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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전선, 남도 800리

철도여행자의 순례지, 경전선 원북역의 마지막 풍경

 

 

 

철도여행자의 순례지, 경전선 원북역의 마지막 풍경

 

밀양의 삼랑진과 광주의 송정역을 잇는 경전선은 남도 800리다. 모든 것이 빠른 요즈음에 시간의 흐름을 더디 붙잡아 매고 있는 곳이 경전선이다. 그나마 삼랑진 마산 구간은 복선화 되었고, 진주 마산 구간도 오는 10월 23일이면 복선화되어 기존의 13개 역 중 6개 역(진주, 반성, 군북, 함안, 중리, 마산)만 남고 7개 역(개양, 남문산, 갈촌, 진성, 수목원, 평촌, 원북)은 사라진다.

 

 

원북역도 그런 역 중의 하나다. 역무원도 없는 간이역. 승객이라고는 하루에 두서너 명이 고작인 이 작은 간이역이 사라지는 걸 당연히 여길 수도 있겠지만 수십 년 세월이 켜켜이 쌓인 녹슨 철로를 보면 무정한 마음을 감출 길은 없다.

 

 

경남 함안군 군북면에 있는 원북역은 1975년 1월 5일 영업을 시작한 무배치 간이역이다. 무궁화호가 하루 10회 정차하고 있다. 버스가 운행되지 않는 원북 마을의 유일한 대중교통이었던 역이 없어지면 지역 주민들의 불편이 이만저만이 아닐 터.(여행자가 확인한 바로는 군북 터미널에서 9시 25분에 출발하여 9시 35분에 원북에 도착하는 버스가 유일한 교통편이다.) 원래 원북역은 철도청(현 한국철도공사)의 계획으로 설립된 역이 아니라 원북리 마을 주민들의 요청으로 역을 열게 되었다.

 

 

지금도 역사 벽면을 보면 역 건물을 기증했던 명판이 한자로 붙어 있다. '기증 박계도(朴季道)'라고 적혀 있는 걸 확인할 수 있다. 역사 옆에는 그의 공덕비가 있다. 마을에서 만난 주민의 이야기에 따르면 박계도라는 인물은 원북 마을 출신으로 일제강점기 때 일본으로 건너갔다가 1980년대 초에 마을로 돌아왔다고 한다.

 

그는 마을 뒤편에 저수지를 파서 마을 사람들에게 임금을 지급하여 가난한 살림에 도움을 주었고 동시에 농업용수도 확보했다. 마을에 전기를 들여오는 비용과 군북면 면사무소 청사 건립에도 비용을 도운 것으로 전해진다. 원북역도 마을 주민들이 건물도 없이 기차를 타고내리는 걸 안타까이 여긴 그가 역사를 지었다고 하니 옛말에 나라도 못 하는 일을 개인이 해내었으니 송덕비를 세울 만도 하다. 그 후 일본으로 돌아간 그는 그곳에서 생을 달리했다.

 

 

텅 빈 역사는 제 운명을 아는지 쓸쓸하다. 비록 초라한 행색일지언정 그 수고로움이 깊이 배어 있다.

 

 

철로 옆에는 채미정이 있다. 주나라 백이와 숙제가 수양산에서 고사리를 캐먹으며 살았다는 고사를 인용하여 붙인 정자다. 생육신의 한 사람으로 함안을 대표하는 인물인 어계 조려 선생이 낙향하여 낚시와 소요로 여생을 보낸 곳이라고 한다. 원북마을에는 어계고택과 서산서원 등 그의 자취가 곳곳에 남아 있다.

 

 

채미정 옆 야트막한 산을 넘어 철로변에 섰다. 이곳은 봄이면 철도여행자뿐만 아니라 사진작가들이 자주 찾는 곳이다. 봄이면 흐드러지게 핀 벚꽃 사이를 뚫고 기차가 S자로 휘어진 철길을 느릿하게 들어오는 풍경이 가히 압권이다. 곡선과 느림을 상징하는 경전선의 대표적인 장면이 이곳에서 연출된다.

 

 

철도여행자에겐 이곳은 마치 기차여행의 순례지 같은 곳이다. 꼭 한 번 들러야 할 기차역이 있다면 누구든 원북역을 꼽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얼마쯤 기다렸을까. 화물열차가 굉음을 울리며 지나가더니 이내 조용해진다.

 

 

한참 후에 경적소리가 울렸다. 철로가 울리기 시작하더니 기차가 불빛을 밝히며 모퉁이를 돌아오고 있었다.

 

 

시각은 네 시 하고도 삼십여 분 지나 다섯 시가 채 되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구불구불한 철로가 추억의 저편으로 점점 사라지고 있었다.

 

 

삼랑진 기점 64.4km. 군북까지는 3.6km, 평촌까지는 5.8km. 군북역은 경남 함안군 군북면 사군로 1204-2(원북리 379-2)에 있다. 1975년 1월 5일에 영업을 시작해서 1988년 2월 9일 무배치 간이역으로 격하되었다가 오는 10월 23일 폐역이 된다. 

 

 

군북역과 평촌역 사이에 있는 원북역, 이젠 더 이상 기차가 서지 않는 간이역. 어쩌면 마지막 풍경이 될지 모르는 철로 위에서 여행자는 한참이나 서성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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