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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전선, 남도 800리

"노인 분들 짐 먼저 내리고 다음에 내립니다", 경전선800리

 

 

 

"노인 분들 짐 먼저 내리고 다음에 내립니다"

[경전선 남도 800리 삶의 풍경⑬]이상향을 찾아 지리산 화개골짜기를 가다

 

1968년 진주 순천 간 경전선이 개통되면서 영업을 시작한 하동역 전경과 이로 인해 밀양 삼랑진에서 광주 송정역까지의 경전선 전 구간이 개통되었다고 쓴 박정희의 친필 '경전선전통'기념비 ⓒ 김종길

 

 


경전선 하동역에서 내렸다. 하동역은 1968년 진주 순천 간 경전선이 개통되면서 영업이 시작됐다. 진주 순천 간의 구간이 개통됨으로써 밀양 삼랑진에서 광주 송정까지의 총길이 300.6km의 경전선 전 구간이 개통된 셈이다. 역사 앞에는 이를 기념하여 '경전선전통(慶全線全通)'이라고 새겨진 비석이 있다. 1968년 2월 7일 경전선 개통식 당시에 쓴 박정희의 친필이다. 옆 비문에는 시인 이은상이 짓고 서예가 이철상이 쓴 글씨가 새겨져 있다.

도롯가를 걸어 읍내로 향했다. 뻥 뚫린 4차선 대로와는 달리 골목에는 옛 풍경이 미루적거리는 곳도 더러 있다. 쌍계사 가는 버스는 악양 대봉감 축제로 만원이었다. 섬진강을 달리던 버스가 악양 들판으로 들어서자 승객들이 우르르 내렸다. 텅 빈 버스는 다시 시골을 달렸고 차창 너머로 남도대교가 보이더니 화개장터다.

텅 빈 공터에 있는 쌍계사 버스정류장
ⓒ 김종길

 


 

'경상도와 전라도를 가로지르는 섬진강 줄기 따라 화개장터엔….'

조영남의 노래가 들릴 듯한 화개장터를 지난 버스는 장렬한 벚꽃대신 쓸쓸한 낙엽만 날리는 십리 벚꽃 길을 역마살 난 나그네처럼 덜커덩 덜커덩 달렸다. '굽이굽이 벌어진 물과 돌과 산협의 장려한 풍경이 언제 보나 길 멀미를 내지 않는' 길이다. 이참에 칠불암까지 내달리면 좋으련만, 버스는 텅 빈 공터 앞에 섰다. 작은 버스정류장이 휑했다. '구례 차는 차표 없이 타세요. 화개·하동 차는 목화식당에서 차표 사세요.' 누군가 붙여 놓은 버스 시간표가 어설프다.

우리나라에서 차를 처음 심었다는 차시배지와 가장 오래되었다는 차나무는 예전에 보았으니 석문 옆 식당에서 산채비빔밥으로 느긋하게 배를 채웠다. '쌍계', '석문'이 최치원의 글씨라는 건 삼척동자도 아는 사실인데, 몇 해 전 보았던 나무장승은 보이지 않는다. 물론 그보다 더 오래되어 박물관으로 보내진 이곳 나무장승은 벽송사, 선암사 장승과 더불어 꽤나 유명했지만 말이다.

최치원이 지팡이로 썼다는 '쌍계', '석문' 바위글씨
ⓒ 김종길

 


 

천년 넘게 버텨온 쌍계사 진감선사 대공탑비

쌍계사는 그 이름처럼 절의 좌우 골짜기에서 내려오는 두 갈래의 물줄기 가운데 자리하고 있다. 신라 성덕왕 23년(724) 의상대사의 제자 삼법이 창건하였다고 전해진다. 육조 혜능의 정상(頂相, 머리)을 묻고 처음에는 절 이름을 옥천사라 했다가 문성왕 2년(840)에 진감선사가 중창하여 대가람을 이루었고, 정강왕 때 쌍계사라는 이름을 얻었다고 한다.

