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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의 땅, 제주도

은빛 억새 물결, 제주 따라비오름이 특별한 이유

 

 

 

은빛 억새 물결, 제주 따라비오름이 특별한 이유

-제주 억새여행에서 빼놓을 수 없는 따라비오름

 

가시리로 갔다. 멀리 조랑말박물관이 보였다. 너른 평원에 솟은 박물관은 마치 로마의 원형경기장 같기도 하고 그 둥근 모양이 야외극장을 꼭 닮았다. 우리나라 최초로 마을에서 세운 리립박물관이라는 조랑말박물관 야외전망대에서 보니 따라비오름이 봉긋하다.

 

 

이곳은 그야말로 광활하다. 제주의 중산간이 구릉성 초지임을 진즉에 알았지만 이곳처럼 넓디넓은 평원은 제주에서도 좀처럼 보기 힘든 풍경이다. 이런 너른 초지대는 예전부터 주목받아 갑마장이 있었다.

 

따라비오름 가는 길은 초입부터 억새가 흐드러지게 피어있었다

 

갑마장은 조선시대 때 최고 품종의 말을 키우던 곳으로 지금도 말 사육장으로 사용되고 있다. 따라비오름, 큰사슴이오름, 번널오름을 연결하는 광활한 초지대의 갑마장은 1794년에서 1899년까지 100년가량 유지되면서 산마장과 인근 국마장에서 길러진 말 중 갑마(甲馬), 즉 최상급의 말들을 조정에 보내기 위해 집중적으로 길렀던 마장이다.

 

노루가 뛰어다니고 있다

 

지금도 큰사슴이오름, 새끼오름, 모지오름, 장자오름, 영주산 등의 오름이 진을 펼치고 있는 이곳에 제동목장, 혜림목장, 신흥목장, 부흥목장 등 방목지가 들어서 있다. 인근에는 알뜨르 비행장과 함께 제주의 신공항으로 떠오르고 있는 정석비행장이 자리하고 있다. 최근 이곳에는 갑마장길이 생겨 옛 역사의 흔적을 따라 걸을 수 있다.

 

목장 철문을 넘어 오름으로 가다

 

따라비오름으로 향했다. 조랑말박물관에서 돌무더기를 뜻하는 ‘머체’ 위에 ‘행기물(녹그릇에 담긴 물)’이 있었다는 ‘행기머체’에서 곧장 따라비오름으로 가는 길도 있었지만 내비게이션이 자꾸 고집을 피워 혹시나 해서 따라갔더니 블라제펜션이 나왔다.

 

오직 직립보행자만이 지나갈 수 있는 'ㄹ'자 목장 출입구. 최근 에 만들어져 마소 등 네 발로 걷는 짐승은 출입이 불가능하다

 

이리 보고 저리 봐도 오름 가는 길을 알 수 없었다. 건물 끝에 길이 보였으나 장담할 수는 없었다. 펜션 주위를 기웃거리다 마침 주인으로 보이는 사내가 있어 길을 물었다.

 

“숙대낭 보고 가다 갈림길에서 왼쪽으로 가시오. 쭉 가다 보면 철문이 나올 게요. 그걸 넘으면 오름 가는 표지판이 보일 겁니다.”

 

사투리가 심하지는 않아 대충 알아들을 수는 있었으나 문제는 ‘숙대낭’이었다. 숙대낭이라? 처음엔 갸웃거렸지만 길을 가다 보니 이내 의문이 풀렸다. 알고 보니 삼나무였다. 이곳에는 목장의 경계를 표시한 돌담인 ‘잣성’이 많은데 이 잣성을 따라 삼나무가 방풍림으로 심겨져 있다.

 

따라비오름을 오르다

 

숲에서 ‘푸다닥’ 놀라는 소리가 나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노루였다. 전날 한라산 둘레길에서도 그랬고 이곳에도 노루가 지천이었다. 노루 두어 놈이 뜀박질을 멈추고 잠시 노려보더니 이내 숲으로 사라졌다.

