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경전선, 남도 800리

"중국산이면 500배 변제"...대단한 자신감이네요

 

 

 

"중국산이면 500배 변제"... 대단한 자신감이네요

[경전선 남도 800리 삶의 풍경⑩소설 <토지>의 하동읍내시장과 평사리의 가을

 

 

삼다사재첩의 이삼임할머니

ⓒ 김종길

 

 


"중국산? 내가 싫어요. 먹어본 적도 없소."

큰 통에 그득 담긴 재첩을 보며 여행자가 중국산이 아니냐고 물었더니 주인 이삼임(68)씨가 부드럽게, 그렇지만 단호하게 말했다.

지난 10월 7일 오전 10시 17분, 하동역에 도착했다. 봄이면 역사가 온통 벚꽃으로 뒤덮이는 하동역은 한산했다. 철로 변에 무더기로 피어난 코스모스가 가을빛에 하늘거린다. 2일과 7일에 전라도와 경상도가 만나는 하동읍내시장 오일장을 찾았다.

섬진강 재첩이 아니면 500배를 변상하겠다?

하동역에 내려 터미널에서 평사리 가는 버스시간을 알아보고 읍내시장으로 발길을 돌렸다. 축협 골목으로 들어서자마자 걸음을 멈췄다. 길가에 재첩이 가득 담긴 커다란 통이 어지러이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 업소에는 섬진강 재첩만 취급합니다. 만약 섬진강 재첩이 아니면 구입가격의 500배를 변제해 드립니다.'

단박에 재첩을 파는 걸 알 수 있는 가게에 들어서니 제일 먼저 눈에 띈 문구다. 이 정도로 자신감을 가지고 있는 가게라면 중국산 재첩은 말할 것도 없고 섬진강 재첩만을 취급한다는 주인의 말을 믿을 수밖에 없는데도 한 번 의심을 가진 사람의 마음이라는 게 쉽게 인정하려 들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재차 확인하려다 주인의 단호한 말에 더 이상 물어보지 못하고 쭈빗거렸던 것이다.

섬진강 재첩만을 고집한다는 한다사 재첩
ⓒ 김종길

 


이 가게는 <한다사 섬진강 재첩>이다. 시장에서 열에게 물어보면 열 모두 추천하는 곳이 이 집이다. <한다사 섬진강 재첩>을 운영하는 이삼임 할머니는 하동 화개에서 살다 30년째 하동에서 살고 있다. 종업원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보기에도 수더분하여 누군가 여쭈었더니 모두 아들이고 딸이고 사위란다.

식당 안에선 재첩을 포장하는 일로 바빴다. 한 명이 삶은 재첩을 큰 통에 내어오면 딸은 재첩과 국물을 적당한 비율로 섞어 조심스럽게 봉지에 담고, 사내는 기계로 봉지를 밀봉한다. 매일 저녁 10시부터 재첩을 삶기 시작하여 다음날 판단다. 가격은 1봉지에 4000원, 작은 통 1되는 1만5000원, 큰 통 2되는 3만 원이다.

옆에 서 있으니 재첩을 한 대접 그득 담아 맛보라고 한다. 괜찮다고 사양을 해도 인정이 넘친다. 나중에 밖으로 나왔더니 이번에 이삼임 할머니가 다시 재첩을 한 사발 떠주며 먹으라고 했다. 지나가는 사람들에게도 아주 거리낌 없이 맛보게 했다. 섬진강 재첩이라는 확신은 단호했지만 인정은 넘치고 넘쳤다.

"지금도 하정마을에 가면 재첩이 배에 가득해요. 읍내에 있는 군청, 경찰서에서 선물용으로 사가는 것은 죄다 우리 가게 거요. 중국산 그거 작살도 못 써요. 재첩은 보통 30kg이 1가마인데 8만 원에서 12만 원 정도 한다 말이요. 건데 중국산은 1가마에 2만 원 정도밖에 안해요. 국내산 10가마면 중국산 30가마 넘게 나오요. 돈 보고, 욕심 내고 하면 섬진강 재첩 고집하겠소. 돈은 안 되는데 마음은 편해. 밥은 먹고 사니께. 중국산 먹어 보지 않았어. 먹고 싶지도 않고 먹어봐야 맛을 알제. 내가 맛이 없어. 중국산 일 없어."