쌍계사의 전각들은 일주문, 금강문, 천왕문, 팔영루, 대웅전까지 거의 일직선상에 놓여 있다. '삼신산 쌍계사'라는 현액이 걸린 일주문은 화려한 다포집이다. 글씨는 해강 김규진이 썼다.

사천왕문을 지나면 팔영루 앞에 이른다. 진감선사 혜소가 중국에서 불교음악을 공부하고 돌아와 이곳 팔영루에서 섬진강에서 뛰노는 물고기를 보고 여덟 음률로써 범패를 작곡했다고 하여 팔영루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진감선사가 섬진강에서 뛰노는 물고기를 보고 범패를 작곡했다는 팔영루, 비좁은 앞마당에 근래에 세운 구층석탑과 석등은 그윽하고 고즈넉한 절집의 분위기를 깨뜨리고 있다.
ⓒ 김종길

 


팔영루를 돌아 경내로 들어서자 대웅전이 깊숙이 자리하고 있다. 그다지 크지 않은 건물임에도 그 탁월한 위치로 위엄과 당당함을 동시에 느끼게 한다. 앞뜰에는 최치원이 직접 짓고 친필로 쓴 '진감선사 대공탑비(국보 제47호)'가 있다.

최치원이 쓴 사산비명 중의 하나로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몇 안 되는 금석문 가운데 으뜸으로 꼽히고 있다. 모두 2417자의 해서체가 음각되어 있는데 글자가 매우 짜임새 있게 새겨져 있다. 글자의 운과 율에도 고저장단이 화려하게 어우러진 신품으로 평을 받고 있다.

비신은 임진왜란 때 왜병에 의해 파괴되어 금이 가 있으며, 한국전쟁 때의 총탄 자국이 남아 있다. 글자의 마멸도 심한 편인데 다행히 영조 때의 목판이 보존되어 있다. 현재는 보조 철틀로 겨우 손상을 막고 있다.

국보 제47호인 진감선사 대공탑비는 최치원이 쓴 사산비명 중의 하나로 우리나라 금석문 가운데 으뜸으로 꼽히고 있다.
ⓒ 김종길

 


 

절로 빙그레 미소 짓게 하는 마애불

대웅전 옆 명부전 앞에는 마애불이 하나 있다. 쌍계사에 갈 때마다 꼭 찾게 되는 마애불이다. 조각이 빼어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뭐 대단한 유물도 아닌데 쌍계사에 가면 잘 있나 싶어 꼭 안부를 묻곤 하는 마애불이다.

자칫 지나치기 쉬울 정도로 법당 한구석의 바위에 새겨진 마애불은 부처라기보다는 승려의 모습이라고 말하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일지 모르겠다. 깊은 산중의 어디에라도 있을 법한 큰 바위에 두툼하게 불상을 조각했다.

바위의 한 면에 두터운 돋을새김으로 불상을 새기고 그 주위를 깊이 파냈다. 마치 감실 안에 모셔진 부처의 느낌을 주고 있다. 머리가 크고 잔뜩 살이 오른 얼굴에 약간 웅크린 듯한 어깨와 두툼한 귀는 자비로움을 넘어 천진난만하고 소박하기까지 하다. 걱정 없이 잘 자란 부잣집 막내아들 같기도 하고 세상에 초연한 무심한 승려 같기도 하다.

대웅전 옆 명부전 앞에 있는 이 마애불은 절로 빙그레 미소 짓게 한다.
ⓒ 김종길

 


법의도 두툼한데, 두 손은 소맷부리에 넣고 단전 앞으로 다소곳이 끌어 모아 무언가를 움켜쥐고 있는 듯하다. 이 마애불을 보고 있자니 절로 빙그레 미소 짓게 된다. 이 쌍계사 마애불은 높이 1.35m 정도로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48호이다.

