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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의 땅, 제주도

제주 최초의 학교와 옛 제주성을 찾아 골목길을 걷다

 

 

 

 

 

제주 최초의 학교와 옛 제주성을 찾아 골목길을 걷다

〔제주 도심을 걷다③〕 제주동문시장에서 제주성지까지

 

   동문시장 들머리 옛 사마재 터

 

동문시장을 나와 오현단으로 향했다. 시장 끄트머리 여기저기 좌판들이 늘어서 있다. 농협 건물이 느닷없이 눈앞에 나타났다. 마침 수중에 현금이 떨어져 돈이나 뽑을 요량으로 다가가다 한구석에서 작은 비석 하나를 발견했다. 순간 ‘띵’하니 무언가에 머리를 맞은 듯했다.

 

   상인들의 물건더미에 묻힌 사마재 터 비석

 

고개를 숙여 자세히 들여다보니 작고 검은 대리석에는 ‘사마재 터’라고 적혀 있었다. 고종 16년(1879)에 제주 목사 백낙인이 지었는데, 제주 지방의 생원, 진사 등 사마시에 합격한 유생들이 모였던 곳이란다. 하마터면 상인들이 쌓은 물건더미에 묻혀 못 볼 뻔했다. 그러고 보니 동문시장이라는 이름도 무심코 간과한 것이다. 제주성의 동문자리였다는 걸 여태 깨닫지 못한 미련한 자신을 나무라며 오현단 가는 길에 골목 이곳저곳을 살뜰히 살피기로 했다.

 

  제주 최초의 근대적 중등교육기관인 시립의신학교 터. 해방 후 1946년 이곳에서 오현중고등학교가 창설되어 별도봉 기슭으로 옮기기 전인 1972년까지 있었다.

 

골목에는 작은 비석이 여기저기 있었다. 예사로 지나치면 볼 수 없을 정도로 작은 비석들은 이곳이 옛 제주의 중심지였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넓은 주차장 한편에 의신학교 터임을 알리는 표지석이 보인다. 지금 보아도 학교로 보이는 건물과 운동장으로 쓰였을 법한 너른 주차장에 눈에 띈다. 이곳은 제주도 최초의 근대적 중등교육기관인 시립 의신학교가 있었던 자리다.

 

1907년 제주 군수 윤원구가 귤림서원 터에 설립하였는데 처음엔 1년 과정의 중등교육을 실시하다 1910년에 이르러 제주공립농업학교로 재출범하면서 3년제, 5년제로 점차 발전하였다. 후에 농업학교는 제주시 삼도동으로 이전하였고 해방 후 1946년에 이곳에선 오현중․고등학교가 창설되었다. 제주의 인재들이 이곳에 모여들어 그 명성이 육지에까지 자자했다고 한다.

 

   조선시대의 학당인 장수당 터

 

그 옆 전봇대에 가려진 골목 안쪽은 ‘장수당 터’였다. 조선시대에 향교 다음으로 오랜 전통을 지닌 학당으로 현종 1년(1660)에 목사 이괴가 명도암 김진용을 스승으로 맞아 교육을 시작했는데, 현종 6년(1665)에 귤림서원이 남쪽에 들어서자 그 강당으로 쓰였다가 고종 8년(1871)에 귤림서원과 함께 훼철됐다.

 

   오현단 맞은편 골목길 난간에는 옛 제주의 모습을 담은 사진들이 전시되어 있다.

 

길은 점점 가팔라졌다. 길 건너 오른쪽으로 제법 장한 나무가 우거진 곳에 건물이 몇 채 보이고 그 뒤로 거무튀튀한 높은 성벽이 모습을 드러냈다. 오현단이었다.

 

  1960년대 산지천이 복개되기 전의 빨래터 풍경을 담은 사진

 

비탈이 진 난간을 따라 제주의 옛 모습을 담은 사진들이 걸려 있었다. 지나온 산지천의 복개되기 전 빨래터 풍경이 이채롭다.

 

   오현단 맞은편 골목길 난간에는 옛 제주의 모습을 담은 사진들이 전시되어 있다.

