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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전선, 남도 800리

줄 서서 사먹는 이유 있었네, 반성오일장 손두부집, 경전선 800리

 

 

 

 

 

 

 

줄 서서 사먹는 이유 있었네... 성오일장 손두부집

[경전선 남도 800리, 삶의 풍경 왁자지껄 반성오일장과 겨울 수목원

 

 

 

 

 

 

새로 지은 반성역

ⓒ 김종길

 


경전선 반성역에서 내렸다. 10분이나 지나도록 버스는 오지 않았다. 평소 같으면 묵묵히 기다렸겠지만, 바람마저 드세 그림자도 보이지 않는 영하 10도의 날씨를 견뎌내는 건 고역이었다. 시각은 오전 10시쯤. 철로 아래에 있는 반성역 건물은 밖에서 보면 2층 모양인데 건물 위로 기차가 다니는 철길이 깔려 있다. 그러다 보니 역사 옆 철로 아래 빈 공간은 바람길이 돼 들판의 매서운 바람이 이 좁은 공간을 통과하면서 귀를 베어내는 듯한 추위를 몰고 오는 강풍으로 변하는 것이었다.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역사로 들어서니 앞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역사 안이라고 해서 난방이 잘 되는 것도 아닌데, 바깥 날씨가 워낙 춥다 보니 안경에 성에가 가득 끼어 버렸다.

호주머니에서 주섬주섬 천을 꺼내 안경을 닦고 있는데 역무원이 다가왔다. 갓 서른을 넘겼을까. 먼저 꾸벅 인사를 하기에 여행자도 얼떨결에 엉거주춤 인사를 했다. 역무원은 금방 버스가 지나가는 걸 봤다고 했다. 정류소까지 들어오지 않고 역사 뒤쪽에서 돌려나간 것 같다고 했다. 타고 내리는 손님도 없으니 안쪽까지 들어오지 않고 입구에서 버스를 돌린 모양이라고 했다. 그래도 버스가 빠지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친절하게 덧붙였다.

영하 10도가 넘는 날, 반성역에서 버스를 기다리다
ⓒ 김종길

 


"10시 15분에 수목원 가는 버스가 있으니까 조금 더 기다려 보시죠. 걸어가면 20~30분은 걸리니 이 추운 날씨에 쉽지는 않을 겁니다."

걸어가면 얼마나 걸리느냐는 여행자의 결기 아닌 결기에 역무원은 그 무슨 가당치도 않은 말이냐는 투로 손사래를 쳤다.

"여기서 몸 좀 녹이시다 춥더라도 한 10분 정도 되면 저 앞으로 나가서 기다리시는 게 좋을 겁니다. 버스가 정류소까지 들어오지 않으면 또 놓칠 수도 있으니까요."

바람이 멈춘, 조금은 온기가 있는 역사로 들어오니 냉동이 된 이마와 머리끝 사이가 무척 간지러워 손으로 벅벅 긁었다. 그 꼴이 우스웠는지 역무원은 억지로 웃음을 참느라 입을 앙다물고 있었다.

"사진사 양반은 이 추운 날 오데 갑니꺼?"

옛 경전선 반성역
ⓒ 김종길

 


오늘은 수목원과 반성오일장을 둘러볼 계획이다. 다행히도 그 친절한 역무원 때문에 역사 한 구석에 붙여진 버스시간표를 찾을 수 있었다. 생각보다 반성터미널과 수목원 가는 버스는 자주 있었다. 임시로 생겼던 수목원역이 지난해 10월에 다시 없어지면서 이제 수목원에 가기 위해서는 신반성역에서 내려야 한다.

역무원이 시키는 대로, 시계가 10시 10분을 가리키길 기다렸다 역사 문을 열고 나왔다. 허공에서 맞부딪히는 엄청난 바람소리와 함께 추위가 온몸을 덮쳤다. 버스가 들어올 위치와 돌릴 지점을 가늠해보고 무조건 햇볕이 있는 곳으로 걸음을 재게 놀렸다.

멀리, 농로처럼 좁게 보이는 길을 따라 버스 한 대가 모습을 드러냈다. 바람을 가르며 흔들흔들 다가오는 모습이 몹시 추운 모양새다. 구불구불 논둑 너머로 보이던 버스는 순간 자취를 감추는가 싶더니 어느새 철길 아래 햇빛이 경계를 이룬 틈을 비집고 눈앞에 나타났다.