팔영루 왼쪽 계곡을 건너면 쌍계사 창건 설화와 관련 있는 금당과 팔상전이 있다. 이곳은 일주문에서 대웅전에 이르는 일직선상에서 비켜서 있는데 한때 일반인들의 출입이 금지된 곳으로 옛 쌍계사 터이기도 하다. 금당의 '육조정상탑', '세계일화조종육업' 현판 글씨는 추사 김정희의 글씨로 알려져 있다.

팔영루 왼쪽 계곡을 건너면 금당과 팔상전이 있는데, 옛 쌍계사 터로 알려져 있다.
ⓒ 김종길

 

 


지리산에서 아름답기로 소문난 국사암 오솔길

금당 옆 산길로 올라서면 불일폭포 가는 길이다. 처음엔 제법 가파르지만 한 십여 분 오르다 보면 길은 이내 평탄해진다. 이곳에서 갈림길이 나오는데 곧장 가면 불일폭포 가는 길이고, 왼쪽으로 난 길을 따라가면 쌍계사 부속암자인 국사암 가는 길이다.

국사암 가는 길의 오솔길은 지리산에서 가장 아름다운 숲길 중의 하나로 손꼽힌다. 불과 300m 남짓의 짧은 길이지만 늘 푸름을 잃지 않는 산죽군락, 우람하게 우거진 소나무, 노랗게 빨갛게 물든 활엽수들이 길을 가득 메워 그 운치가 제법 넉넉하다.

국사암 오솔길은 300m 남짓의 짧은 길이지만 지리산에서 가장 아름다운 숲길 중의 하나로 손꼽힌다.
ⓒ 김종길

 


짧은 오솔길은 금세 끝이 났다. 암자 앞에 이르렀다. 거대한 느릅나무가 여행자를 맞이한다. 진감선사가 짚고 다니던 지팡이가 살아나 천년을 이어왔다는 사천왕수(四天王樹)다. 그 이름처럼 굵은 가지가 네 갈래로 뻗어 있다. 한 눈에 보아도 예사롭지 않은 이 나무는 암자의 오랜 내력을 말해주고 있다.

느릅나무는 사천왕수라는 이름처럼 굵은 가지가 네 갈래로 뻗어 있다. 나무에는 커다란 생채기가 하나 있는데, 사람들은 이를 여자의 은밀한 부분을 닮았다면 수군거렸다. 장대한 사천왕수에 넋을 빼다가도 시선은 자연 아래로 향한다. 돌층계가 너무나 앙증맞게 예쁘기 때문이다. 사뿐사뿐 돌층계를 오르면 작은 일주문 아래로 고개 숙여 암자로 들어서게 된다.

호젓한 앞뜰에서 암자로 들어서니 특이한 구조를 가진 법당이 눈에 들어온다. 명부전, 칠성전 등의 법당들이 ㄷ자 건물 아래 엮어져 있다. 명부전, 칠성각은 불교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이래 민간신앙과 결부되어 온 한국적인 양식이다. 보통 사찰의 뒤에 위치하는 것이 상례인데, 여기서는 암자의 중심에 있다. 쌍계사의 존재를 생각하면 자연히 고개가 끄덕여진다.

진감선사가 짚고 다니던 지팡이가 살아나 천년을 이어왔다는 국사암 사천왕수(四天王樹)
ⓒ 김종길

 


국사암은 의상대사의 제자인 삼법 스님이 창건하였다고 전해진다. 전설에 따르면 진감선사 혜소가 화개면에 이르러 나무기러기 세 마리를 만들어 날려 보내 절터를 알아보았는데, 한 마리는 화개면 운수리 목압마을에, 다른 한 마리는 국사암 터에, 또 다른 한 마리는 현재의 쌍계사 터에 앉았다고 한다.