 

 

길은 조붓했다. 초입부터 억새가 흐드러지게 피어있었다. 바퀴가 지난 자국만 오롯이 남겨둔 채 온통 하얀 억새꽃이 바람에 하늘거렸다. 멀리 오름이 보였지만 여기서 걸음을 멈추고 싶었다. 산 위에는 능선을 따라 오름을 만끽하는 무리들이 멀리서도 제법 보였지만 이곳은 가슴까지 자란 억새에 나 혼자 빠져 있었다.

 

 

얼마 가지 않아 주인의 말대로 철문이 나왔다. 굳게 닫힌 철문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돌담을 넘었다. 돌담을 넘자마자 따라비오름을 가리키는 표지판이 나왔다. 조랑말박물관 입구의 행기머체에서 오는 길과 만난 것이다.

 

멀리 한라산 백록담이 희미하게 보인다

 

이내 ‘ㄹ’자 모양의 출입구가 나왔다. 오름의 출입구인 셈인데 사람만 출입이 가능하고 목장의 마소들이 드나들지 못하도록 지그재그로 고안된 문이다. 오로지 두 발로 걷는 동물만 출입이 가능하다. 이 문을 볼 때마다 직립보행이 진화의 한 증거가 아닌가 하는 다소 생뚱맞은 생각도 하게 된다.

 

 

짙은 숲이 나왔다. 말라 버린 계곡을 건너니 길은 너덜길. 터덜터덜 길의 박자에 맞춰 걷다 보니 다시 잣성이 보이고 ‘ㄹ’자 출입문이 나왔다. 삼나무 숲을 지나 ‘쫄븐갑마장길’임을 알리는 곳에서 잠시 오름을 쳐다보고 가파른 계단을 올랐다.

 

 

본격 오름을 오르기 전에 연습 삼아 빙글빙글 돌아오던 길은 끝나고 가파른 계단이다. 키 작은 관목들이 이따금 하늘과의 경계를 이루더니 어느새 온통 억새에 자리를 넘겨주었다. 오는 길에 사람 하나 마주치지 않았는데 오름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와 있었다. 특히 젊은 연인들이 유독 눈에 띄었다.

 

 

저마다 풍경에 빠져 말을 잊고 있었다. 간혹 깔깔거리는 소리도 이내 깊은 분화구에 묻혀 버렸다. 능선에 서는 순간 ‘아’ 하고 나도 모르게 짧은 탄성을 질렀다. 잠깐 올랐을 뿐인데 이렇게 탁 트인 시야라니...

 

풍력발전기와 목장을 구분하는 잣성을 따라 심어진 삼나부 방풍림

 

사방을 한 바퀴 돈 눈동자는 자연 아래로 향했다. ‘아니, 이럴 수가’ 마치 뫼비우스의 띠처럼 유려한 곡면을 보이는 오름은 부드럽기 이를 때 없었다. 뭐라고나 할까. 용눈이오름이 부드러우면서 섬약한 곡선이었다면 따라비오름은 풍만하면서 관능적이기까지 했다. 난 늘 제주의 오름을 볼 때마다 여인의 몸을 떠올린다. 여인의 허리처럼 잘록하면서 불쑥 솟은 그 곡선에 무한한 찬사를 보낸다. 온통 은빛의 물결이 일고 있는 억새도 잠시 잊을 정도로 그 유려한 곡선에 한없이 빠져들었다.

 

 

 

더군다나 크고 작은 여섯 개의 봉우리를 부드러운 등성이가 잇고 그 안에 푹 팬 세 개의 분화구는 세상 어디서도 볼 수 없는 장관이었다. 봉우리와 등성이, 굼부리를 잇는 억새 오솔길은 마치 꿈길 같이 부드러웠다.

 

 

말굽 같이 푹 팬 굼부리는 마치 설문대할망이 밀가루 반죽을 빚다가 주먹으로 꽝 내리친 형상이다. 어찌 보면 질펀해 보이고, 어찌 보면 풍만해 보이고, 또 어찌 보면 관능적이까지 한 오름의 맨살을 보고 있자니 마음도 갈팡질팡해진다.

 

음흉하기도 한 듯하고 탐욕스럽기도 하고 그저 애틋하기도 한 마음을 달래러 오름을 더듬기로 했다.

