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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의 땅, 제주도

육지와는 다른 제주 한옥의 멋! 대정향교

 

 

 

 

 

 

육지와는 다른 제주 한옥의 멋, 대정향교

 

  단산과 산방산, 대정향교는 단산 아래 자리하고 있다.

 

방사탑이 있는 인성리 들판에서 단산 자락의 완만한 고갯길을 넘으면 너른 들이 펼쳐지고 산 아래 다소곳이 자리한 대정향교가 모습을 드러낸다.

 

  대정문, 고개를 숙이고 허리를 낮추어야 들어설 수 있다.

 

대정향교는 태종 16년(1416)에 대정성 안에 처음 지어진 후 여러 차례 옮겼다가 효종 4년(1653)에 현 위치에 옮겨지어졌다. 주자학을 건국이념으로 삼은 조선왕조는 현마다 향교를 설치하고 공자를 모신 사당 역할과 지방교육을 맡게 했다.

 

 

대성문을 통해 향교에 들어섰다. 문이 낮아 절로 허리를 수그리고 자세를 낮출 수밖에 없는데 이는 몸가짐을 단정히 하고 마음자리를 추스르게 한다. 맞은편의 동정문도, 대성전 뜰의 전향문과 퇴출문도 모두 몸을 낮춰 굽혀야 드나들 수 있다.

 

  삼문

 

이곳 대정향교도 여느 향교와 같이 ‘전학후묘(前學後廟)’의 기본 구조를 갖추고 있다. 남쪽에 배움의 공간인 명륜당이 북향하여 자리 잡고 그 북쪽에는 사당인 대성전이 있다. 명륜당 좌우에는 기숙사인 동재와 서재가 있다.

 

  대성전

 

대성전으로 가는 삼문은 세 개의 돌층계 위에 있다. 이 문을 들어서면 대성전이 남쪽을 향하여 서 있다. 헌종 원년(1835)에 중건된 대성전은 정면 5칸에 전퇴가 있어 제법 장한 기운이 뻗친다.

 

  동재

 

향교의 건물들은 모두 낮고 지붕은 제주도의 다른 건축물처럼 합각이며 수키와가 이어지는 곳엔 회(모르타르)를 단단히 발랐다. 이는 전체적으로 밝은 빛을 띠게 하기도 하지만 바람이 강한 제주에 지붕이 날아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다. 육지와는 다른 제주만의 독특한 한옥의 모습이다.

 

대정향교는 제주의 세 향교 중 원형을 가장 잘 간직하고 있는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명륜당은 영조 48년(1772)에 중건된 정면 5칸의 건물로 장식이 간결하고 단청을 하지 않아서 전체적으로 강건한 느낌을 준다. ‘명륜당(明倫堂)’이라는 현판은 순조 때 변경붕 현감이 주자의 필치를 본받아 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

 

 

대성전 뜰에는 거대한 소나무와 팽나무가 있어 눈길을 끈다. 예전 이곳의 훈장이었던 강사공이라는 분이 삼강오륜을 상징해 소나무 세 그루와 팽나무 다섯 그루를 심었는데, 지금은 이 세 그루만 남아 있다. 추사의 <세한도>에 나오는 것과 비슷해 추사가 이 나무를 보고 그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동재에는 제주에서 추사가 남긴 현판인 ‘의문당(疑問堂)’이 있다. 제주 지역 유생들과 추사와의 교류 흔적을 보여주는 현판으로 의문당은 추사의 스승인 완원의 호이다. 헌종 12년(1846) 대정향교 훈장 강사공의 요청으로 추사는 ‘의문당(疑問堂)’을 써주었고 오재복이 글자를 새겨 향교의 동재에 걸었다.

 

                                   추사가 쓴 동재의 의문당 현판, 원본은 제주 추사관에 있다.

 

추사는 공부라는 것이 우리들이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상식적인 것들에 대해 스스로 의문을 던지는 데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깨우쳐 주고자 했다. 현재 이 현판의 원본은 제주 추사관에 옮겨 전시되어 있다.

 

  제주 추사관의 의문당 현판

 

  대정전의 전퇴는 5칸으로 빈 공간을 두어 장한 느낌을 준다.

 

  대성전 앞뜰의 팽나무와 소나무는 추사의 <세한도>를 연상하게 한다.

 

  명륜당은 북향하고 있다. 낮은 지붕에 회를 단단히 발라 강한 바람에 견디도록 하였다.

 

  대성전 뜰의 소나무 한 그루는 <세한도>의 소나무를 닮은 듯하다.

 

향교 옆으로 몇 걸음 가면 산자락에 ‘세미물’이라는 커다란 표지석이 눈길을 끈다. 이곳은 예전 ‘돌세미’라고도 불리던 샘물로 인성리와 사계리의 수원지로 사용되던 샘물이다.

 

  대정향교 옆의 세미물

 

추사가 대정에 유배생활을 할 때 세미물이 멀리 있어 물을 길어오기가 어렵다고 호소한 적이 있는데 아마 이 물을 이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세미물은 단산에서 나는 물로 다인(茶人)들이 최고로 치는 물 중의 하나로 차를 좋아했던 추사가 무척이나 애착을 가졌다고 한다. 추사는 물에 대해 일가견이 있어서 제주도의 물맛을 가려가며 차를 시음했던 것으로 전한다.

 

  향교 앞 길의 추사 전각들

 

향교에서 나와 들판을 따라 걸었다. 얼핏 공사자재로 보일 정도로 울퉁불퉁 제멋대로인 바윗돌에 무언가가 새겨져 있다. ‘전각’이었다. 예전 문인묵객들이 글씨와 그림에 도장을 찍기 위해 나무나 돌, 금옥 등에 인장을 새기는 것을 말하는데 ‘낙관’이라고도 했다.

 

추사는 호가 100과가 넘어 인장 또한 많았다. 오죽했으면 추사의 제주도 제자 박혜백은 스승의 인장들을 모아 <완당인보>라는 책을 만들었을까. 여기에 추사의 인장이 180과나 수록되어 있다고 한다. 추사는 제주도 사람들이 손재주가 좋다 하여 전각하는 법을 직접 가르치기도 했다. 길을 따라 쭉 늘어선 추사의 인장들을 감상하면서 전각을 하나의 예술로 승화시킨 추사의 고독과 집념을 쫓아본다.

 

  들판에서 본 단산과 대정향교

 

☞ 대정향교는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안덕면 향교로 165-17에 있다. 제주도 유형문화재 제4호다. 제주 추사관에서 출발한 추사유배길 1코스 집념의 길은 이곳에서 끝이 났고 3코스 사색의 길이 시작됐다.

 

 

                 추천은 새로운 여행의 시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