혜소는 나무기러기가 앉은 곳에 쌍계사를 세웠으며, 삼법의 유지를 받들어 국사암을 중창하고 육조대사 혜능의 영당을 이 암자에 세웠다. 국사(國師)를 지낸 진감선사 혜소가 머물렀다 하여 암자의 본래 이름 대신 국사암이라 불렀다는 말이 전하고 있다.

법당에서 들어온 길을 돌아보니 퍽이나 정겹다. 단풍나무 한 그루, 석등, 기와 대문, 사천왕문, 멀리 솔숲까지 모든 것이 암자 그대로다. 법당 뒤의 굴뚝은 참 후리후리한 멋쟁이다. 얼핏 보면 탑의 모양을 본뜬 것 같기도 하다.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는 굴뚝이다. 계곡 옆에 바짝 붙은 해우소도 특이하다.


인간의 손길이 닿지 않은 지리산의 이상향을 찾아

만추란 말이 무색할 정도로 숲은 아직 푸르렀다. 어쩌다 한 번 보이는 붉은 잎사귀가 11월을 넘긴 농익은 가을임을 암시할 뿐 숲은 아직 겨울이 멀다 하였다. 불일폭포로 향했다. 이 길은 쌍계사를 베이스캠프로 삼은 옛사람들이 이상향을 찾아 오르던 길이기도 하다.

불일폭포 가는 길은 넓고 뚜렷하게 돌포장이 되어 있다.
ⓒ 김종길

 


거리는 2.5km, 1시간 30여 분이면 폭포까지 이를 수 있다. 지금은 불일폭포를 구경하는 사람들이 워낙 많이 찾아 길이 뚜렷한데다 돌포장이 되어 있어 누구나 쉽게 오를 수 있다.

개울을 건너고 오르막을 오르다 보면 이내 '환학대'와 '마족대'에 이르게 된다. 고운 최치원이 속세를 떠나 이상향인 청학동을 찾아다닐 때 이곳에서 학을 불러 타고 다녔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 환학대는 그나마 상상이 되지만 임진왜란 때 명나라 장수 이여송이 말을 타고 지리산을 오를 때 말발굽자국이 바위에 새겨졌다는 마족대는 여간 뜬금없는 이야기로밖에 들리지 않는다.

최치원이 학을 불렀다는 환학대
ⓒ 김종길

 


"아, 위에는 겨울인데 여기는 여름이네!"

두꺼운 옷으로 온몸을 감싸며 폭포 방향에서 산을 내려오던 이들이 저마다 한 마디씩 건넨다. 다소 생뚱맞은 말에 뜨악했지만 불일평전에 이르렀을 때 온몸에 스르르 한기가 느껴지자 아까 등산객의 말을 문득 떠올리게 되었다.

불일평전은 예전 청학동으로 불린 적이 있었다. 청학(靑鶴)은 중국의 문헌에 '태평시절과 태평한 땅에서만 나타나고 운다' 는 전설의 새다. 그래서 옛사람들은 태평성대의 이상향을 청학동이라 불렀다. <정감록>에서는 '진주 서쪽 백리 …(중략)… 석문을 거쳐 물 속 동굴을 십리쯤 들어가면 그 안에 신선들이 농사를 짓고 산다'고 했다.

조선조 김일손과 남명 조식은 이곳 불일폭포 주위를 청학동으로 지목했다. 그러나 '계곡이 높고 가파르며 터가 너무 좁아 용납할 곳은 아니다'라며 청학동의 난점을 살짝 제기하기도 했다. 지리산에는 이 곳 외에도 악양 북쪽, 현재의 청학동, 세석고원, 선유동 등 청학동으로 불린 곳이 많다. 이들 모두 지리산에서 살기 좋고 비교적 너른 땅이 있는 곳이다.