버스는 만원이었다. 젊은 사람이라고는 한두 명 될까. 얼굴에 고단함이 묻은, 그럼에도 설을 앞둔 설렘을 애써 감추지 않은 표정의 촌로들은 흔들리는 버스에 몸을 맡긴 채 장바구니를 단단히 챙겼다.

경상남도수목원과 반성시장 가는 버스
ⓒ 김종길

 


반성터미널로 곧장 갈 줄 알았던 버스는 수목원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차 안에 있는 노선도를 보고서야 '아차' 싶었다. 반성터미널로 바로 가는 버스는 5개 정류소만 거치면 되는데 이 버스는 내촌·장곡·두소·대사·남산·금야·상남·원동·답천·양전·수목원을 거쳐 다시 개암·구리·시정 마을 등을 거의 한 바퀴 돈 다음에야 반성터미널에 이르렀다.

이왕지사 이렇게 된 바에야 시골버스 여행이라도 푸지게 할 작정을 했다. 마을 구경도 실컷 하고 버스에 오르내리는 이들을 유심히 살피기도 하고, 노인 분들 자리도 봐드리고, 사진도 찍고... 그러다보니 어느새 버스라는 공간은 동네 사랑방처럼 아주 친숙하게 다가왔다.

"사진사 양반은 이 추운 날 오데 갑니꺼?" 카메라를 메고 있으니 사진사로 보였나 보다. 허기야 시골에선 더러 영정사진 찍으러 오는 사진사들로 착각을 하기도 한다. 수목원에 간다고 했더니 꽃 피면 좋긴 좋은데 하필이면 이 추운 날 뭐 볼 게 있어 가느냐는 투로 혀를 끌끌 차신다.

그러다 작은 승강이가 벌어졌다. 사단은 한 아주머니가 아는 척을 하면서부터였다. 수목원 버스정류소에서 내리기보다는 조금 먼저 내리면 수목원 가기가 훨씬 수월하다는 것이었다. 정류소가 아닌데 버스가 서겠냐며 다른 아주머니가 그 무슨 가당치도 않은 소리냐며 언성을 높이자 처음 말을 꺼냈던 아주머니는 이에 질세라 기사 양반한테 부탁하면 세워준다고 맞받아쳤다. 옥신각신 한 치도 양보하지 않던 싸움은 버스기사의 무뚝뚝한 한마디로 허무하게 정리됐다. "버스는 수목원에서만 섭니다." 본의 아니게 무안해진 여행자는 얼른 내렸다.



봄날을 기다리는 겨울 수목원

경상남도수목원
ⓒ 김종길

 

경상남도수목원
ⓒ 김종길

 


경상남도 수목원은 진주시 반성면에 있다. 예전에는 지명을 따 도립반성수목원으로 불리다 2000년에 지금의 이름으로 바꿨다. 전체 면적이 56ha고 총 1500여 종에 10만여 본의 식물이 식재돼 있어 명실공히 경남을 대표하는 수목원이다.

수목원에서 제일 먼저 맞닥뜨리는 공간은 산림박물관. 1층 로비에 800여 년 된 고사한 소나무가 전시돼 있는 산림박물관은 각종 동식물의 표본과 체험실이 있어 아이들에게도 유용한 학습공간이 된다. 식물 표본·야생화 표본·동물 표본·나무 표본·곤충 표본·화석 표본 등 잠시라도 눈을 뗄 수 없을 정도로 볼거리가 가득하다.

산림박물관을 나오면 수목원 곳곳으로 이어지는 갈랫길이 나온다. 마음의 여유만 가진다면 복잡하게 나뉜 길을 시간에 쫓기지 않고 넉넉하게 거닐 수가 있다. 열대식물원·무궁화홍보관·난대식물원·침엽수원·산정연못·대나무숲·폭포·전망대·선인장원·화목원·활엽수원·약용식물원·야생동물원·수생식물원·장미원·철쭉원 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공간을 느긋하게 걸어볼 일이다.

경상남도수목원 메타세쿼이아길
ⓒ 김종길

 


그리고 이곳에서 눈길을 끄는 것 하나, 바로 메타세쿼이아 길이다. 하늘을 향해 쭉쭉 뻗은 이 길은 굳이 담양의 그 유명한 메타세쿼이아길이 아니더라도 겨울 낭만을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동물원은 아이들의 사랑을 독차지한다. 간혹 겨울잠을 자는 동물들이 있어 아이들의 눈망울에는 아쉬움도 더러 보이지만 그렇다손 치더라도 아이들의 동물사랑이 변할 리는 없다.