 

 

따라비오름은 서쪽의 새별오름과 함께 가을이면 억새가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구불구불 이어지는 오름의 능선을 따라 걸으니 그제야 억새가 보인다. 잔뜩 흐린 날씨도 서서히 걷히고 한라산이 희미하게 선의 자국으로 보였다. 두터운 흐린 대기를 뚫은 햇살이 사정없이 억새에 내리쬐었다. 은빛이 출렁거렸다.

 

따라비오름의 매력은 이 아름다운 곡선에 있다

 

이 따라비를 어떤 이는 오름의 여왕이라고도 하고 어떤 이는 오름의 공주라고도 한다. 그러나 가을날의 따라비는 여왕도 공주도 아니었다. 인간사의 이름으로 그 아름다움을 제대로 표현하기는 애초 불가능해 보였다.

 

따라비오름의 매력은 이 아름다운 곡선에 있다

 

나무 하나 없이 오로지 억새와 풀로 이뤄진 따라비오름은 햇살과 만나 가장 절정의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었다. 다녀간 이들이 제주 억새여행에서 이곳을 빼놓을 수 없는 이유를 인제 알겠다.

 

따라비오름의 매력은 이 아름다운 곡선에 있다. 푹 팬 세 개의 굼부리(분화구)와 여섯 개의 봉우리 그리고 그것을 잇는 등성이의 곡면은 마치 아름다운 여성의 몸매 같다. 

 

따라비오름의 매력은 이 아름다운 곡선에 있다

 

 

마치 마법에 걸린 길처럼 이리저리 꼬인 길을 걷다 보면 어느새 정상이다. 길은 옆으로도 꼬이고 위아래도 꼬여 어디로 가더라도 다시 출발점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정상에 서니 사방이 탁 트여 중산간의 너르디너른 초원과 오름들이 멀리 병풍처럼 따라비오름을 둘러싸고 있다.

 

 

 

사슴이오름, 민오름, 부대오름, 부소오름, 거문오름, 새끼오름, 성불오름, 체오름, 안돌오름, 거슨새미오름, 비치미오름, 큰돌임이오름, 개오름, 높은오름, 백약이오름, 동거미오름, 좌보미오름, 모지오름, 영주산, 모구리오름, 병곳오름, 번널오름, 감선이오름, 설오름....

 

 

 

따라비오름은 가시리에서 북서쪽으로 약 3km 떨어져 있다. 해발 342m, 높이 107m, 둘레 2,633m, 면적 44만 8111㎡이다. 따라비는 ‘땅할아버지’라는 뜻으로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오름들이 어머니인 모지오름, 아들인 장자오름, 새끼오름이 모여 있는 중에 이 오름이 가장 격이라 하여 ‘따애비’로 불리다 ‘따래비’가 되었다는 것이다.

 

혹은 모자오름과 시아버지와 며느리의 형국이라고 하여 ‘따하래비’라고도 한단다. 다른 주장으로는 옛 우리말에서 ‘높다’라는 뜻의 ‘다라(달)’와 제주에서 산 이름에 쓰는 ‘비’와 합쳐진 말로 ‘높은 산’이라는 뜻의 ‘다라비’가 경음화되어 ‘따하라비’ 혹은 ‘땅하라비’로 풀이되어 한자어로 지조악(地祖岳)이 되었다고도 한다.

 

 

 

 

 

 

 

 

 

따라비오름의 매력은 이 아름다운 곡선에 있다. 광활한 초지 끝으로 수많은 오름들이 병풍처럼 따라비오름을 둘러싸고 있다.

 

 

희미한 한라산 실루엣

 

 

오름은 오르는데 30분, 내려오는데 30분, 한 바퀴 도는데 1시간이 걸렸다. 넉넉히 두 시간이면 느긋하게 오름을 둘러보고 돌아 나올 수 있다.

 

내려오면서 또 노루를 만나다. 한라산 중산간에는 노루가 지천이다.

 

따라비오름은 교래리에서 산굼부리를 거쳐 비자림으로 가는 1112번과 성읍에서 의귀로 가는 1136번 사이의 녹산로로 가면 된다. 갑마장과 녹산장을 관통하는 녹산로는 제주에서 가장 아름다운 유채꽃길로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에 꼽히기도 했다.

 

 

 

                             추천은 새로운 여행의 시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