옛 선현들이 청학동으로 꼽기도 했던 불일평전의 들머리
ⓒ 김종길

 


 

예전 털보할아버지 고(古)변규화 씨가 살았던 불일평전의 봉명산장 휴게소. 지금은 아무도 살지 않는다.
ⓒ 김종길

 


오늘 산장은 텅 비어 있었다. '봉명산장'으로 불리던 휴게소는 털보할아버지 변규화씨가 2006년 돌아가신 후 아들이 거주하고 있었는데 오랜만에 오니 빈집이 되어 있었다. 그가 쌓았던 소망탑 만이 변함없이 우뚝 서 있었다. 샘물은 여전히 펑펑 솟아나고 있었다.


설악산 대승폭포 다음으로 높은 60m의 거폭, 불일폭포

휴게소 위 골짜기에서 길은 갈라진다. 불일폭포까지는 300미터, 왼쪽으로 올라서면 삼신봉과 청학동 삼성궁 가는 길이다. 갈림길에서 오른쪽으로 꺾으면 폭포로 가는 길, 여태까지의 넓고 평탄하던 길은 여기서 거친 바윗길로 바뀌고 낭떠러지와 가파른 길이 연이어 나타난다.

바짝 신경을 곤두세우며 좁은 벼랑길을 걷고 있는데 숲에서 물소리가 들려온다. 처음엔 바람소리인가 여길 정도로 작던 소리는 점점 우레와 같은 소리로 변한다. 폭포가 지척임을 알겠다. 왼쪽 비탈에는 암자가 하나 있는데 불일암이다. 폭포 소리에 마음이 끌려 암자를 지나쳤다.

불일폭포는 높이 60m에 달하는 거폭이다. 그 웅장함을 사진으로 표현하기엔 역시 역부족이다.
ⓒ 김종길

 


깎아지른 듯이 위태로운 벼랑 아래로 한 번도 인간의 손길이 닿지 않았을 원시림이 까마득히 내려다보인다. 조심조심 발을 옮겨 나무계단을 내려선다. 계단이 놓이기 전에는 벼랑을 엉금엉금 타고 내려갔었다. 얼음이 언 겨울이면 위험하기 짝이 없는 길이기도 했다. 폭포 주위는 육산인 지리산에서 좀처럼 볼 수 없는 깎아지른 절벽지대다.

지금은 번듯한 전망대까지 있는 불일폭포는 청학봉과 백학봉 사이에서 쏟아진 물이 중간의 학연(鶴淵)에서 잠시 머물다 흘러내리는 2단 폭포다. 설악산 대승폭포 다음으로 높은 60m의 거폭이다. 수량이 많은 여름에는 장관이다.

돌아오는 길에 불일암에 들렀다. 암자는 고려 희종 때의 보조국사 지눌이 이곳에서 수도를 했는데 입적 후 시호인 불일보조(佛日普照)에서 유래되었다고 안내문에 적고 있으나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지눌(1158~1210)은 40세 때인 1198년부터 1200년까지 함양 삼정산 상무주암에서 머물렀다.

그는 그곳에서 일체 바깥세상과의 인연을 끊고 수도에 몰두했는데 그가 이곳에 들렀다는 기록과 행적은 없다. 다만, 암자의 이름은 흔히 불교에서 부처를 가리키는 불일(佛日)에서 유래된 것이 아닌가 싶다. 지금의 암자는 1980년대 초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새로이 지은 것이다.

불일폭포 옆 불일암
ⓒ 김종길

 


 

불일암에서 내려다보면 인간의 손길이 한 번도 닿지 않았을 원시림이 깊다.
ⓒ 김종길

 


낭떠러지인 주변 지형으로 인해 암자 터는 비좁다. 겨우 건물 한 채가 들어섰고 몇 발자국 옮기면 이내 담장인 한 뼘 정도의 마당이 있을 뿐이다. 마당 끝에는 평상이 하나 놓여 있는데 이곳에 앉아 담장 너머의 산세를 바라보는 맛이 깊고 그윽하다.