 

성벽이 있는 이곳은 제법 지대가 높다. 동문시장이 난간 아래로 보이고 멀리 제주 시내가 한눈에 들어온다. 산지천으로 흘러가는 계곡 물소리가 들리는데 옛날 이곳엔 홍문을 짓고 서남쪽 높은 언덕에 남수각을 세웠던 자리다. 홍수 등으로 여러 차례 유실되고 복원되었다가 1927년 대홍수로 무너진 뒤 지금에 이르고 있다.

 

   영주십경 중의 하나였던 귤림추색 자리임을 알리는 표지석

 

예나 지금이나 귤은 제주의 특산품이다. 길가에 이곳이 영주십경 중의 하나인 귤림추색(귤림의 가을빛)의 옛 터임을 알리는 표지석이 있다. 영주십경은 제주의 아름다운 풍광 10곳을 일컫는 말이다. 역대로 많은 문인들이 제주 8경, 10경 등을 뽑아왔으나 그중 제주 전역을 대상으로 꼽은 제주의 시인 매계 이한우가 선정한 것이 일반적이다.

 

감귤은 <탐라지>에 실린 종류만 해도 10여 종에 달하며 예부터 진상품이었다. 제주 도내에는 감귤을 재배하는 과원이 여러 군데 있었는데 이곳의 과원이 가장 넓었으며 가을에 귤이 익을 때 성에 올라 이 일대를 내려다보면 황금물결이 일대 장관이라 하여 ‘귤림추색’이라고 불렀다. 감귤이 진상될 때에 감제(柑製)가 실시되기도 했다. 요즈음은 한라산 남쪽의 ‘산남귤’을 알아주는데 서귀포의 감귤박물관에 가면 전 세계 140여 종에 달하는 감귤 품종을 볼 수 있다.

 

  오현단 인근에 옛 제주성의 흔적이 가장 잘 남아 있다.

 

오현단과 마주하고 있는 ‘귤림추색’을 알리는 비석 사이에 넓은 도로가 나 있다. 도로 양쪽으로 옛 제주성이 제법 잘 남아 있다. 제주성은 제주 시내의 중심지를 빙 둘러 축조되었는데,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둘레가 4394척(약 1424m), 높이가 11척(약 3.3m)에 동문․서문․남문이 있었다고 한다.

 

   제주성은 둘레가 4394척(약 1424m), 높이가 11척(약 3.3m)에 동문․서문․남문이 있었다고 한다.

 

제주성은 언제 처음 쌓았는지는 분명하지 않은데 다만 태종 11년(1411) 정월 제주성을 정비하도록 명했다는 기록이 <태종실록>에서 확인되는 것으로 보아 적어도 1411년 이전에 축조되었음을 유추할 수 있다.

 

   제주성 남문지 일대의 모습, 오른쪽 아래로는 산지천이 흐른다.

 

이후 여러 차례 성곽을 확대하거나 높이고 홍수에 대비해 간성을 축조하는 등 정비가 이루어지기도 했으나 일제강점기에 제주성은 철저하게 파괴된다. 1925년부터 1928년까지 제주항을 개발하면서 성벽을 허물어 바다를 매립하는 골재로 사용했다. 그나마 이곳은 바닷가에서 멀리 떨어져 간신히 160m 정도의 성벽이 남아 있게 되었다. 성곽에 계단이 있으나 오를 수 없도록 막아 놓았다. 계단이 있는 쪽이 성의 안쪽이겠다.

 

 

제주시에서 기념물 제3호인 제주성터를 복원할 계획을 가지고 있다니 그 옛날 제주의 영화는 아니더라도 자취만이라도 느낄 수 있었으면 좋겠다. 영주십경으로 꼽혔던 귤림추색의 멋진 풍광과 제주가 낳은 문인 고득종을 모신 황현사와 오현단의 깊은 역사가 오래 새겨지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다.

 

   조선 세종 때의 제주 출신 문인 고득종을 모신 사당 황현사. 뒤로 제주성이 보인다.

 

                 추천은 새로운 여행의 시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