할머니의 얘기대로라면 재첩은 주로 5~6월이나 10~11월에 잡는데 이 때가 가장 맛도 좋다고 한다. 이 기간을 벗어나면 대개 알도 작고 맛도 쓰다고 한다, 재첩도 모래 속에 들어가 버리고.

중국산과 국산, 특히 섬진강 재첩과는 껍질과 막으로 구분한다고 한다. 일반사람들이 구분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덧붙였다. 다만 섬진강 재첩은 모래에서 자라 씹을 때 지금거림이 있단다.

하동읍내시장 한복판 우물의 정체는?

하동읍내시장 오일장은 소설 <토지>를 전면에 내세우고 있다. 섬진강 모래밭에 푹푹 빠지는 발만큼이나 허둥대던 사랑... 지금이라도 용이와 월선이가 장터 어딘가에서 불쑥 나타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장은 처음인데도 외려 친숙하게 다가온다.

시장에서 만나 서로의 안부를 묻는 할머니들
ⓒ 김종길

 


한다사 식당에서 재첩 한 사발 얻어먹고 시장으로 걸음을 옮겼다.

"아프지 마라. 인자 아프모 안 된다."

할머니 세 분이 길 가는 것도 잊은 채 굳은 표정으로 마주보고 있었다. 얼굴로 봐서는 누가 아픈지 모를 정도로 서로 바라보는 모습이 애틋하다.

'○○미곡'이라고 적힌 싸전에는 고무 대야에 곡물들이 그득하다. 맞은편 인도 끝에는 할머니들이 삼삼오오 줄을 지어 밭에서 따온 고추며, 호박이며 깻잎 따위를 팔고 있다. 오일장인 일요일인데도 시장은 한산했다.

'하동공설시장'이라고 적힌 다소 낡은 간판을 지나 시장 안으로 들어섰더니 제법 너른 공터가 나왔다. 시장 한복판에 있는 공터는 마치 광장 같아서 시장의 어느 방향으로도 갈 수 있게 길이 사방으로 나 있었다. 이곳에서 뜻하지 않은 것을 보게 됐다.

시장 한복판에 있는 우물은 그 역사가 꽤나 오래되었다고 한다. 몇 년 전에 복원했다.
ⓒ 김종길

 


처음엔 원두막 모양이라 그냥 쉼터 정도로 여겠는데 가까이 가보니 지붕 아래로 우물이 보였다.

"우물요. 한 100년 넘었을 게요."

우물에 대해 묻자 할머니 두 분은 고개를 저었고 참기름 집에서 나온 이가 아는 체를 했다.

"옛날 우리가 학교 다닐 때만 해도 두레박으로 퍼서 먹다가 상수도가 들어오고 하니 우물이 필요 있어요? 한 20년 전쯤인가 우물이 막혔지. 그러다 3, 4년 전에 시장 활성화를 위해 옛 모양 그대로 다시 복원을 한 거요."

잠시의 막힘도 없이 술술 말을 이어가는 그의 행적이 궁금하여 무슨 일을 하시냐고 했더니 금방 나온 참기름 집을 가리키면서 "이 집 주인이요"라고 했다. 떡 방앗간도 같이 운영하는 그는 김주환(67)씨였다. 떡 방앗간도 참기름 집도 모두 '새시장'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었다.

"여기서 참기름만 40년을 해왔소. 건물도 옛적 그대로지요. 한 57, 8년쯤 되었지 아마."

시선을 멀리 둔 그는 옛 이야기들을 하나씩 꺼내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이야기하는 품이 예사롭지 않아 다른 일도 하느냐고 묻자 하동시장 번영회 회장이란다. "어이쿠, 회장님인 줄 모르고 죄송합니다"라고 했더니 무슨 별 말씀이냐, 며 펄쩍 뛰었다.

하동시장번영회 회장 김주환 씨가 그의 가게 앞에서 참깨 껍질을 날리고 있다.
ⓒ 김종길

 


인사를 하고 가게 안을 들어섰는데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운 깨알 같이 적은 연락처가 보였다. 일종의 고객 명부인 셈인데 족히 수백 명은 됨직한 전화번호가 빼곡히 적혀 있었다. 그가 마당발임을 단박에 알 수 있는 명부였다. 근데 저렇게 적어 놓으면 찾는 일도 예사가 아니겠다 싶었다.