인간의 세상과는 한 번도 접촉하지 않았을 불가촉의 신성한 땅이 예가 아닌가 싶다. 가만히 앉아 있으니 저편 골짜기에서 푸른 학이 날아오는 듯하다. 천 길 낭떠러지 아래의 깊은 고요와 겹겹 산 주름의 번뇌, 장하게 뻗은 노송의 고고함 사이로 바람이 헤집고 들어온다. 옛 선현들이 이곳을 청학동이라 끝내 자신하지 못했다는 건… 글쎄, 모를 일이다.

내려오던 길에 고대(高臺)를 들렀다. 쌍계사를 지나 불일폭포와 국사암 갈림길에서 불일폭포 가는 방향으로 100m 쯤 가다 보면 모퉁이를 돌아가는 왼쪽 산등성이를 치받아 올라가는 희미한 샛길이 보인다.

이곳에서 산길을 오르면 거대한 소나무 몇 그루에 둘러싸인 고졸한 승탑 한 기가 보인다. 보물 제380호로 지정된 이 승탑은 진감선사의 묘탑으로 보기도 하는데 조형적으로 뛰어난 작품은 아니다. 그러나 이곳 고대에 서면 경치가 후련하고 그 분위기가 그윽하여 불일폭포를 찾게 되면 꼭 한 번씩은 들르게 된다.

진감선사의 것으로 추정되는 승탑이 있는 고대는 경치도 후련하거니와 운치가 있다.
ⓒ 김종길

 

 


'역마'의 화개장터, 뻥튀기장수와 버스안내양

다시 버스에 올랐다. '화개장터' 삼거리 길에서 버스는 곧장 하동으로 가지 않고 화개버스정류장으로 돌아갔다. 손님이 있나 싶어서 고개를 내미는데 조금은 젊어 뵈는 여자 검표원이 버스에 올랐다. 버스 좌석을 재빨리 눈으로 훑어 승객 숫자를 확인하더니 기사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눈웃음을 보냈다. 그리고 버스에서 내려 종종 사라졌다. 차창 너머로 '화개장터' 비석이 보이고 계곡 건너로 보이는 낡은 지붕을 인 초가가 낯설기만 하다.

'화개장터'의 냇물은 길과 함께 세 갈래로 나 있었다. 한 줄기는 전라도 땅 구례 쪽에서 오고 한 줄기는 경상도 쪽 화개협(花開峽)에서 흘러내려, 여기서 합쳐서, 푸른 산과 검은 고목 그림자를 거꾸로 비춘 채, 호수같이 조용히 돌아, 경상·전라 양 도의 경계를 그어주며, 다시 남으로 남으로 흘러내리는 것이, 섬진강 본류였다.

하동, 구례, 쌍계사(雙磎寺)의 세 갈래 길목이라, 오고 가는 나그네로 하여, '화개장터'엔 장날이 아니라도 언제나 흥성거리는 날이 많았다. 지리산 들어가는 길이 고래로 허다하지만, 쌍계사 세이암(洗耳巖)의, 화개협 시오 리를 끼고 앉은 '화개장터'의 이름이 높았다. 경상·전라 양 도 접경이 한두 군데일 리 없지만 또한 이 '화개장터'를 두고 일렀다.

