제주의 향기, 오현단

 

 

 

 

작은 비석 다섯이 주는 옛 제주의 향기, 오현단

  〔제주 도심을 걷다④〕 제주성지와 오현단

 

영주(제주)십경 중의 하나인 ‘귤림추색’을 알리는 표지석이 있는 남수각 일대에는 옛 제주성이 잘 남아 있다. 거무튀튀한 높은 성벽을 따라 제법 장한 나무가 우거져 있고 그 사이로 건물이 몇 채가 보인다. 오현단이다.

 

 

입구 바위에 새겨진 오현단이라는 이름에서 이곳이 다섯 성현을 배향한 곳임을 알겠다. 그러나 입구를 들어서자마자 2층으로 지어진 향로당(노인회관) 건물이 떡하니 버티고 있어 신성한 기운을 막고 있었다.

 

 

오현단은 조선시대에 제주에 유배되었거나 관리로 파견한 사람 가운데 다섯 사람을 가려 뽑아 배향한 곳이다. 오현(五賢)은 중종 15년(1520) 제주에 유배된 충암 김정, 중종 29년(1534)에 제주목사로 부임한 규암 송인수, 선조 34년(1601)에 안무사로 왔던 청음 김상헌(金尙憲), 광해군 6년(1614)에 유배된 동계 정온과 숙종 15년(1689)에 유배된 우암 송시열 등이다. 귤림서원이 대원군 때 헐리게 되자 그 옛 터에 이들의 위패를 모시고 배향한 단이 곧 오현단이다. 고종 29년(1892)에 제주사람 김의정이 중심이 되어 비를 세우고 제단을 쌓았다.

 

▲ 조선 세종 때의 제주 출신 문인 고득종을 모신 사당 황현사. 뒤로 제주성이 보인다.

 

▲ 귤림서원 현판

 

원래는 선조 11년(1578)에 임진이 목사로 있을 때, 판관 조인준이 가락천 동쪽에 충암 김정을 모시기 위한 충암묘를 지은 것이 그 시작이다. 현종 6년(1665)에 판관 최진남이 이 묘를 장수당 남쪽인 지금의 자리로 옮겨놓은 뒤, 숙종 8년(1682) 예조정랑 안건지를 제주도에 파견하여 ‘귤림서원’이라는 현판을 하사하여 김정·송인수·김상헌·정온 등 네 분의 위패를 모시도록 하였다. 숙종 21년(1695년) 송시열도 함께 모시면서 5현을 배향하게 되었으나, 고종 8년(1871)에 서원 철폐령이 내렸을 때 서원이 헐리게 되어, 그 터에 오현의 위패를 상징하는 조두석을 세우고 단을 쌓아 제사를 지냈다.

 

▲ 오현단

 

단 내에는 오현의 위패를 상징하는 조두석이 있다. 높이 43∼45cm, 너비 21∼23cm, 두께 14∼16cm의 조두석 다섯 기가 있는데 각자 33∼35cm 간격으로 나란히 서 있다. 매주덩이만 한 이 이 작은 비석은 마치 도마 같이 생겼다 하여 ‘도마 조(俎)’자를 써서 ‘조석’ 혹은 ‘조두석’이라 했다.

 

▲ 오현단의 다섯 조두석은 그 흔한 명문조차 없을 정도로 제주를 닮아 소탈하기 그지없다.

 

이 조두석에는 그 흔한 이름마저 새겨 있지 않을 정도로 소박하다. 아무런 글씨도 없이, 그저 제주의 자연에서 얻은 돌을 그대로 세운 그 무미한 소탈함에 진한 감동마저 온다. 큼직한 비석도 아닌, 화려한 글씨가 새겨진 것도 아닌데도, 이 작은 비석 다섯이 주는 여운과 신성함은 이루 다 표현할 길이 없다. 이따금 성벽을 훑고 지나가는 바람이 비석을 휘감아 돌아 신성한 기운을 더해준다. 비석 뒤의 일산처럼 가지를 뻗은 검양옻나무 한 그루와 제법 장한 나무 몇 그루들이 길게 그늘을 드리우며 가지를 늘어뜨리고 있어 제단으로서의 신성한 기운을 한껏 살려주고 있다.

 

 

▲ 귤림서원

 

▲ 오현단 뒤로는 옛 제주성벽이 둘러싸고 있다.

 

서쪽 자연석에는 ‘증주벽립’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증자와 주자가 이 벽에 서 있다“는 뜻으로 그들이 있는 듯이 존경하고 따르라는 송시열의 글씨다. 서울 성균관 북쪽 벼랑에 있는 우암의 글씨를 제주 출신 변성우가 성균관 직강으로 있을 때 탁본하여 온 것을, 철종 7년(1856) 판관 홍경섭이 이곳에 새겨놓은 것이다.

 

▲ '증주벽립', 송시열의 글씨로 '증자와 주자가 이 벽에 서 있는 듯이 존경하고 따르라'는 뜻이다.

 

 

오현단 내는 어지럽기 짝이 없다. 입구를 막고 있는 향로당 건물부터 후손들이 세운 각종 비석이 난무하고 그 연유조차 알 수 없는 시비들이 공간을 차지하고 있다. 진정 무엇을 기리고자 함인지 도무지 알 길이 없다. 예전부터 있었던 김정 선생과 송시열 선생의 ‘적려유허비’와 '귤림서원묘정비', '향현사유허비' 등은 그렇다손 치더라도, 근래에 후손들이 세운 듯한 비석들은 하나같이 화려하고 큼직함에도 작은 조두석 다섯이 주는 진한 감동에는 한참이나 미치지 못한다.

 

▲ 오현단 입구를 2층 건물의 향로당(노인회관)이 가로막고 있어 답답하기 이를 데 없다.

 

향로당에서 노인 한 분이 나왔다. 공교롭게도 서울시장과 이름이 같은 박원순 할아버지였다. 충남 서천에서 55세 때 제주로 온 박원순 할아버지는 이틀 동안 제주를 관광한 후 3일째부터 일을 해서 지금까지 제주에 머물고 있다고 했다. 향로당의 터줏대감인 할아버지는 지금은 이곳에서 기거하며 오현단을 매일 청소하고 관리하고 있다고 했다. 간혹 ‘증주벽립’의 글자를 보지 못하고 그냥 갔다가 종종 다시 돌아오는 학생들이 있다며 무엇을 보고도 보지 못하는 세태를 한탄했다. 등이 굽은 할아버지를 보자 향로당 건물이 오현단 전체를 막고 있어 답답하다는 이야기를 차마 꺼낼 수가 없었다. 오현단은 1971년 8월 26일 제주도기념물 제1호로 지정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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