작은 개천을 지나니 한적한 오솔길이 나왔다. 낙엽이 수북이 쌓인 언덕 사이로 난 오솔길을 따라 우거진 짙은 상록수림은 겨울임을 잠시 잊게 한다. 봄이면 철쭉이 연못을 꽃피우는 정자에 서서 마지막 여유를 느껴본다. 한 무리의 거위가 무엇에 놀랐는지 소리를 질러댄다. 놀란 아이는 엄마 품을 파고들고 겨울도 저만치 멀어간다.

경상남도수목원의 관람 시간은 3~10월에는 9시부터 18시, 11~2월에는 9시부터 17시까지다. 산림박물관은 매주 월요일과 1월 1일, 설날·추석에 휴관한다.

그리움만 남은 겨울 간이역, '수목원역'

2012년 10월 23일 폐역이 된 진주수목원역
ⓒ 김종길

 


간이역에 대한 기억은 누구에게나 아련하다. 간이역, 언젠가 다녀왔음에도 오랜 시간 켜켜 묻은 세월의 흔적처럼 또렷한 형상이 좀처럼 잡히지 않는 아슴푸레한 추억으로 남는 곳이다. 때론 짙은 향수만 불러일으켜 몹쓸 병을 도지게도 한다.

그 흔한 매표소도, 역무원도 없이 승강장만 덩그러니 있는 간이역. 진주수목원역 글자만 오도카니 서 있는 안내판,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한 오래된 이발소, 동네사람들이 모여들었을 낡은 간이역 상회, 굳게 닫힌 이발소, 아직도 먼지를 흠뻑 뒤집어 쓴 채 요란하게 돌아가는 오랜 정미소, 몇 년 전 기차를 기다리며 먹었던 철길 옆 국수집... 이 작은 수목원역에 대한 기억은 천 갈래 만 갈래로 끝없이 이어졌다.

한때 승객이 없어 하나 둘 사라진 시골의 다른 간이역들과는 달리, 수목원으로 인해 오히려 새로이 역이 생기고 승객들의 수도 점차 늘어나고 있던 수목원역은 역에서 내려 걸어서 5분 남짓이면 수목원에 도착했다. 2007년 10월 19일에 당당히 경전선의 간이역이 돼 하루 11회의 무궁화호가 정차했다가 5년 만인 2012년 10월 23일 진주 마산 복선 개통으로 1832일 만에 다시 사라진 수목원역은 아직도 경남 진주시 일반성면 개암리에서 그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진주수목원역 소경
ⓒ 김종길

 

 

무궁화호가 정차하던 2009년 진주수목원역 소경
ⓒ 김종길

 


설 대목 왁자지껄 반성오일장

강추위에도 대목 맞은 오일장은 붐볐다. 진주일대 오일장 중에서도 가장 큰 장에 속하는 (일)반성시장은 지수·사봉·진성 등 인근 5개면에서 온 사람들로 시장골목은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설 대목이라 그런 줄 알았는데 국밥집 사장의 얘기로는 대목이 아니더라도 늘 사람들이 많단다. 요즈음 한산해진 여느 시골장과는 확연히 달랐다. 반성시장은 3일과 8일에 열리는 오일장이다. 이곳 반성역은 예전 진주 마산 간 13곳의 경전선 역 중에서 살아남은 진주역·마산역·중리역·함안역을 제외하면 군북역과 더불어 면 단위 역으로 유일하다. 그만큼 아직 사람들의 왕래가 잦고 활기가 남아 있는 곳이다.

반성오일장
ⓒ 김종길

 


 

반성오일장
ⓒ 김종길

 


사람들이 길게 늘어서 있는 풍경이 들어왔다. 이곳 시장에서 가장 인기 있는 손두부집이다. 추운 날씨에도 길게 늘어서 한참을 기다린 끝에 손두부를 사가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이 집 손두부는 제법 입소문을 타서 진주 시내에 사는 이들도 더러 찾는 곳이라고 했다.

길게 늘어서 있는 사람들 때문에 두부집 앞으로 도저히 다가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주인 양반 인터뷰는 다음을 기약해야 했다. 아쉬운 마음에 가게를 찬찬히 살피고 있는데 가게 벽면에 걸린 문구가 마침 눈에 들어왔다.

"매일매일 점검 합시다 - 화장실 청소, 공장 주변 청소, 창문 및 창틀 청소, 판매대 주변 청소, 거미줄 및 파리 무조건 없앤다."

그리고 큼지막하게 별표를 해서 강조한 글씨가 보인다.