장날이면 지리산 화전민들의 더덕, 도라지, 두릅, 고사리 들이 화갯골에서 내려오고 전라도 황아장수들의 실, 바늘, 면경, 가위, 허리끈, 주머니끈, 족집게, 골백분 들이 또한 구롓길에서 넘어오고, 하동길에서는 섬진강 하류의 해물장수들의 김, 미역, 청각, 명태, 자반조기, 자반고등어 들이 들어오곤 하여, 산협치고는 꽤 은성한 장이 서는 것이기도 했으나, 그러나 '화개장터'의 이름은 장으로 하여서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장이 서지 않는 날일지라도 인근 고을 사람들에게 그곳이 그렇게 언제나 그리운 것은, 장터 위에서 화갯골로 뻗쳐 앉은 주막마다 유달리 맑고 시원한 막걸리와 펄펄 살아 뛰는 물고기의 회를 먹을 수 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주막 앞에 늘어선 능수버들 가지 사이사이로 사철 흘러나오는 그 한(恨) 많고 멋들어진 춘향가, 판소리, 육자배기들이 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게다가 가끔 전라도 지방에서 꾸며 나오는 남사당 여사당 협률(協律) 창극 신파 광대 들이 마지막 연습 겸 첫 공연으로 여기서 으레 재주와 신명을 떨고서야 경상도로 넘어간다는 한갓 관습과 전례가 이 '화개장터'의 이름을 더욱 높이고 그립게 하는 것인지도 몰랐다.(김동리의 역마(驛馬), 1948. 1)

화개버스정류장에서 오랜만에 검표원을 보았다.
ⓒ 김종길

 


화개장터를 떠난 버스는, 물과 함께 갈리어 길도 세 갈래 나 있는데 동남으로 하동으로 난 길을 향해 달렸다. 악양 들판 언저리에서 뻥튀기 장수가 탔다.

"뻥튀기 좀 드소. 싸게 드릴 테니. 축제가 영 신통치 않아요. 악양, 이름을 봐서는 바위가 많은 줄 알았는데 악양의 '악'이 바위가 많아서 그런 게 아닌가요?"

버스의 두 자리를 차지한, 자기보다 더 큰 비닐자루에서 뻥튀기 하나를 꺼내더니 옆에 앉은 예순 남짓의 아주머니에게 건넨다.

"이가 안 좋아서리… 바위는 화개가 더 많지."

아주머니는 한 손으로 입을 막고 다른 손으로 뻥튀기를 밀쳐내며 큰소리로 말했다.

"혹시 조 목사 아시오?"
"내립니다. 천천히 나올소."

뻥튀기 장수는 계속 말을 잇고 싶은 듯했으나 버스를 세우는 안내양의 목소리가 더 컸다. 아, 그러고 보니 사라진 줄만 알았던 '시골버스 안내양'이었다. 버스가 서자마자 냉큼 길에 내려서더니 짐칸의 짐을 꺼내어 노인들 손에 잡혀주고 "잠시만요" 하더니 어느새 버스에 먼저 올라 버스에 오르는 촌로들의 짐을 받아 버스 통로에 실었다.

"할머니요. 인자 안내양, 차장이라 안 하고 안내도우미라 합니다. 안내도우미요. 알겠지요."

고마움을 표하는 할머니에게 안내도우미 김정희씨는 미소 지며 말했다. 하동군에는 모두 6명의 안내도우미가 있다. 군내버스인 농어촌버스에 올해부터 하동군에서 버스안내도우미를 두어 서비스를 하고 있다. 1주일 단위로 일을 하는데 2대를 빼고 거의 모든 농어촌버스에 도우미들이 번갈아 활동하고 있다고 했다.

"노인 분들 짐 먼저 내리고 다음에 내립니다."
"6시 내 고향에 나오는 안내도우미보다 낫네요."
"고맙습니다. 근데 그 사람은 노래를 너무 잘 하잖아요. 가수라서…."

버스에서 내리던 누군가가 친절하다며 칭찬을 하자 김정희 씨는 겸손을 떨었다.

"좋은 추억 되세요."

차창 너머로 섬진강을 가로지르는 구례와 하동을 잇는 남도대교가 보인다.

ⓒ 김종길

 


터미널에 내리니 5시 50분, 코앞이 하동역인데 기차 시간이 빠듯했다. 택시를 탔다. 다행히 5시 58분, 부전행 기차는 아직 출발하지 않았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오마이뉴스와 코레일에 연재 중인 <경전선 남도 800리> 열세 번째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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