"지금은 전부 중국산이요. 올해 깨 작황이 좋지 않아 국산은 씨가 말랐어."

참깨를 볶은 후 키질을 하듯 고무대야에 담긴 참깨 껍질을 바람을 이용하여 날리던 그가 말했다. 하동 읍내에서 태어난 그는 하동 토박이다. 자신이 회장으로 있는 번영회에는 모두 7명이 근무하고 있단다.

"예전 하동시장은 그 뭐시기냐. 전국에서 꼽는 3대 시장이었지. 한창 잘 나가던 때는 시장이 17만 평이었소. 건데 지금은 5만 6000평으로 3분의 1이나 줄어 버렸어. 오늘 같이 토, 일요일이면 시장이 텅텅 비어 버려요. 그나마 월요일에서 금요일까지는 장이 잘 되는데 주말이 되면 사람들이 전부 외지로 나가 버려요. 백화점이나 마트에 가는 거지."

나중에 둘러보았더니 시장 주위에는 대형 마트가 네 곳 정도 보였다. 하동시장의 면적은 1만 3625㎡이며, 연면적은 4781㎡인데 마치 시장을 포위하듯 사방에 있는 마트를 보니 왠지 마음 한구석이 편하지는 않았다.

섬진강 물길 따라 전라도와 경상도를 잇던 시장은 옛말

하동읍내시장은 소설 <토지>를 전면에 내세우고 있다.
ⓒ 김종길

 


하동시장은 조선말까지 만해도 전주시장, 김천시장과 함께 영남의 3대 시장으로 꼽혔다고 한다. <하동군사(河東郡史>에 따르면, 하동읍내 시장은 1703년에 두치진(현 송림이 있는 하동군 하동읍 광평리)에 세워졌다가 1년 만에 폐시되고 1704년부터 1730년까지 26년 동안 구 읍내시장에서 상거래가 이루어졌다. 그 후 1915년에 당시 이장희 하동군수와 30여 명의 유지들이 하동군 하동읍 중앙동에 현대화된 시장터를 마련한 후 해량진시장과 광평시장을 이곳으로 이전해 왔다고 한다.

이후 3일과 6일에 오일장 형식으로 장이 섰으나 1935년경부터는 2일과 7일로 변경이 되었으며 1951년에는 하동군 하동읍 읍내리 249번지 현 시장 위치로 옮겨왔다. 난전 형태의 장옥으로 섰다가 섬진강이 범람하는 재해 등으로 해마다 피해가 있자 1976년 하동시장을 공설 시장으로 등록하고 새롭게 단장을 해 오늘날의 현대식 시장으로 변모됐다.

지리산과 남해 그리고 섬진강이 바로 곁에 있는 하동장은 산과 물, 들판에서 나는 풍부한 산물들이 모이는 곳이다. 지리산의 산나물과 약재, 남해의 해산물, 섬진강의 민물고기 등이 주를 이루고 있다. 특히 녹차·감·밤·매실 등 하동의 특산물이라 할 수 있는 것들이 주로 거래되고 있다.



옛날 섬진강 물길이 바다까지 이르면서 그 물길 따라 화개, 범포, 해량, 광평 등 시장들이 형성됐다. 다리 건너 광양 땅 진월, 다압, 진상, 옥곡 사람들까지 다압나루에서 강을 건너 읍내시장에 왔단다. 섬진강의 광평나루와 해량초구는 늘 전라도와 경상도 사람들이 뒤섞여 붐볐다고 하니 격세지감이다. 번듯한 다리가 놓인 지금이야 남아있는 건 관광지가 된 화개장터와 읍내시장뿐이다.

동네부엌·영남신발·여울목식당·통일상회·평화상회·화개청과·매일상회·현대신발·하동순대·꼬마친구·호야상회·한성상회·꼬까방·덕성미곡상회·다래탕재원 등 시장에 늘어선 점포에는 세월의 흔적이 켜켜이 묻어 있다.

주말인데도 외지인도 별로 없고 이곳 사람들마저 외지로 빠져나갔는지 읍내시장은 한산했다. 장날이면 열린다는 문화공연도 이날은 볼 수 없었다. 시장 허름한 식당에서 칼국수 한 그릇을 맛나게 먹고 12시 40분 쌍계사 가는 버스에 올랐다.