"두부 작업대 및 기계 청소 철저히, 두부 상자 및 묵 상자 청소 철저히"

그리고 그 옆 게시판에는 다시 강조를 해뒀다.

"상인은 똑똑하되 고객을 가르치려 하면 안 되고 / 상인은 논리적이되 고객을 이기려 하면 안 되며 / 상인은 높은 곳을 보되 / 고객을 내려다 봐서는 안 된다 / 상인은 영리하되 교활하지..."

그제야 이 손두부집이 손님이 많은 이유를 알겠다.

반성오일장에서 인기 있는 손두부집의 긴 줄
ⓒ 김종길

 


 

길게 늘어서 있는 사람들이 손두부를 사고 있는 모습
ⓒ 김종길

 


정말 매서운 날씨다. 아무리 물을 끼얹어도 생선은 금세 얼어 버려 생선장수의 손질은 더디기만 하다. 밥 때를 놓친 상인은 아예 시장바닥에 작은 화로를 놓고 냄비를 얹어 라면을 끓이고 있다. 양은냄비에서는 하얀 김이 뭉글뭉글 피어올라 지나는 이의 코를 자극한다. 과자를 길게 펼쳐놓은 난전에도 할머니들이 기웃거린다. 설날 시골에서 손주들에게 딱히 줄 수 있는 건 과자뿐, 그마저도 투박한 시골과자는 아이들에게 인기가 없다. 차가운 손주의 발을 덥혀 줄 알록달록 양말을 고르는 할머니의 손은 고민이다.

새끼줄에 꽁꽁 묶인 메주는 차디찬 콘크리트바닥에서 겨우 한줄기 햇빛만을 위안삼아 데리고 갈 주인을 하염없이 기다리지만 반나절이 지나도록 허탕이다. 기름집에서는 고소한 냄새가 진동하고 추위에 쫓긴 장꾼들은 국밥집에 모여 소주잔을 기울인다. 골목 외진 곳에 겨우 자리 잡은 할머니는 춥기만 하다. 추운 손님들은 휑하니 지나치고 언 입은 쉬이 떨어지지 않는다.

반성오일장
ⓒ 김종길

 


 

반성오일장
ⓒ 김종길

 


사람들이 뜸한 골목 뒤쪽은 햇살마저 사라지고 그림자만 길게 누웠다. 아무리 고개를 내밀어도 그림자 긴 뒷골목에는 좀처럼 손님이 오지 않는다. 간혹 오가는 이들도 강추위에 냉큼 지나쳐 버린다. 미처 마땅한 장소를 찾지 못한 상인은 트럭 채 문을 열었다.

이곳 시골장에도 마트가 몇 곳 생겼다. 시장을 포위하듯 빙 둘러 있는 마트도 모자라 새로이 또 다른 마트가 들어설 모양이다. 이래저래 시장은 가난하고 비루하다. 넘치는 활기가 아니라면 그 강한 생명력이 어디에 있음이랴. 그저 내일이랑 사치일 뿐 오늘을 열심히 살아내는 것일 뿐이다.

반성오일장
ⓒ 김종길

 


 

반성오일장
ⓒ 김종길

 


시장 안쪽으로 국밥집이 보인다. 시골장에 와서 뜨끈한 국밥 한 그릇을 후루룩 말아 먹으면 참으로 흐뭇한 일.

"어서 오이소. 2등 싫다! 반성 최고의 일미(一味) 옛 장터국밥 맛 그대로!"

유난히 눈에 뛰는 간판 때문에 퍼뜩 문을 열고 들어갔더니 국밥집이 아니었다. 출입구가 나란히 붙어 있는 바람에 옆집 문을 국밥집으로 착각하고 연 것... 덕분에 여행자는 남자에게 참말로 좋다며 주인아주머니가 자꾸 권하는 장어국밥을 먹게 됐다.

장어국밥 한 그릇을 든든히 먹고 시장으로 나오니 해는 서서히 기울고 있었다. 이제 돌아갈 일만 남았다. 인도를 따라 걸었다. 소재지는 길게 늘어선 열촌이었다. 한참을 걷자 옛 반성역이 골목 끝으로 보였다. 펜션같이 생긴 저 간이역도 이제 옛 유물이 돼 버렸다. 터미널에 도착. 다시 신반성역으로 가야 했다. 시동을 켜지 않은 버스는 노인들로 가득 차 있었다. 수심이 가득한 창으로 햇살이 경계를 넘어서자 버스는 달리기 시작했다.

신반성역 가는 버스

ⓒ 김종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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