하동 읍내 시외버스터미널, 버스를 이용하는 이들은 대개 노인들이다.
ⓒ 김종길

 


시골버스 타고 간 하동 평사리 들녘 풍경

터미널의 승객이라고는 노인들뿐이었다. 촌로들은 잘 들리지 않는 탓에 몇 차례 언성을 올리고서야 버스에 오를 수 있었다. 악양 평사리를 갈 작정이다. 꽃잎 흐드러지는 봄의 왈츠는 없을지언정 가을이 깊어가는 소리쯤은 들을 수 있겠다 싶어서다.

섬진강을 옆구리에 끼고 달리던 버스는 어느새 악양 들판으로 들어섰다. 들판은 황금빛이고 산기슭 마을에는 붉은 감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임금에게 진상했다는 악양의 특산물 대봉감이었다. 대봉감은 이미 특허 출원이 되었을 정도로 당도가 뛰어나다. 올해만 110억의 매출을 올릴 것이라고 한다.

대봉감은 옛날 임금에게도 진상했다는 악양의 특산물이다.
ⓒ 김종길

관련사진보기


 

악양의 시골버스정류장
ⓒ 김종길

 


강에서 안으로 푹 휜 악양 들판을 에두르던 버스가 악양면 소재지인 정서리에 섰다. 입석마을쯤에서 내려 봉대마을을 지나 한산사로 향했다. 길가에는 둘레길을 알리는 표지목이 곳곳에 서 있었다. 멀리 부부송이 보인다. 소설이 현실이 된 평사리에서 이 부부송은 이젠 서희와 길상의 나무가 되었다. 봄에는 자줏빛 자운영이 온 들판을 뒤덮더니만 오늘은 분홍색, 하얀색의 코스모스가 황금들판의 가장자리를 메운다.

한산사 산신각 댓돌에 앉아 풍경소리를 들어보라

평사리를 멀찌감치 두고 한산사 가는 길을 잡았다. 자가용이면 5분이면 갈 거리를 느릿느릿 걸어가니 길은 쉬이 끝나지 않는다. 아직은 볕이 강해 땀이 주르륵 흘러내린다. 도로 한쪽으로는 탈곡을 한 벼가 널려 있다. 부지런히 당그레질을 하는 농부의 손이 바쁘다. 관광객들이 이리저리 헤집고 다녀 반들반들해진 산비탈 밭에도 가을일이 한창이다. 농부들은 날씨가 추워지기 전에 잠시의 짬이라도 부지런히 놀려야 한다.

악양들판의 가을은 황금빛 논과 길가의 코스모스다.
ⓒ 김종길

 


 

악양들판의 부부송은 이제 평사리의 명물이 됐다.
ⓒ 김종길

 

 

한 삼십여 분 지났을까. 전망대가 보였다. 이곳에선 부부송을 가운뎃점으로 하여 악양 들판이 한눈에 들어온다. 지금은 번듯한 전망대가 있어 가릴 것 없이 탁 트인 시야가 시원하다. 세 차례의 태풍이 지났음에도 들판은 황금빛이다. 그 속이야 검게 타들었겠지만 그래도 가을이라 매번 그랬던 것처럼 제빛을 내고 있었다.

강의 동쪽에 있어 '하동'이라 불리는 고을에 있는 이 악양은 중국의 지명을 본떠 붙여진 이름이다. 들판 한쪽으로 동정호가 보인다. 소정방이 중국의 동정호와 비슷하다 하여 이름 붙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팔경의 시초라 일컫는 '소상팔경'에 동정호와 악양루를 빼고 이를 수 있음이랴.

한산사에 올랐다. 전망대 바로 뒤에 있음에도 이곳은 찾는 이가 없다. 고소산성은 아니 오르더라도 한산사에는 꼭 가볼 일이다. 한산사 산신각 댓돌에 앉아 풍경소리를 들어보라. 악양 너른 들판과 능선물결, 굽이치는 섬진강을 내려다보며 풍경소리에 깊이 침잠해보라.

평사리에 가면 한산사에 올라 풍경소리를 꼭 들어볼 일이다.
ⓒ 김종길

 


한산사 앞 전망대에 서면 섬진강과 악양들판이 한눈에 들어온다.
ⓒ 김종길

 


평사리의 가을은 깊어만 가고...

한산사를 내려와 최참판댁으로 향했다. 허구가 현실이 된 평사리엔 최참판댁과 용이네 집, 칠성이네 집, 김훈장댁... 소설 <토지>의 마을이 그대로 재현되어 있다. 작은 밭뙈기라도 있을라치면 어른 주먹만한 악양의 명물 대봉감이 주렁주렁 달려 있는 풍경에 가을이 깊어 감을 알겠다.

할머니 한 분이 힘겹게 비탈길을 걸어 마을에 들어서고 있었다. 짐이라도 들어줄 요량으로 말씀을 드렸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신다. 유모차 모양의 손수레가 할머니의 지팡이 노릇을 해서 그마저도 없으면 걸음을 옮긴 재간이 없어서다.

평사리 초가집의 가을
ⓒ 김종길

 


평사리의 가을 풍경
ⓒ 김종길

 


조붓조붓한 돌담 너머의 초가에는 가을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부지런히 따서 말린 옥수수며 수수, 고추 따위가 가을 햇볕에 바짝 말라가고 있다. 초가 툇마루에는 마을 사람 몇이 모여 대나무 바구니를 엮고 있다. 예전 장이 설 때면 이 또한 심심찮은 벌이가 되었겠지만 지금은 이곳을 찾는 관광객들의 소용이다.

여름 내내 잘 버텨온 호박은 다 늙어 지붕에 매달려 있기도 힘겹다. 제풀에 떨어지기 전에 바지런한 농부의 손에 따져 바람 자는 골방을 차지할 것이다. 가을걷이가 끝나면 황금빛의 볏짚으로 지붕은 새로 단장을 할 것이다. 그때는 꽃도 지고, 잎도 떨어지겠지만 추운 겨울 따뜻함이 그대로 전해질 터, 아무런 걱정이 없다.

최참판댁 별당채에선 별당아씬 간 데 없고 난데없이 가야금 소리가 들린다. 사랑채엔 최치수가 아닌 명예참판이 글을 읽고 있다. 그 깊고 고요한 글 읽는 모습에 마치 시간을 거슬러 온 느낌이다.

최참판댁 별당채에선 금방이라도 카랑카랑한 서희의 목소리가 들릴 듯하다.
ⓒ 김종길

 


최참판댁 사랑채에는 최치수 대신 명예참판이 글을 읽고 있었다.
ⓒ 김종길

 


사랑채 누마루에 서니 너른 악양 들판이 한눈에 들어온다. 멀리 지리산 삼신봉에서 흘러내린 산줄기가 시루봉 인근에서 두 갈래로 갈라져 악양 들판을 에워싸고 그 너머로 섬진강이 흐른다.

마을로 나왔다. 역시나 붉은 대봉감, 아직 지지 않은 늙은 호박꽃이 따사로운 가을 햇볕을 쬐고 있다.

"오늘 아니면 없어."

밤을 팔던 할머니는 다음에 사겠다는 여행자의 말이 아쉽고 서운한 모양이다. 배낭에 여유를 두지 못한 게 못내 죄스럽다.

관광지가 된 평사리는 가게들이 즐비했다. 지붕 위에는 토란대가 토란토란 익어가고 사다리를 부지런히 오르내리는 마을 아낙의 발길은 따사롭기만 하다. 늘 그렇듯이 사람이 몰리는 건 최참판댁 주위뿐이다. 길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이곳도 여느 시골처럼 한갓지다.

상평, 하평 마을의 오롯한 돌담길을 걸었다. 어느 시인은 이 돌담길을 '어머니 눈웃음 닮은 돌각담 길 조붓조붓 나 있다'고 했다. '끊어진 세상의 길을 잇는 저렇게 예쁜 돌각담'에 오늘은 앵두꽃 대신 노란 탱자가 알알이 불을 밝힌다. 가을햇볕 한 줌 돌각담에 들어섰다. 3시 20분, 봉대리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렸다.

최참판댁 누마루에 서면 악양들판과 섬진강 물줄기가 한눈에 들어온다.
ⓒ 김종길

 


평사리도 관광지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이렇게 한적한 돌담길이 나온다. 탱자와 대봉감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 김종길

 

                 추천은 새로운 여행의 시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